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첫 단추는?

2014.05.04 23:12

윤봉원 조회 수:369 추천:34

롬 1:18-3214-05-04 주전날자: 2014년 5월 4일 주일오전

제목: 비극의 첫 단추는?

본문: 로마서 1장 18절 –32절

1.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왜 생사화복의 주권자요 만물의 지휘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부처에게 소원을 빌까요?

부산의 삼광사 절의 연등이 유명하다. 그곳에 연등은 약 6000개가 걸려 있다. 그 연등마다 그 연등을 위해 기증한 이들의 주소, 가족 사항, 그들의 소원이 빼곡치 여러 장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은 왜 듣지도, 보지도, 알지도, 알아주지도 않는 죽은 부처와 불상에게 소원을 빌까? 만약 빌어서 뭔가 이루어 졌다면 그것은 부처가 들어 준 것일까?

그러면 성도들은 어떤가? 하나님의 자녀로 창세전에 선택함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의 희생 공로를 값없이 받아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각자의 때가 되어 피와 성령과 진리로 거듭남의 중생 구원을 얻었다. 그리고 성령을 영원토록 모신 성전이 되었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할렐루야!! 영원토록 영생을 누리는 복 있는 자로 인생역전 되었다. 이렇게 복된 자가 되었으면 성경대로 살아서 복 있는 길을 잘 걸어가고 있나요?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아직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불러가지 않아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고, 건강을 유지하고 있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면서 받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만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이 본분을 망각하고 엉뚱한 짓을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심히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지는 않는지?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롬 2:9-10)

지금의 형편이 어떤가? 환난과 곤고 중에 있는지? 아니면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누리고 있는지? 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영광, 존귀,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이런 저런 징계와 어려움을 당하게 될까요? 한 마디로 불행을 겪고 있을까? 이 불행의 원인인 첫 단추가 무엇일까? 그것을 본문을 통해서 찾아보고  그 첫 단추를 이제는 하나님께 복 받을 수 있는 복의 첫 단추를 끼워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2. 인간의 불행은?

2.1.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살지 않고 지혜 없는 바보로 살아가는 것(18-23).

바울은‘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18)라고 한다. 바울은 자신의 논증을 구약에 근거하여 구성하고 있다. 바울이 제시하는 하나님이 진노하게 되는 두 가지 원인으로 지목한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는 구약의 십계명(十誡命)을 어기는 것을 요약한 말이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 저지른 일들이 바로 십계명을 어기고 사는 것이다. 이런 ‘경건하지 않음’은 솔로몬이 지적한 대로 인간의 본분인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전 12:13)이 올바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인데 이것을 어기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죄에 대해서 진노하신다.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을 주셨는데도 고의적으로 그 은혜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맹렬히 임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게서 하나님 닮은 성품이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온갖 불경건함과 불의가 나타날 때, 하나님의 사랑은 분노하심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나는 은혜의 복음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그리고 그들의 불의함은 하나님을 알기는 알지만 지으신 이의 목적대로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야 함에도 하지 않았다(21).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죄이며, 이것이 인간의 비극과 딜레마의 근원이다(15:6, 9; 고후 9:13).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또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고 누리는 전부가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에 대한 감사도 없었다. 그러고도 오히려 그들의 생각은 허망하고 우둔하게 되어 자신들이 지혜로운 줄로 착각하고 바보로 살아갔다.

그래서 그들은 생사화복의 주권자요 지휘자이신 하나님 대신 아무런 능력도 지혜도 없는 사람을 믿고 살아갔다. 그리고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각종 우상을 섬기며 살아갔다. 이런 비극과 어리석음, 불행을 바울은 꼬집어서 ‘바꾸었느니라’(23)고 말했다. 이 단어를 바울은 25절과 26절에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진정한 것을 가짜로 바꾸어버린 잘못을 지적했다. 그 결과는 도덕적인 혼란과 무질서다(25-31절의 사례).

그러면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 부처에게 절하는 사람을 보면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훨씬 더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들이 지혜롭다고 보여 지던가요? 불쌍하게 보여 지던가요? 이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으며, 후회막심하고, 비극적인 삶인가?

그러면 이와 같은 비극적이고 불행한 인생살이를 살아가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들이 이와같은 비극의 시작, 즉 첫 단추를 낀 이유를 바울은 분명히 설명한다. 그들의 불의와 불경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도부터 지닌 이성과 양심에 자신을 보여 주시고,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도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다고 바울은 강조한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하나님을 처음부터 알지 못했다고 자신의 불경건과 불신앙을 핑계치 못하도록 한 조치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알려 주셨다.

모든 창조 세계의 피조물들은 자신들 안에 계시된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 지식을 바삐 전하며 찬양한다(시 19편). 피조물 중에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은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 주신 능력과 신성을 얼마나 알고 찬송하는가? 그분이 알려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 대로 얼마나 순종함으로 비극의 첫 단추를 안 끼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2.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악을 행함으로 “정욕”과 “상실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다(26-27)

2.2.1. “정욕”대로 살아가는 것은 복이 아니고 비극 중에 비극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 대해 반드시 진노하신다. 그 진노는 사람들이 진정한 것을 가짜로 바꾸어버려 도덕적인 혼란과 무질서가 왔을 때, 자신의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을 내버려두신다(18,24,26,28).

‘내 버려두다’(24) 하나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 이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넘겨주다’이며, 같은 동사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적에게 “넘겨 주었”을 때 사용되었다(삿 2:14 등). 바울은 이 동사를 세 번 반복 사용(24, 26, 28)함으로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을 도덕적 혼란에 그냥 넘겨주어 더욱더 죄악이 깊어지게 했음을 분명히 했다.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두시는 것은 언뜻 보면 참 다행인 것 같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바울은 이런 비극에 처한 사례로 동성연애를 들었다. “순리...역리...순리”라는 단어와 논리 전개를 통하여 제시했다. 요즘 세상은 매우 어둡고 악하여 동성연애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세계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순리를 거슬러 역리하며 살아가는 악한 삶이다. 이런 삶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을 가짜로 바꾸어버려 더러운 욕심을 채우며 살아가는 악이요 그들의 결국 우상숭배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않고 살아갈 때 더러운 욕망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신다. 그러나 그들의 결국은 사람도, 세상도 형편없이 망가져 필연적으로 멸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정해 주신 순리를 거슬리고 역리로 살아서 패가망신한 유명한 목사, 정치인, 시인, 코치 감독의 사례들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이런 삶을  살아서도 안 되고 우리 이웃들이 이런 부끄러운 일을 행하지 못하게 막아주시고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게 꽉 붙잡아주시길 중보기도 해야 한다. 복음은 흔히 말하듯이 잘못된 것을 덮어 주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사랑이요 은혜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으나 이것은 아니다.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숭배하고, 진리 대신에 자기 욕성에 따라서 사는 자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진노하신다.

2.2.2. “상실한 마음”에 내 버려두심(28-32)

또 바울은 비극의 시작, 첫 단추를 28절 이하에서 제시한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다고 지적한다(28절).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는 심판의 경고를 알고도 그악을 자신도 행하고, 다른 사람이 그런 악을 행할 때 확신을 가지고 지지했다. 더 죄를 짓도록 조장하는 악한 삶을 살았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 버려두셨다.’(28). ‘상실한 마음’(28절)은 “시험에 합하지 못한, 가치 없는. 올바른 판단력을 잃고”의 의미이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는 죄악의 행위는 참으로 입에 올리기도 싫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9-31)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시면 이방인들만 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얼마든지 짓는 악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직분이나 신앙의 연조, 남녀노소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양심이 화인 맞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도 악한 길을 가는 것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와 논리를 내세워 죄짓는 것들을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정당화하며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말씀과 진리를 거스르는 것은 딱 구별하여 죄로 여기고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그래야 상실한 마음대로 살아가는 비극의 주인공을 면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열거된 이 죄들을 우리 이웃들이 짓지 않도록, 또 죄와 불의가 활개 치는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던 악을 회개하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 두기를 기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마음판에 새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으려고 힘써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비극의 첫 단추를 버리고 정상적이고 복 있는 첫 단추를 끼우는 것이며,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는 일이다.

3. 하나님의 말씀과 뜻은 어떤 것이라도 알았으면 목숨 걸고 반드시 실천하라.

지금까지 살펴 본 대로 인생이 지혜 없는 바보짓을 하며 살아가는 것과 정욕과 상실한 마음대로 살아가는 비극의 주인공은 왜 되었나? 그 첫 단추가 무엇이었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양심과 말씀, 자연계시와 성령을 통하여 알려 주셨음에도 그것을 자기 속에 두기를 싫어하고, 알고도 실천하지 않음에 있었음을 이제 분명히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계시, 즉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을 때 즉시,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소망, 행복, 형통을 누릴 수 있고(롬 2:10), 반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모든 비극을 당하는 주인공이 되고 만다는 것을 확정 지워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하든지, 또 우리 주변에 어느 누구도 순종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순종하는 자가 지혜 있는 자요, 복 있는 자요, 희망이 있는 자이다.

당장 내일 집회 참석, 각종 기도회 참석, 예배 참석, 전도 활동에 참석, 새벽기도 참석, 성경 묵상에 참석, 셀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생활화 하고, 본능화 하고,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기까지 마음, 힘, 뜻, 목숨 걸고 살아가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아직 어색하고 불편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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