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성도들과 심지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도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매우 유행했고, 지금도 유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 나의 생각에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기 보다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 논문 때문에 자료를 검색하다 보니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글이 있어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성경적인 답을 해 주는 분이 있으면 진심으로 감사!!
------------그리스도인인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사랑받기' 를 넘어서 '사랑하는' 한 해가 됩시다
속된 사랑타령에 불과한 내용일수도 있지만, 제가 집사람과 연애할 때 즐겨 인용하던 청마 유치환이 통영중학교 교사 시절에 만난, 금지된 사랑의 여인이었던 시조 시인인 정향 이영도 여사에게 쓴 편지글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우리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민가요가 되다시피 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듣기에 아주 좋은 노래입니다. 가끔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다보면 전화 건 사람이 듣기 좋으라고 이 노래를 핸드폰 벨소리로 해놓은 분들이 있습니다. 따스한 마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마 지금 우리 사는 이 세상이 사랑이 넘치는 세상 같지만, 진실한 사랑이 없는 경쟁 위주의 사회 풍토와 ‘10 minutes’와 같은 찰나적 사랑만이 넘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을 치유해주는 내용이라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왠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마음 한 구석에서 무언가 부족한 듯한 안타까움과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딴지걸기를 좋아하는 삐뚤어진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교회에서 가장 유행하는 이 노래가 복음성가라기보다는 세상적 가치관에 입각한 유행가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주일학교도 없는 조그만 시골 교회에서 몇 분의 노인 분들과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음계가 있는 찬송가가 아니라 가사만 있는 찬송가를 부르는 형편에 요즘 유행하는 복음성가를 부를 일도 없고, 그러다보니 복음성가를 잘 모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최소한 복음성가의 내용은 복음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유로 듣게 되는 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못내 마음에 걸립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복음의 내용과 너무나도 다른 세상적인 사랑타령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으려고만 하는 그리스도인(?)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부르셨고 따라서 당신의 ‘서로 사랑하라’라는 지상 명령에 따라 원수마저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고 저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부모님들의 사랑으로 이 땅에 태어난 것이고 이 땅에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총과 사랑 속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랑을 자각하여 이제 거듭난 사람으로서 사랑을 하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리스도인들마저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지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의 절정이 다름 아닌 내 교회 중심적 신앙과 기복적 신앙입니다.
물론 죄 많고 이기적인 것이 우리들 사람들인지라 처음에는 나와 내 가족의 복을 받기 위해 교회에 첫발을 들여 놓게 되지만, 기복 신앙을 넘어서야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듯이,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더 잘 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네 기독교계 형편을 보면, 구원과 십자가의 복음이 기복에 머무르고, 사랑을 하기보다는 사랑을 받는 것에 머무르는 유아적 신앙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형편인 것 같습니다. 남을 이해하고 사랑을 할 줄 모르고, 자기중심적인 기복과 사랑을 받는 것에만 익숙하다보니 서로 형제애로 사랑을 해야 할 그리스도인들끼리도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저주와 독설을 퍼붓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뉴스앤조이> 기사에서도 한국교회나 대형\교회를 저주에 가까운 비난 혹은 비판을 하거나 혹은 일방적으로 그러한 교회를 옹호하면서 비판하는 자들을 사탄의 세력이라는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혹은 이웃이나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나 하나만 혹은 우리들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세상과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 너무나 일반화되어 버린 것이 우리네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일부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로 칭하고, 교회가 마을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것의 이유 중의 하나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닮지 않고, 그분의 복음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기복적인 신앙과 사랑을 받는 것에만 익숙해지면서 복음을 원수마저도 사랑함에서 오는 구원의 기쁨이 아니라, 배타적 편 가르기로 협애화시키면서 생긴 병리적 현상이 아닌가? 하고 우리는 반성적 성찰을 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모든 병리적인 현상이 ‘사랑을 할 줄은 모르고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고, 자기가 중심이 되어야만 하는 세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의 반영의 다름이 아닙니다.
건강과 치유에 있어서 사랑과 선행의 위대한 능력에 대한 의사들의 권고는 우리들 개인과 교회가 건강하기 위해서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버드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의대 교수를 역임한 내과의사 출신의 심신의학 개척자인 디팩 초프라 박사가 지은 <molecules of emotion>에서 질병 치유에 가장 중요한 기저는 화학적 약물이나 수술이 아니라, 병을 낳을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의사와 환자 상호간의 신뢰와 연대감,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엔터니 스턴이라는 의사가 테레사 수녀의 글들을 묶어 엮은 <모든 것은 기도로 시작합니다> 책의 서문을 쓴 래리 도시라는 의사에 의하면, 병의 치유에 있어서 종교의 종류를 떠나서 간절한 기도와 중보 기도는 분명한 의학적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실험적 연구 조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종교와 기도의 효과 사이에 상관관계가 별로 없음에 비해 커다란 차이를 나타내는 한 가지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빼버린다면 기도에 관한 실험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고, 기도와 치유 사이에 아무 연관 관계도 없다고 합니다. 사랑과 연민에 기초한 기도만이 위대한 치유의 효과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는 인류 역사를 통해 모든 치유자들은 환자에 대한 연민, 배려,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치유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였다고 합니다.
또한 얼마 전에 본 <생노병사의 비밀>이라는 한 TV프로그램에서도 사랑함의 위대한 치유력에 대한 내용이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소개에 따르면, 사랑과 보호를 받기만 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의 평균 수명보다도 오히려 수명이 짧고 건강하지 못한 것에 비하여, 사랑을 하고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은 평균 수명보다도 5년 정도 더 길고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선행의 치유학>라는 책을 펴낸 분에 따르면, 선행을 정기적으로 베푸는 사람들이 건강할 뿐만 아니라 치유에 있어서도 훨씬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저희 조합원 중에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암을 이기시고 암퇴치운동을 하고 계시는 조무성 교수님이라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지은 <암을 이기는 10가지 방법>이라는 책을 보면 암 치유법의 하나로 ‘봉사’를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축복을 과잉 섭취하려는 한국 기독교인들이여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역사는 복음의 선포와 아울러 질병 치유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치유의 기제는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민망히 여기시면서 거저 치유해주시는 사랑과 병자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믿기만 하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지금 현대인들의 몸과 마음은 그리고 우리들의 교회들은 외형적인 부유함과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병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그 원인이 의학이 발달하지 못해서나, 병원이 없어서나, 교회가 없어서가 아니고, 또한 영양이 부족해서나 전도가 안 되어서나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고, 축복을 독점하려고만 하는 사랑과 축복의 독점적 과잉 섭취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암과 당뇨와 심혈관계 질환 등 현대의 성인병들이 주로 영양은 과잉 섭취하는 것에 비하여 노동과 운동의 부족으로 인하여 에너지 대사를 제대로 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과 같이 현대 사회와 교회 그리고 우리들 가정의 병리적 현상은 사랑을 받는 것에만 익숙하고 사랑을 하는 것에는 소홀한 우리들의 삶과 생활 방식에 그 원인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회를 개혁하고 치유하는 방법도 사랑의 마음이 그 기저에 있어야만 진정으로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지적하고 비판하면 상대는 귀를 막아 버리고, 우리들의 비판은 비난이 되고 싸움이 됩니다. 물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며, 환자에 대한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은혜로 덥고 가자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절대 아닙니다. 병을 드러내고 알아야 그리고 자각해야 병을 치료할 수 있듯이 우리들 교회와 우리들 신앙과 삶의 문제를 드러내고 알고 자각해야 우리들 교회가 건강해집니다. 그러나 치유를 위해서는 윽박지르고 비난함에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기초한 충고와 치유를 향한 자기 관리를 통해서만 치유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올해에는 우리 모두가 사랑 받기를 갈구하고 노래하는 그리스도인을 넘어서 사랑을 하고, 사랑을 베푸는 그리하여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과 그리고 우리들의 어머니인 한국교회가 건강한 새해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그리고 <뉴스앤조이>의 글들에서도 아름다운 사연과 글들이 더 많이 소개되고, 우리들 병든 교회들과 우리들의 신앙을 비판은 하되 사랑에 기초한 충고와 기도가 바탕이 된 비판의 글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김재일의 연평도 편지
출처: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491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11-03 11:28)
지금까지 사랑 받는 것만 익숙한 제게 따끔한 성령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고 자라가도록 기도 하며 사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