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의 신앙과 장성한 신앙

2014.08.29 23:00

윤봉원 조회 수:836 추천:17



히 5:13-1414-08-29 금밤날자: 2014년 8월 29일 금밤
제목: 어린아이의 신앙과 장성한 신앙
본문: 히브리서 5장 13절∼ 14절
1.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인격이 완전한 자가 되기까지 자라기를 기대하신다.
부부가 결혼을 하여 한 가정을 이루었다면 자녀를 낳게 된다. 그런데 그 자녀가 육신적으로 시간이 흘러도 자라지 않는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신체적인 성장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자라지 않는 것도 보통 걱정거리가 아니다. 주변에 특수학교를 다니는 아이를 둔 부모를 생각해 보라. 평생 결혼은 꿈도 못 꾸고 자신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나플까?
하물며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고 성경을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하나님 같이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기대하신다(마 5:48).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한 사람, 구비한 사람, 즉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기를 기대하신다(엡 4:13).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히 6:1-2)의 말씀처럼 완전한데까지 자라기를 기대하신다.
그럼에도 예수를 믿은 지 세월만 흘러가고 항상 약간의 어려움만 만나면 넘어지고, 엎어지는 신앙의 초보에 머물러 있다면 얼마나 하나님은 기가 차겠는가?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을 중심으로 두 종류의 신앙을 알아보고 왜 자라지 못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자랄 수 있는지를 찾아서 하나님 아버지의 목적과 뜻대로 온전한 데까지 자라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어린 아이의 신앙
2.1. 예수님의 대속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13절)은 비유이다. 젖을 먹는 자라 말은 그 전에 보면 말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단단한 식물이라 말은 예수님 믿기에, 지키기에 힘드는 교훈, 소화하기에 힘드는 교훈,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견디기 어려운 문제라도 싹싹 소화해서 내고, 또 이기지 못할 어떤 세상이 다 지는 문제라도 닥치는 대로 싹싹 이겨 내고 하는 이런 장성한 신앙이 돼야 될 터인데 항상 어린 아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 말이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은 못 먹을 자들이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신앙 말이다. 어린 신앙마다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왜 어린 아이가 되느냐? 그다음에 말해 놨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말이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 의의 말씀이 무엇이 의의 말씀인가? 의의 말씀은 예수님이 대속해 놓으신 하나님의 의의 말씀인데 신인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속으로 대형으로 사죄, 대행으로 칭의, 대화친으로 생명 이 세 가지 큰 대속을 주셨는데, 이 사죄, 칭의, 화친의 이 대속이 어디에 있는가?
예, 성령님에게 담겨 있다. 영감에 담겨 있다. 영감에는 우리 대속의 그 실상, 대속의 그 실상이 영감에 담겨 가지고 우리에게 왔다. 우리에게 온 영감은 전부 이 대속의 실상이다. 그 대속의 실상인데 그 실상이 또 우리에게 어떻게 와서 있는가? 신구약 성경 말씀이 바로 이 대속 자체요 본체이다. 실상이다. 의의 말씀이라 그말은 예수님의 대속하신 의를 담아 가져 온 말씀이니까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의 대속하신 의이다. 예수님의 대속하신 의다.
2.2. 하나님의 말씀 순종을 통한 경험이 없는 자
의인데, ‘경험하지 못한 자요’ 경험하지 못했다 말은 예수님의 대속을 경험하지 못했다 말이다. 이 대속하신 말씀이 우리 현실 현실에 성신의 감화를 네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대로 해 보니까 과연 신인 양성 일위이신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 내 죄의 형을 대신해서 주님이 형을 받으셨다 하는 것을 자기가 실제로 경험하게 된다.
예수님이 내 대신 행한 이 대행하신 이 칭의가 내가 말씀을 요대로 행해 볼 때에 직접 칭의를 내가 만나게 된다. 칭의를 만나게 되고, 칭의를 붙잡게 되고, 그 칭의를 내가 가지고 있고, 내 속에 그 칭의가 내 속에 있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제가 그대로 행해야 경험이 되지 안 하고 경험이 됩니까? 그 말씀대로 행하고 보니까 경험이 되는데 경험해 보니까 바로 이 말씀이 하나님의 대속의 의요, 바로 영감이 하나님의 대속의 의라.
영감과 하나님 말씀이 예수님의 대속하신 그 대속의 그 실상이라 하는 그것은 자기가 들어서 이해가 잘 안 될 것이고, 행해 본 사람은 들으면 이해될 것이고, 행해 보지 안한 사람은 들어도 이해가 안 되고, 이해가 안 된다. 자신이 아무리 박사라도 절대 이해 못한다. 행해야 알지. 이러기 때문에 경험을 말했다.
‘경험하지 못한 자요’ 어떤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자입니까? 어린 아이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아무리 목사 장로가 되고 유명한 부흥사가 됐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의의 이 말씀을 경험해서 ‘이게 의의 실상이로구나, 주님이 과연 우리를 이렇게 대형하셨고 대행하셨고 대화친하셨구나.’ 하는 것을 자기가 실제로 맛을 보고 실제로 접선하고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하고 요렇게 실험하는 일이 되는 것인데 이 실행하지 않는 자는 요런 실험이 안 된다. 그러니까 항상 그는 어린 아이를 면치 못한다.
예수 믿는 도는 실행에서 알아지지 실행이 아니면 알아지지 않는다. 실행은 무엇이 실행인가? 실행은 실상 믿는 것과 믿으니까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 믿음과 행함은 두 가지입니까? 아니오. 행할 수 없는 믿음은 거짓부리 믿음이오. 참 믿음은 안행하고는 못 견뎌. 참 믿음은 필연적으로 행하게 된다. 믿음과 행함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이렇게 행한 이 사람은 그 경험이 있게 된다. 이런 경험, 행함으로 경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항상 예수 믿어도 항상 어린 아이라. 장로라도 어린 아이고, 목사라도 어린 아이다.
그러나 이제 도를 행해 본 사람은 알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이 나 위해서 대형으로, 사죄의 대형을 하셨는지, 대행을 하셨는지, 대화친을 하셨는지, 하나님이 이 세 가지 때문에 죽으셨는지 안 죽으셨는지, 이 죽음으로써 사죄, 칭의, 화친을 나에게 주셨는지 안 주셨는지, 말로 가지고는 주셨다 하지만 그 실상으로 자기가 인정이 안 된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죽었다는 것이 인정이 안 돼. 인정하기는 한다. 하지만 실상 따져 보면 마음에 자신을 대신 해 죽었으니까 감사함도 있을 것이고, 잘못한 미안함도 있을 건데 그런 것 하나도 없다.
예수 믿는 것은 경험으로 믿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해야 자라게 된다 말이다. ‘경험하지 못한 자는 어린 아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해야 자라게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자는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걸어감으로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조금 해(害)를 볼 때에, 대형의 해를 볼 때에, 대행의 수고를 할 때에, 대화친의 그 모든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때에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죽어 보지 못한 사람은 주님의 죽으심의 그 심정을 알지 못한다. 과연 그가 날 사랑하셨으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릴 수밖에 없겠다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현실 현실에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대로 그대로 현실에서 주의 말씀에게 순종을 해 보면 예수님의 대속이 과연 이거로구나 하는 것을 경험하고 체험하게 된다. 예수님의 대속을 실상으로 자기가 누리게 된다.
예수님의 대속을 실상으로 누리고 보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내가 독점하고 있는 자인데 땅 위에 뭐 욕심낼 게 뭐 있겠소, 있기를? 그분이 나 위해서 모든 것 다 주실 뿐 아니라 자신까지 주시고, 하늘에서 모든 것 다 가난해지고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시고 또 인간으로 부활한 것.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흘린 것이나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나 예수님의 고생의 공로와 감사의 그 가치가 같다. 두 가지 중량이 꼭 같다. 죽으심이나 부활하심이나 사랑의 중량도 같고 고통의 중량도 같고 희생의 중량도 같고 우리에게 효력의 중량도 같다.
2.3. 대속의 의는 성경과 영감에 담겨 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예수님을 믿되 이 세상적인 소망, 세상적인 기쁨, 세상적인 모든 행복 이것만 먹는 자들이 젖 먹는 자이다.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어린 아이라 말이다. ‘어린 아이니’ 왜 어린 아이가 됐느냐? 왜 어린 아이가 됐느냐?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 아이가 됐다 말이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 예수님의 대형 사죄, 대행 칭의, 대화친 생명 이게 예수님의 대속인데 이 대속을, 예수님을 뭐 수십 년 믿고 목사 장로가 돼도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대속이 무엇이 대속입니까 물으면 깜깜하게 모르는 사람들 많다.
또, 예수님의 대속이 어데 있는가?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가, 영은 하나님이 객관 역사로 입혀 주시니까 영은 입지마는 예수님의 대속의 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이 심신이 입어야 될 터인데, 심신이 입어야 될 터인데 이 의(義)가 어데 있는지를 알아야 입지요.
대속의 의가 어데 있는가? 신구약 성경 말씀에 있지.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 말인데 신구약 성경 말씀이 무슨 복음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들어 있기 때문에 복음이다. 하나님의 의는 어데 담겼습니까? 영감에 담겼다. 영감에 담긴 하나님의 의는 어데 담겼습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에 담겼다. 예수님의 대속을 입을라면 어째야 됩니까? 이 말씀대로 하면 대속이 입혀진다.
이래서 말씀대로 하니까 하나님의 의가 경험이 된다. 경험이 된다는 거는 자기가 해본 게 경험(經驗) 아닙니까? 지낼 경(經)자 경험할 험(驗)자, 그 말은, 경험이라면 자기가 실제로 한 번 해 보니까 과연 그렇고 하는 것을 그걸 가리켜서 경험이라 그렇게 한다 말이다. 의의 말씀에 경험을 하지 못한 자가 어린 아이라 그말이다. 어린 아이. 이거 못 하면 어린 아이 벗지 못한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의의 말씀을 경험해야 장성해진다. 의의 말씀을, 예수님의 대형을 경험해야 되고, 대행을 경험해야 되고, 대화친을 경험해야 되고, 이래서 신구약 성경은 이것을 경험하게 한 것이다. 경험하게 한 것이다. 그대로 하면 대형 경험될 때 있고, 대행 경험될 때 있고, 대화친 경험될 때도 있고, 사랑 경험할 때도 있고, 이렇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어린 아이다 그말이다. 어린 아이다. ‘못한 자요’
3. 장성한 신앙
3.1. 주님이 알려 주는 대로 깨닫고 실행하는 사람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14절) 이 단단한 식물은 소화하기 어렵다 말이다. 실행하기 어렵다 말이다. 실행하기 어려운 말씀은 단단한 식물이다. 이 실행하기 어려운 말씀은 단단한 식물인데 이거는 신앙 장성한 사람들이라야 이 도리를 자기가 소화할 수가 있고 새길 수가 있지 그리 안 하면 새기지 못한다.
‘장성한 자는 지각(知覺)을 사용하므로’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아는 것이 지(知)요, 알 지자, 각은 거기서 깨달은 것이 각(覺)이다. 지각이라. 지각이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에 아는 것 깨달은 것, 이 신구약 성경 말씀에 기록한 것을 알고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의를 알고 깨달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알고 깨닫다니?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도성 인신하신 것과, 신성과 인성이 둘이 한 격위를 이루신 것과, 신인 양성 일위가 세 가지로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서 세 가지 의를 건설한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의인데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알고 깨닫고,
‘지각을 사용하므로’ 알고 깨달은 것을 사용하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행했다는 말이다. 또 자기가 신구약 성경에서 깊이 영감 받아 깨달은 대로 했다는 말이다. ‘지각에’ 주님이 나에게 알려 주시고 나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그대로 복종을 한다 말이다.
그냥, 사용하라는 말은 어린 아이들에게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인데 거게 시종하라, 모시고 복종해라 하는 그것은 벌써 많이 깨달아 보고 경험해서 끝까지 그것을 다 계산해서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3.2. 자신은 점점 괴수 죄인으로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점점 의인화 되어 간다.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연단 받는 것은 어떤 것이 연단 받느냐? 연단이라 말은 이 쇠를 불에다가 달궈 가지고서 연단하는 것을 인용을 했다. 연단이라 말은 요 쇠를 풀무에다 갖다 넣으면 처음에는 주먹덩이만한 쇠를 넣었는데 껍데기 다 떨어져 버린다. 그거 쇠똥은 다 떨어져 나가고 나면 나중에 속에 깨끗한 쇠는 조그마하다. 이 쇠도 여러 번 구워서 쇠똥을 다 버리고 나서 칼을 치면 그 칼이 무슨 칼이냐? 비수 검이라 한다. 비수 검을 만들 때에는 그렇게 연단해서, 그라면 쇠의 나쁜 것을 다 타고 속에 진짜 진짜 좋은 것만 쏙 남아 있다.
이제 금을 연단하는 것은 주먹덩이만한 것을 청강수에 대 놓고 구우면 은도 타고, 납도 타고, 구리쇠도 타고, 주석도 타고 그런 것 다 타고 순전히 금만 남는다. 이것이 이십사금이라.
그 모양으로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신구약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알고 깨닫고, 알고 깨달은 그대로 순종해서 살아 보니까 자기가 알고 깨달은 것이 그 양이 그것이 좀 정확합니까? 그것이 좀 잘못된 게 더러 있는가, 어떻습니까? 알고 깨달은 대로 자꾸 자기가 실지로 실행을 해 보니까 알고 깨달은 것이 그게 자꾸 정확한 양이 많아집니까? 점점 줄어집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깨닫고 이라니까, 대속의 공로를 기록한 요 신구약 성경 말씀을 보고 깨닫고 자기가 실행해 보니까 또 잘못 깨닫고 또 잘못 깨달았고, 자꾸 잘못 깨달았고 점점 실행을 해 보면 점점 잘못 깨달아집니까? 점점 바로 깨달아집니까? 점점 바로 깨달아진다.
‘주님 날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겠다. 우리도 주를 위해서 죽겠다.’ 이랬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라. 주님 위해 죽을라 했는데 뭐 죽음의 십분지 일도 안 와도 도망을 쳐 버리고 야단을 지겨놨다 말이다. 이러니까, 아이고 이게 틀렸다. 또 그다음에는 십분지 이쯤은 사랑한다. 이랬는데 나중에 여러 번 그라고 나니까 이제 주님이 날 사랑하셔서 생명 바친 대로 우리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생명을 바칠 수 있다 말이다.
생명을 바쳤는데 생명을 바쳤으니까 주님이 나 사랑한 거와 내가 주님 사랑한 거와 같다 싶었는데 또 생명 바쳐서 사는 그런 일을, 바친다고 죽습니까, 어데? 바쳐서 살았는데 안 죽고 뒤에 살아나 보니까 ‘아이구, 내가 주님 사랑하는 거는 가짜다, 가짜다.’ 자꾸 가짜가 나오는 거라. 이렇게 해서서 우리 신앙이 장성한 신앙이 되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다는 믿음이 바로 되는 게 아니라 주님을 믿는다는 믿음이 또 실행해 보니까 ‘아이고, 이거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을 믿는 그 믿음을 자기가 현실을 여러 번 자꾸 많이 닥쳐 본 사람이라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그것이 점점 정확해지겠습니까? 경험을 한 번 하면 정확해지겠습니까? 몇 번 하면정확해지겠소? 여러 번 해야 정확해진다 말이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참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주님은 저 사람을 참 사랑하는 사람이라. 저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은 그리 쌓는데 그 본인은 그 말을 들을 때에 ‘그래, 내가 그렇지.’ 이렇게 긍정이 됩니까? 그럴수록 구석으로 파고 들어가야 됩니까? 구석으로 파고 들어가게 된다. 이 예수 믿는 사람은 점점 이제 바로 믿어 갈수록, 믿어갈수록 자기가 죄인됩니까 의인됩니까? 죄인이 되어간다. 죄인되는데 다른 사람은 보고 그 사람을 다른 사람 보기에는 의인됩니까 죄인됩니까? 의인 되어 간다.
이러기 때문에,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은 교만할 수가 없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공연히 겸손을 부릴라 하는 게 아니라 교만할 수가 없다. 이것이 있어야 장성해 간다 그말이다.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연단을 점점 받으니까 다른 사람 보기에는 크지만 자기 보기에는 점점 작은 자가 됨으로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이러니까 그 사람이 옳고 바른 것을 환하게 분변하게 된다 말이다.
4. 깨달은 대로 평생 실행해서 어린 아이의 신앙에서 장성한 신앙으로 자라가라.
우리는 조그마한 어려움만 와도 진리와 영감 순종을 중단하고 자기와 세상으로 돌아가는 어린아이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길밭, 돌밭, 가시덤불 밭처럼 결실이 없는 신앙, 말씀과 영감 순종하는 것을 포기하는 신앙, 원망, 불평, 좌절, 낙망하는 신앙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라. 우리는 이제는 여기서 더 이상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오늘을 계기로 진리와 영감을 통하여 깨닫게 해 주시는 의의 말씀을 따라서 즉시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자꾸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의 역사를 경험하여 믿음이 자라가가 된다. 옥토에 뿌려진 씨앗처럼 어떤 어려움과 역경이 온다 할지라도 진리와 영감에 순종하여 결실을 맺는 자가 된다.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기도도, 성경 보는 것도, 설교 듣는 것도, 목회하는 것도, 전도도, 심방도 전부 이것을 위해서 해야 한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 신앙이 자라는 벼릿줄이고 이 토대이다. 바로 듣고 깨닫고 꼭 실행해야 된다. 작정해야 한다. 경험하고 연단하고, 경험해야 어린아이 신앙을 버리고 장성해지고, 연단 받아야 장성해 진다. 경험과 연단이라야 장성해지지 경험과 연단 없이는 장성해지지를 못한다. 이런 장성한 신앙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참조. 860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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