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사랑, 소망 ( 오깨 : 한규삼 지음, 출판사: 두란노)에서 발췌
기독교 가르침의 중심이 되는 3대 교훈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이다. 사도 바울이 쓴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세 가지 미덕 중 사랑을 최고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바울이 항상 사랑을 최고의 덕으로 강조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그의 서신 다른 곳에서 믿음과 소망의 중요성도 충분히 강조한다. 세 가지 덕은 고유의 맛과 멋 그리고 힘과 비밀을 가지고 있다. 믿음, 사랑, 소망은 우리의 시각을 교정해 준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우리에게 보이는 세계가 있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소망을 볼 때 각각 새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믿음의 눈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신뢰와 순종을 가능케 하는 눈이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고 그분께 순종할 수 있다. 견고한 성도는 먼저 자신에게 이런 믿음의 눈이 있는지 확인하여야 한다.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도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예수님이 “걸으라”고 하셨을 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에 관해 눈을 뜨게 된다. 어떤 때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익숙해진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때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믿음을 좋아했다. 그래서 능력이 있는 교회로 성장했다.
사랑의 눈은 긍휼과 체휼의 눈이다. 긍휼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며, 체휼은 다른 사람의 마음과 내 마음을 같게 만드는 능력이다. 그래서 사랑의 눈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다른 사람 마음속으로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 아들들을 죽인 공산당을 양자로 삼은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목사님에게 사랑의 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들을 죽인 사람을 원수로 본 것이 아니라, 그를 긍휼과 체휼의 마음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눈으로 행하는 모습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이기에 사랑을 잘 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소망의 눈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현상 속에 담겨져 있는 실체를 볼 수 있는 눈이다. 21세기가 되면서 소망의 눈은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21세기는 ‘위축감’이 그 어느 세대보다 우리를 짓누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우리를 위축하게 만든다. 보이는 것은 대부분 그럴듯하게 포장된 것으로 사실그대로와는 거리가 멀 때가 많다. 실제가 아닌 것을 실제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홈페이지를 통해 그리고 다양한 네트워킹을 통해 다른 사람의 세계 속으로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그들의 참모습일까? 대단해 보이는 그 사람에게도 숨겨진 고통과 엉망투성이인 삶의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진솔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멋들어지게 잘 포장된 겉모습만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위축감을 면하기 힘들다. 우리는 현상 속에서 실체를 보지 못하는 세대에 살고 있다.
한편, 소망은 현상 속에 있는 실체를 보게 한다. 이 실체는 하나님의 세계다. 하나님의 세계는 대단한데, 소망은 현상이라는 허상 너머에 있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소망을 붙들고 있으면 위축감을 극복할 수 있다. 골로새서 기자는 1장 4-5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해서 여러분이 품고 있는 사랑을 전해 들었습니다.이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두신 소망에 근거 합니다. 이 소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이미 들은 것입니다”(새번역)라고 말한다. 소망으로 하나님의 세계의 풍성함과 놀라움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