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5:14-172012011501날자: 2012년 1월 16일 주일오전
제목: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본문: 고린도후서 5장 14절∼17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 우상과 하나님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과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시편 135편 시인은 다음과 같이 우상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 입에는 아무 기식도 없나니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시 135:15-18)
인간이 만든 우상이 그렇다면 창조주이신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말씀하시며,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고 우리의 기도와 모든 말들을 다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내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창조와 섭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오늘날 우리와 함께 하시면 성령을 통하여 양심에게도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에게 가장 명확히 말씀하신 것이 성경 말씀이다. 아멘!! 그래서 우리의 가장 일차적이고 유일하고 확실한 기준은 성경이다.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하시고픈 그의 뜻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 뜻을 알려 달라고 간구하면서, 헐떡임으로 말씀을 받도록 하라.
2. 예수님은?
2.1. 강권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고린도후서 5.12-15)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못하면 우리가 거기에 따라서 속화되는 사람 되기 쉽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목표도 따로 있고 또 계획이나 방편도 따로 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고 늘 힘써 나오는 이것을 한 번 더 새롭게 다져서 그 헛점이 없고 셀 틈이 없도록 그렇게 해서 살기를 하나님은 기대하셔서 오늘도 이 말씀으로 찾아오셨다. 아멘!!
바울은 자신과 동료들을 자천하는 것 같은 점에 대하여 사과한다(13절). 그리고 그들에게 말한다. 앞의 절에서 그들의 충성과 근면을 언급한 것은 그들을 추천하거나 그들을 위함이 아니고 그들의 호의를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외모로 영광을 구하며 비난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주기 위함이다.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주어서” 원수들의 비난에 대처하기 위함이다. 만약 말씀이 그들의 양심에 나타나고 그들의 행위와 교회에 효과가 있었다면 이것이 말씀의 사역에 대한 가장 좋은 방어가 된다.
바울은 그들의 열심과 근면에 대한 이유를 말한다. 바울의 원수들은 마치 바울이 미친 사람 같다고 비난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한다면 광적인 광신자(狂信者)라고 말했다. 로마의 관원이 바울에게 말한 것과 같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도다”(행 26:24).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말한다.
바울이 이와 같이 열중하며 열심인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다.” 너희가 이렇게 생각하든지 저렇게 생각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그리고 너희 유익을 위함이다(13절). 그들이 어떤 때에는 정열과 열중을 나타내고 어떤 때에는 이성으로 크게 침착하게 나타내어도 이것은 그 두 목적을 위함이다. 그 이유를 밝힌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14절).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하도록 강권을 받고 있다. 사랑은 목사와 교인들이 의무를 수행하도록 격려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덕을 가지고 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나타난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르게 생각되고 옳게 판단되면 우리에게 이런 효과를 가져온다. 사랑의 강권에 대한 바울의 말을 들어 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며 영원히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었도다”(14절). 율법 안에서 죽었고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죄 가운데서 죽었으며 허물로써 죽고 영적으로 죽었다. 다음을 주목하자.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였다. 그들은 잃어졌고 망하였다. 죽고 파멸되었으며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시지 않았다면 영원히 이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아니고 이미 죽었던 우리임을 기억하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 즉 그들은 그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 “산 자들은” 다시 말하면 그의 죽으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산 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살으신 그를 위하여 살아야 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계획이다.” 즉 그들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15절).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들 자신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과 행동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 자기애를 치유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한 목적이다. 즉 그의 사랑의 명령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에게 바쳐야 하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를 위하여 사는 것이 바른 삶이다.
2.2. 다시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도록 하셨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 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 다른 사람을 위한 것보다는 더욱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대세(大勢)이다. 요즘 계속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젊은 아이들 특히 일진(깡패 조직)들은 다른 사람을 해치고 이용해서라도 자기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들이다. 꼭 일진이 아니더라도 그가 행동하는 것이 덕이 안 될 때 노인이나 주변 사람이 말하면 반망하고 욕하고 왜 간섭하느냐고 따지는 악한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최소한의 도덕, 법의 기준을 잘지키는 사람인가요?
이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큰 경종을 울려 준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기를 기대하시고 말씀하십니까?
‘다시는’ 이제는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왜? 그리스도께서 최종적 제사, 즉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위해 이기적인 옛 방식들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6-14)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 2:20-23)
바울과 같이 우리도 더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헌신의 대상뿐만 아니라 그 근거도 나타내 주고 있다. 그는 자기를 대신하여 죽으신 자를 위하여 산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을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기적이 아닌 사람, 즉 자기를 제외한 어떤 대상을 위해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만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정의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보다 더 쉬운 조건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지 않더라도 그를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한 자라들이라면, 또한 그의 생명에도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음으로 우리는 그의 죽음의 공로를 확신하게 된다. 만일 이러한 깨달음에 이른다면, 우리는 그를 섬기는 일에 우리의 삶을 바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사신’ 우리는 죽은 구세주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죽음 못지 않게 구속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로, 진동될 그 일 차 창조를 받은 우리들이 범죄하므로 영원한 멸망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을 하나님이 새로운 이차 창조로 영원히 변동되지 않는, 다 영원의 것으로 완전의 것으로 불변의 것으로 영생의 것으로 새로 지으시는 그 역사를 십자가 상에서 대신 이루셨다. 하나님의 지공법과 지성법에도 완성을 이루셨고 이제는 우리 각자들에게 실상을 이루시기 위해서 성령님과 진리와 주의 피의 대속의 공로가 보증이 되어가지고 역사하신다. 이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신 그 예정대로 한 순서 한 순서가 전개 되는 것이 역사이다. 또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존재는 지음 받을 때부터 이를 위해서 지음을 받은 것들이다.
그는 죽으셨다가 우리의 의를 위하여 다시 사셨다. 그리고 다시 사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이 구세주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위임되었다. 그는 영원히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고 계신다. 그 구세주는 믿는 자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실 대상이다. 아울러 그에게 영광 돌리고 그를 섬기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위하거나 땅에 어떤 것을 위해서 살지 못하도록 돼 가지고 있다. 살면 그것은 영원한 멸망이다. 대속하신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주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주님의 사활로 우리의 영원 멸망을 해결짓고 영원한 산 소망을 주신 이 일을 이루어가는 것이 주를 위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쇠하지 안하고 죽지 안하고 병들고 낡아 지지 안하고 하는 완전의 이 성화를 위해서. 완전의 성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도 만물도 해할 수 없는 온전한 의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사는 것이다. 주를 위해서 살아야 된다 말은 주님의 구속을 입는 자로 살아야 된다는 말씀이다.
'너희들이 이제부터는 주의 일을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아니하느니라' 주를 위해 힘쓴다 말은 주님이 우리에게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대속의 구속을 주셨으니 이 구속을 위해서 힘쓰는 자 되는 이것이 주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땅의 것을 위해서 살 자가 아니다. 땅의 것을 위해서 사는 것은 지난 주일에도 말한 것같이 하루 살았으면 하루 산 그것은 저는 산 줄로 알지만 하루 그만큼 더 심히 죽어졌다. 이래서 어떤 사람은 70년 어떤 사람은 50년 40년 l0년 이렇게 산다는 것이 그 산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죽음을 완성하면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죽음을 완성하면 떠나고 영원 멸망을 완성하면 이제 살아남아 있는 것이 완전히 죽을 때가 그때가 죽음이 완성될 때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연의 법칙으로 죽음이 오는 그 속에서 죽음으로 죽지 아니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로서 변화된다. 죽을 것이 변화된다. 그것을 가리켜서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 된다.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변화 된다.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된다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이 변화되기 위해서 우리는 사는 우리들이라 하는 것을 첫째 기억해야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옛날 우리가 주님의 구속을 입기 전과같이 이 죽어가는 생활에서 날마다 죽어가고 날마다 뺏겨가는 그런 사망에 속해서 살 우리들이 아니다.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 자격이 없는 우리들이다.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우리 대신 죽으시고 살아나신 주님을 위해 살므로 생명에 속해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영원한 것으로 자라가고 영원한 것으로 또 부강해가는 것이 우리들이다.
2.3. (이유) 새로운 피조물 된 우리임을 알아라(16-17)
2.3.1. 세상에서 젖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
이 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한 삶에 필요한 두 가지를 언급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결과이다. 즉 중생과 화해이다.
중생은 두 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16절). 우리는 육체의 목적과 유익을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나 물건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하며, 세상이나 세상의 일들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초월하여 산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있고 세상은 우리의 발아래에 있다.”
다음을 주목하자.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위로와 관계를 거룩한 냉담으로 즐겨야 한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바울이 육안으로 그리스도를 보았는지 논의된다. 아마도 이 편지를 받는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육체의 임재를 제자들은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성령의 임재와 성령이 주는 위로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초상(성화 그것 다 버리는 것이 좋다.)을 만들어서 예배 때에 사용함은 하나님의 신앙을 위하셔 정하신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2.3.2. 마음의 철저한 변화이다.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만일 어떤 사람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자신이 새로운 사람이며 사람이어야 함을 증명해야 한다(17절). “그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하여라”로 읽을 사람도 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이름을 가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마음과 성질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룩하는 역사가 그렇게나 크기 때문에 다음 말이 나온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즉 옛 사상과 옛 원리와 옛 행위가 지나갔다. “이 모든 일들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모든 피조물은 피조될 때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이 구속을 위해서 쓰이려고 대기해 있고 또 예정하신 순서는 하나씩 둘씩 이렇게 전개되고 다가온다. 우리는 이 가운데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우리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被造物)이라, 새로운 피조는 일차(一次) 창조와 같이 그렇게 변동되고 타락하고 부패 하고 사망하는 것들이 아니고 다시는 죽지 안하고 썩지 안하고 쇠해지지 안하고 낡아지지 아니하는 진동되지 아니할 그 이차 창조를 예수님의 대속으로 지성 지공 법적으로는 다 입어서 완성을 했다.
이제는 다만 피조물된 우리가 피조물적으로 영원하고 완전하고 불변하고 쇠하지 않고 죽지 않는 이것으로서 실상을 이루어가도록. 이차(二次) 창조의 이 모든 창조 역사가 우리 개별 개별의 그 심신과 영에게 이루어져 가도록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것이 지금 하시는 일이다. 영의 일은 순전히 객관 역사로 이루어서 온전함을 이루어 있다. 중생된 우리들은 이제는 영에 대해서는 다 온전함을 이루었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우리 이 심신으로 된 육, 마음도 육이요 몸도 육이다. 심신으로 된 육이다. 이 심신으로 된 육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이 지금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말은 법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요, 예수님의 대속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요, 또 영은 중생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됐고, 우리의 심신은 다시 구속함을 입어서 죽지 아니할 몸으로, 늙고 쇠하지 않는 기능으로, 병들지 않는 그 심신과 기능으로 이렇게 새로 지음을 입으려고 하는 것이 지금 기간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 형체는 예수님이 구름타고 재림 하시면 다 심신이 늙고 쇠하지 아니하는 몸으로 변화를 받아 가지고 부활을 한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l5장 50절 이하에 보면 우리의 혈육으로 되어 있는 이 심신은 영생을 하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다 썩은 것들이요 썩을 것들이기 때문에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함을 입을 수 없고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할 세계에서 살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부득이 썩지 안하고 쇠하지 아니할 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함을 입는 것이다. 육체의 형체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예수님의 공로로 다 부활함을 입지만 그때까지의 우리의 마음의 온갖 기능이나 몸의 온갖 기능이나 이 기능은 지금 성령과 중생된 영의 도움을 입어 가지고 자기가 이 기능이 살아나는 방편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이 방편 대로 현실이라는 그 현실에서 거기에 해당된 심신의 기능을 하나씩 둘씩 영원히 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할 산 것으로서, 새것으로 이렇게 변화함을 입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법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됐고 영이 새로운 피조물이 됐고, 또 소망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됐고, 이제 실상만 이것이 이루어지면 되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새것 되었다는 이것을 언제든지 기억해야 되겠다. 이전의 의견들, 견해들, 계획들, 욕망들, 원리들, 그리고 애정이 지나가고, 진리에 대한 새로운 견해, 새로운 원리, 인간의 운명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그리고 새로운 목표와 느낌이 우리 영혼을 지배하고 가득 채운다. 할렐루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사활대속의 공로로 새것이 되었고 또 아직도 온전한 새것이 되지 못한 심신의 성화 구원, 새것이 되기 위해서 마음, 힘, 뜻, 생명 다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위해 살아감으로 힘써야 한다. 충성해야 한다. 아멘!!
3.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언행(言行)심사(心事) 말고 오직 주님만 위해 살아가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믿지 아니할 때의 그 사람이 아닌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내나 그 집에서 살고 그 직장 그 사회 그 껍데기 사람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 실은 우리는 예수님의 사활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제 이차 창조의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 만들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주님 불러 가시는 그날까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주님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분을 온전히 다하는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