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태도:: (묵상의 능력에서 발췌) 토머스 머튼 지음 , 출판사: 두란노
성스러운 태도는 본질상 묵상적이며, 세속적 태도는 본질상 활동적입니다. 사랑에 기초한 성스러운 활동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활동도 묵상을 지향하는 한에서만 성스럽다는 것입니다. 인생관이 세속적인 사람은 언뜻 자기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미워합니다. 그는 자기와 함께 또는 자기 곁에 설 수 없다고 자기를 미워합니다. 자기를 미워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먼저 내면의 외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내면의 외로움과 빈곤에 저항하다 그만 교만해지고 맙니다.
교만이란 외적 자아가 외적 자아에만 고착되어 자아의 다른 요소들을 모두 거부하는 것입니다. 다른 요소들의 책임까지 감당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허해 보이고 불확실하며 대체로 어두움과 무지의 특성을 지닌 내적 자아를 거부하는 것도 그에 포함됩니다. 이렇듯 교만은 거짓되고 교활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날조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이 환상을 지키기 위해 수고를 쏟아 붓는데, 그 과정에서 강한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고된 노력은 우리 존재를 소진시키고 파괴할 뿐입니다.
성스러운 태도와 내적자아의 수용 사이에는 미묘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무지한 자아를 수용하다 보면 우리 내면의 신성한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성스러운 외경은 환각이 아니라 영적 에너지가 우리 안에서 움직인다는 표식입니다. 우리 안의 내적 자아가 하나님의 초월적, 비가시적 능력으로 화해하고 재결합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겸손, 즉 우리가 거부하고 무시해 왔던 내면의 모든 것을 온전히 수용한다는 뜻입니다.
내적 자아는 죄를 인정함으로써 정화됩니다. 내적 자아가 죄의 온상이어서가 아니라 외적 자아가 우리의 죄와 내면성을 동시에 부인하여 똑같은 어두움으로 격하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적 자아에 빛이 들면 죄가 표면에 떠오르면서 슬픔의 시간을 거치고 죄책감을 통감함으로써 청산됩니다.
이렇듯 ‘성스러운’ 시각을 지닌 사람은 자기를 미워할 필요가 없으며, 외롭게 남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외로움 안에서 평안하고, 또 그것을 통해 하나님 임재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자신의 외로움에서 벗어나 타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타인을 대할 때 상대의 죄를 생각하며 정죄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상대 이면에 계신 하나님의 형상인 순수한 내적 자아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스러운 시각을 지닌 사람은 타인을 존중하고, 또 타인이 그들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도울 줄 압니다. 그들의 두려움도 일부 덜어주고, 또 그들 자신을 잘 참아내도록 도와줍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내면이 평온해지고 자기 빈곤의 심연 속에서 하나님을 볼 줄 알게 됩니다.
영적 생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어두운 곳에 숨은 자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아를 자기 안의 모든 악과 동일시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활동의 악한 성장과 영혼의 선한 터를 구별하는 분별력을 길러야 합니다. 또 그 터에서 새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잘 닦아 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성스러운 태도란 내적 자아를 인식할 때 우리 안에 생겨나는 신비 앞에서 경외하고 침묵할 줄 아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무지 안에서 침묵하면서 희망과 기대 등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맡깁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실체와 삶 자체의 흐름입니다. 이렇듯 성스러운 태도는 실체가 어떤 형태로 나타난다 해도 그것을 근본적으로 깊이 존중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세속적 태도는 실체를 철저히 멸시합니다. 세속적 사고는 자신의 조잡한 틀을 오히려 실체에 강요하려듭니다. 세속적 인간은 편견과 선입견과 한계에 묶여서 살아갑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편견으로부터 이상적으로 자유로우며, 삶의 새로운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합니다. 굳이 ‘이상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믿음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외적 자아 안에 군림하는 또 다른 형태의 편견이며, 새로운 로고스에 대한 선입견입니다. 전혀 영적이지 않은 데다 전적으로 외적 자아에 얽매인 채 관습과 편견에 휘둘리는 경직된 신앙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잘 순종하고 유순한지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뜻과 실천적으로 연합하는 것이야말로 묵상적 인식에 꼭 필요한 단계임을 밝히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15-16, 21)
이어 예수님은 완벽한 최종 시험, 참사랑의 증거를 덧붙이셨습니다. 묵상가와 세상에 속한 사람, 성도와 그저 그런 그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결정적 요인입니다.
“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요 14: 23-24)
하나님 뜻에 전폭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은 영적 세계를 맛볼 수 있습니다. 진정한 묵상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사랑의 조그만 움직임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성 토머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은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다.”
2008년 12월 24일 오후 11: 07 이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