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2009.03.04 13:07

이정민 조회 수:953 추천:53

할아버지

얼마나 정겨운 이름인가!!

내 나이 육십이 넘고 손자가 있으니 할아버지다.
그러나 내가 어린 시절의 할아버지는 무서운 분으로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어린이들이 어느 기간 동안 할아버지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고 생각된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나 자랐기에 할아버지 사랑을 못 느끼고 이십 세 이후 청년이 되고 나서야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에 대하여 다소나마 알게 되었고, 돌아가신 후 애달픈 정을 느껴 아버님께 할아버지에 대한 여러 가지를 여쭙고  아버님의 말씀에 나의 할아버지가 너무나 자랑스러워 여기에 쓴다.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는 방학이면 꼭 할아버지가 계신 김해 큰집에 가서 보내야 했다.  고향 김해군 이북면은 낙후된 시골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빼놓을 수  없는 수많은 추억이 깃던 고장이고 할아버지와도 얽혀있다. 내 위로 세 살 많은 종형 두 분이 계셨고 나는 형들의 어설픈 심부름꾼이자 따라다니는 졸병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도 할아버지 댁은 오칸 본체에 사랑체가 둘이나 있었고 디딜방아 옆에 비스듬히 누운 큰 감나무가 한 그루 있고,  담 밖에는 인조 섬이 있는 작은 연못도 있었다. 집 뒤는 대나무 밭이었고 밭 가운데 아름드리 밤나무 한 그루가 대나무 키보다 높게 자라 있었다. 가을이면 열 가마니의 알밤을 떨어 터뜨린다고 했고 디딜방아 옆 감나무는 백 접의 곶감을 낸다고 했다.

여름방학 때면 풋감과 풋밤을 따서 풋감은 소금물에 담가 양지 바른 장독대 위에 두었다 삭혀 먹고, 풋밤은 그냥 먹어도 고소하고, 달달 하였다.
물론 감도, 밤도, 할아버지가 들에 나가신 후 몰래 땄다.

내가 중 일학년 여름방학에 큰 집에 가니 감나무가 밑동부터 잘려나가고 없었다.  
큰 형님께 어찌 된 거냐니까 심통 영감이 베어버렸단다.
나도 정말 심통 영감인가 보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자수성가하신 농사꾼으로 별명이 호랑이영감, 심통영감이었다.

이듬해 여름방학에 큰집에 갔더니 대나무 숲에 있는 밤나무도 베었다고 큰형이 내게 말했을 때는 눈물이 나려고 했고, 곧바로 대나무 울타리 사이 개구멍으로 대숲에 가보았다.

서 있을 때도 크게 느꼈지만 잘려 누워 있는 밤나무는 너무 컸고, 원통하고 아까워 땅이라도 치며 울고 싶었다. 정말 못된 심통 영감쟁이라고 욕 했다.

할아버지는 정말 무서운 분이라 면장이신 큰아버지도 절절 매시는 것 같았다.
100호가 체 안 되는 시골 마을이라도 사람 삶에는 항상 크고 작은 시비가 있게 마련이고, 당사자 간 해결이 안 되면, 호랑이 할아버지에게 문제를 가져왔고, 할아버지의 판정에 아무도 이의 없이 물러갔단다.

내가 대학 2학년 때부터 가을 추수 때가 되면 꼭 할아버지를 도우러 큰집엘 갔다.
공직에서 떠난 백부님은 부산으로 이사하셨고, 할아버지께서 농사를 도맡다시피 하고 계셨으니, 내가 서툰 낫질이며, 지게질에 실수는 연발이게 마련이었지만, 나의 실수에 좀처럼 웃음이 없으신 할아버지께서, 허허치고 웃으시며 흐뭇해하시던 주름 짙은 표정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있을까?

지금도 생각한다.

청년 된 그때야 할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되었고, 백 숙부님들도 어려워 가까이 못하시는 할아버지가 너무도 정겹고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다.
김해와 진영사이에 삽다리라는 다리 밑으로 제법 넓은 낙동강 지류가 있다.
어느 여름 형들 따라 강변으로 소 먹이를 갔고, 형들은 팬티까지 벗고 강물로 뛰어 들어 물장구와 개헤엄을 즐기고 나는 바다수영에 익은지라 강물과 펄이 싫어 갈대 그늘에 있었다.

조용한 발소리가 난 것 같아 돌아보았더니 할아버지께서 형들의 옷을 몽땅 들고 가시는 중이었다. 한여름 긴 해가 지고 어두워질 때까지 집에 갈 수가 없었고 한밤중에 가면서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정작 집에 가니 할아버지는 물론 집안 어른 아무도, 아무 꾸중이나 말씀도 없었고, 큰 어머님만 곁눈으로 보시고 웃으셨다.

동네 잔치가 있으면 들일을 좀 일찍 끝내시고, 옷을 갈아입고 축하하고, 막걸리 한 사발과 밥 한 그릇을 드시고 오셨다는 할아버지!
먼 동네의 상문은 밤길을 걸어 다녀오신다는 할아버지가 결코 호랑이 영감일리 없고, 영감은 더 더욱 아니다.
이제는 할아버지께서 그 아까운 감나무와 밤나무를 베신 심정을 만분의 일이나마 느끼게 됐다.

사랑하는 손자들의 위험을 없앤 것을 .........


1999.  7. 24.  허 윤 욱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60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정민 2009.03.31 859
359 나도 활짝 꽃 피우겠습니다. 이정민 2009.03.29 917
358 잠꼬대 [1] 윤봉원 2009.03.28 804
357 중앙상가아파트정기총회 이정민 2009.03.25 857
356 부추와 파 이정민 2009.03.25 1059
355 인사 이정민 2009.03.25 1026
354 군항제 이정민 2009.03.24 893
353 알로에 꽃대 이정민 2009.03.24 1105
352 친구 이정민 2009.03.22 886
351 에덴동산 [2] 이정민 2009.03.15 851
350 봄이 왔어요. 이정민 2009.03.13 841
349 2008.5.29 [1] 이정민 2009.03.06 917
» 할아버지 [3] 이정민 2009.03.04 953
347 석류나무 [1] 이정민 2009.03.03 977
346 허황된 꿈 [3] 이정민 2009.03.02 1018
345 아내 [3] 이정민 2009.03.02 791
344 묵상 [1] 이정민 2009.03.01 893
343 내 주여 뜻대로 행 하시옵소서 [1] 이정민 2009.02.28 1295
342 믿음 [1] 이정민 2009.02.28 824
341 상종할 수 없는 사람 이정민 2009.01.10 85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