아브라함의 중보기도

2005.07.07 09:04

윤봉원 조회 수:1218 추천:91

창 18:22-332005070302

날자: 2005년 7월 3 주일 오후

 

제목: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본문: 창세기 18 22- 33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1. 아름다운 중보자

 

중보란 하나님께 어떤 사람을 대신해 내가 대신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중보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기 원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며 우리를 기도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분인 성령님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중보의 영어식 표현은 '인터세션(intercession)' 이다. 이 단어의 뜻은 둘 사이에 내가 끼여 들어 가는 것, 즉 둘 사이에 서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중보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얻고자 권리를 가지고 간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권리를 가진 사람들의 간구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브리암 창세기 18 22-33절에 보면 중보 기도자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이 맨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는 빈털터리였다. 그란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축복하셨고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조카 롯도 아브라함과 함께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 그런데 물질이 많아짐에 따라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물질이 많아지면 하나님의 일이 모두 잘될 텐데'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전보다 훨씬 못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보 기도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성도라면 물질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우상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실 때에야만 참된 해결의 길이 열린다. 중보 기도자는 비록 빈약하고 형편없는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그분이 원하는 기도제목을 붙들 때 위대하게 쓰임받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여하튼 두 사람이 헤어질 때 아브라함이 섭섭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오히려 롯을 좋은 곳으로 보낸 뒤 그 곳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브라함의 행동을 기억해 보라.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는 그 마음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만일 우리를 억울하게 하고 섭섭하게 했던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기뻐하는 마음이 있는가? 그 마음을 떠나가게 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진정한 중보 기도자는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 5:4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의지만으로 좀처럼 할 수 없는 일이 원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이 자기 안에서 자기를 변화시킬 때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제 롯이 전쟁터에서 구원받은 후 하나님은 소돔 땅을 완전히 멸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원인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지만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롯을 구원하기 위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중보 기도 했는지 살펴보자.

 

2. 아브라함의 기도

 

1) 믿음의 기도

 

첫째, 아브라함은 믿음의 기도를 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확신하는 기도, 즉 하나님이 말씀으로 약속하신 것들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 주실 것을 믿고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믿음의 사람이 하는 기도임을 말씀하신다.

 

성경은 본문 어디서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에 대해 믿음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라고 말합니다.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기도,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에 대한 믿음의 반응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기 원하시며 그 기도에 역사하기 원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11:22-2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14:13-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15:7).

 

믿음으로 의로워진 아브라함은 어떻게 기도했는가?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 중보 기도 했을 때 기도의 응답은 롯에게 나타났습니다. 롯은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로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에게 ‘내가 기도하여 네가 구원받았다'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감사할뿐이었습니다.

 

의인의 기도에는 오직 하나님의 의만이 나타난다

 

중보 기도자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사 응답하신 일에 대하여 자신의 의를 나타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신 것에 대하여 온전히 감사하라. 의인의 기도에는 자신의 의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만이 나타나며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진다.

 

중보 기도자는 영적인 체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때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영적인 체험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어나기를 원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체험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려 하심에 제한받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을 얻었을 때 나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그 은사와 능력을 지속시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 그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들의 기도는 올바른 동기와 목적과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명예나 물질, 권세, 숫자적인 부흥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하나님의 동기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영국 웨일즈 부흥 운동의 시발점은 20명이 채 안되는 중보 기도자들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과거 기독교 역사를 움직인 동기와 목적과 소망이 뚜렷한 기도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보 기도자들의 기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분량만큼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면 영적 생활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작지만 자신의 믿음의 분량만큼 순종하는 두 달란트 가진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큰 역사를 이루신다. 오히려 많은 달란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욕대로 사용하면 영적 생활이 깨어질 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잘못된 욕망과 정욕을 가지고 구하는 것을 응답하지 않으신다. 또 인간적인 야망과 야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것을 구할 때에는 악한 영이 역사 하는 근거지임을 깨달아야 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4:3).

 

2) 겸손한 기도

 

둘째는 겸손함이다. 이 겸손함은 바로 온유함과 순수함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보라. 그는 겸손의 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18:27)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구하는데 "나는 티끌과 같은 존재이지만 감히 주께 구합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스스로를 볼 때는 형편없지만,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고 택한 백성으로 삼으셨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으로써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감히 간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라는 말은 하나님께 진정한 겸손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특히 교만과 겸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잠언서는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18:12)라고 말합니다. 겸손은 온유와 연결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란, 하나님 앞에서 잘 길들여진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잘 길들여진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라"시면 갔고 "아니라" 하시면 아니라고 했습니다.

 

준마와 야생마를 비교해 보라. 야생마와 준마가 뛰면 누가 더 빠르겠는가? 당연히 야생마가 빠르다. 그러나 생마를 타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는 준마는 주인이 '뛰어!" 하면 뛰고 '!" 하면 서지만, 야생마는 주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뛰기는 잘하나 자기가 뛰고 싶은 때 뛰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 신앙의 삶이 성령의 인도로 길들임을 받아야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또한 겸손함에는 순수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11 :29).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 :12).

 

겸손은 순수함을 의미하고 순수함은 단순함을 뜻합니다. 순수할수록 다른 것이 섞이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단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라"하시면 가고 하나님이 "그렇다"하시면 그런 것으로 인정할 줄 알았다. 그러나 복잡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계속 토씨를 달기 때문에 큰 믿음을 상실해 버린다. 우리는 그 순수함을 기도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주님께로의 순수함을 사모한다면 이렇게 기도하라.

 

"주님, 내 마음과 내 생각 속에 주님이 원치 않으시는 것들은 제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내 마음과 생각, 나의 삶 속에서 주님 앞으로 겸손히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겸손한 마음 없이는 중보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3) 담대한 기도

 

하나님께서 중보 기도에 우리를 사용하려 하시는 데 제한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셋째,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18:31).

 

영적 전쟁이나 영적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이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승리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와 능력을 부어 주시고 담대한 자를 시 용하기 원하신다. 은혜와 능력이 있으나 담대하지 못한 자들은 매일 주춤거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다. '내가 감히 고하이다"라는 아브라함의 말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구합니다' 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거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세관에서 열심히 돈을 세고 있는 마태와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기 위해 열심히 그물들 깁는 베드로를 부르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을 택하여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가능성을 보신 것이며 그들에게 당장 모든 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신 것은 담대함을 보시기 위해서이다.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담대하게 따라 올 수 있는지를 보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원하신다.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키워 주신 후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셨던 것도 그의 순종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불순종은 불신앙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감동을 주시며 기도하기를 원하셨을 때, 상황과 처지를 생각하여 순종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하나님은 주께 순종하며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통하여 변함없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 집이나 교회에서, 음악을 들을 때나 운전할 때라도 하나님은 언제 어느 때든 우리에게 순종과 담대함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주춤거림 없는 담대함을 원하신다.

 

담대한 믿음이 없이는 축사 사역도 할 수 없고,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도 없다. 기도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해를 입게 됩니다. 우리가 겁이 나서 소리지르는 것과 귀신을 내쫓기 위해 담대하게 외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담대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4) 공동체를 위한 기도

 

네 번째로 아브라함은 롯과 성 중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 오십 의인 중에 오 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오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18:24-28).

 

우리는 이 본문에서 조카 롯 한 사람 때문에 소돔 성 전체를 놓고 중보하는 아브라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기도를 원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한 사람이 어느 곳에 가든지 그곳에서 축복을 받음으로써 동시에 주변 사람들도 축복을 받는다는 원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 원리는 요셉에게도 적용됩니다. 중보자들의 기도를 통하여 가는 곳마다. 또는 기도하는 곳마다 그곳에 함께한 모든 이들이 형통케 되는 축복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중보자는 설사 내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에 유익이 된다면 그것을 위해 중보 기도 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믿음의 분량을 늘려 주셨음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계속해서 기도할 때 세계를 가슴에 품고 기도할 수 있게 된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크다.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향락을 한꺼번에 다 마음속에 집어 넣는다 하더라도 만족 할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몸부림친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마음속에 부어도 만족 시킬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그 큰 우리의 마음에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분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때에야 비로소 빈 공간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또한 인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시도록 기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중보 기도자들이 바로 이러한 기도를 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 그리고 기도 가운데 성령의 감동을 통해 믿음으로 주님의 마음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은 한 나라를 위해 홀로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순수함을 가지고 겸손과 담대함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에 맞는 기도를 하였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5:1)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10)

 

5) 끈기 있는 기도

 

다섯 번째는 끈기 있는 기도이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소돔 성의 구원을 위해 간절함으로 끈기 있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려는 순간에 기도를 멈춘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나님께서 즐거이 응답하시는 것을 기다릴 줄 아는 여유가 중보자에게는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질 때까지 끈기 있게 기도하는 것을 즐겨 보라. 이전에 알지 못했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 중보 기도자의 기도 자세에 대하여 나누어 보았습니다. 중보 기도자는 하나님과 멀어진 자,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자, 하나님께에 나아오는 자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돕는 자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가 구원받도록 기도해야 하고, 질병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다면 질병이 낫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악한 영이 묶고 있다면 그 영을 결박하고 내쫓아야 합니다. 마음의 상처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중보자들에게 그것을 알게 하시고 고칠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심으로써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용복 목사님의 ‘중보기도’에서 인용}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5-07-0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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