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실인의 특징

2009.09.15 20:33

윤봉원 조회 수:2265 추천:47

민 6:1-272009091302 날자: 2009년 9월 13일 주일오후
제목: 나실인의 특징
본문: 민수기 6장 1절 - 27절
1.  나는 누구인가?
성경에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다양하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아들, 신부, 종, 동역자, 제사장, 선지자, 왕, 기업, 제자 등으로 부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표현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음(교제)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처신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그만큼 다양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지를 살펴봅시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특별히 이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고 말씀대로 집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번 한 주간을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 새기면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를 바로 인식(認識)하고 특별히 하나님 뜻대로의 관계를 맺도록 힘씁시다.
2. 나실인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1-2)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자 일정 기간을 따로 정해두기로 하는 나실인의 서약(誓約)에 관한 내용입니다(6:1-2). 나실인이란 용어는 “분리된”, “자신을 헌신함”을 나타내는 히브리어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 분리되어 사는 나실인의 성격을 이 용어에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나실인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린 사람입니다. 나실인은 모든 지파에서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나 할 수 있었고, 그 기간도 본인이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아니었습니다. 나실인은 오늘날 우리식으로 말하면 평신도입니다. 평신도들 가운데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서약(誓約)하고 다짐한 자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 특별한 서원을 하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을 구별하여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2). 누구든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규례 안에서 서원을 행하며 나실인으로 살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나실인은 이스라엘 평신도들 가운데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겠다고 스스로 자원하여 나선 경건한 무리들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유명한 나실인에는 삼손(삿 13:2-7)과 사무엘이 있습니다(삼상 1:9-11). 그들은 모두 평생 구별된 삶을 살도록 그들의 부모가 서원했던 나실인이었습니다.
나실인 제도는 신약시대에도 그 흔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폭넓게 받아들여졌던 경건의 유형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18:18에서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라고 증언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나실인 서원을 하였을 가능성을 추측하게 합니다(참조, 행 21:23-36).
자발적인 헌신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구별하여 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도록 합시다.
3. 나실인이 지켜야 할 규정 세 가지(3-8)
본문은 나실인 제도를 세 가지로 규정합니다. 나실인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나실인으로 서약(誓約)한 자가 해서는 안되는 금기사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실인은 세 가지 금기를 지켜야 합니다.
첫째, 포도(포도주)와 관련된 모든 것을 먹거나 마실 수 없다. 둘째, 머리털을 밀어서는 안된다. 셋째, 시체와 접촉해서는 안된다.
이 세 가지 금기 규정은 나실인들을 다른 세속인들과 구별하는 수단들입니다. 이것은 성별(聖別)되었다는 것은 자기 육체적인 욕심, 인간적인 욕망으로부터 구별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울의 용어로 말한다면, 육체적 욕망을 벗어 버리고 성령의 열매(갈 5:16-21)를 맺고자 구별된 상태입니다. 반면 나실인들이 해야 할 일은 “자기 몸을 구별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었습니다(2, 5, 6, 7, 8, 14 21절).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란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자기의 재능(才能), 자기의 능력(能力), 자기의 시간(時間) 등을 바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쉬운 말로 바꾸면 경건한 삶을 구현(具現)하는 일로 보입니다.
나실인의 특징은 여호와께 자신을 구별하여 드린 기간에는 부정한 것과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도주와 독주, 주검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하며, 머리를 자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나실인이 지켜야 할 서원 가운데 적어도 두 가지를 어겼습니다. 그는 죽은 사자의 시체를 접했습니다(삿 14:5-9). 들릴라로 하여금 머리를 밀도록 허락하였습니다(삿 16:18-22). 그로 말미암아 삼손은 눈 빼이고,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참으로 비참한 최후 인생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온전히 자신을 바쳐 조금이라도 부정(不淨)한 것에서 떨어져 나와 하나님께 구별된 존재로만 살겠다는 나실인의 소원(所願)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전에 예레미야 5장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었듯이 오늘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옳게 바르게 성실하게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너무나 힘든 때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이 얼마나 희귀한 때인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 시대는 불행히도 나실인의 고상한 위치를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뜨린 삼손(삿 16:18-21)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방해받을 만한 일이라면 아무리 즐거운 것일지라도 철저히 멀리하는 나실인의 서원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거룩함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은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원 역사를 베풀어 주시고,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령한 나실인으로 살아가도록 합시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절제해야 할 것은 무엇이며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지 성경 묵상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성령과 진리의 인도를 받아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힘씁시다. 주인공 되세요.
4. 나실인이 지켜야 할 규정을 어겼을 때(9-21)
하나님께서는 나실인이 지켜야 할 규정을 어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9절 이하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실인이 서원 기간에 부득이하게 시체에 접촉했을 때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려 정결해질 수 있는 은혜의 대책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희생제물의 피로 더러움이 제거되고, 다시 하나님께 봉헌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실인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부지중에 행한 작은 죄 하나가 나실인으로 있던 헌신의 날들을 무효(無效)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일 년 된 숫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로 드릴지니라 자기 몸을 구별한 때에 그 몸을 더렵혔은즉 지나간 날은 무효니라’(민 6:12)
엄중한 이 말씀이 오늘 내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비록 티끌만큼이라도 주님을 떠나 멀리했을 때는 우리가 출발했던 바로 그 지점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소원해졌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재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가 있으면 관계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사 59:1-3)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의 뜻을 어긴 죄를 지었을 때는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어떤 죄라고 회개하고 죄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은 다 용서 해 주시고 새롭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할렐루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 1:18-20)
5. 복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22-27)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민 6:23)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풍성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23). 아론과 그 아들들은 하나님의 이 놀라운 복을 회중에게 선언할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복을 선언하시고 그 복에 초대하시는 하나님께 나가 복을 받고, 우리도 세상 가운데서 복을 선포하며 복의 근원으로 살아갑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브라함의 자손 답게 살아가는 정상적인 삶입니다. 뜨거운 감자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민 6:24)
하나님은 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복이 이스라엘의 것으로 항상 유지되도록 그들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자기 백성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 주십니다(시 121편). 복을 주시는 분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셔서 그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지켜 주신다는 사실에 힘을 냅시다. 예레미야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은 너무 무섭다는 생각이 얼마나 강하게 듭니까? 그러나 구원의 메시지도 같이 선포하신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게에 복을 주시고 그 복을 잘 누리는 주인공이 되기를 고대하십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 6:25-26)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얼굴을 드시고 그 얼굴빛을 비춰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 얼굴을 감추시는 것은 그분의 진노를 뜻하며, 우리에게 심판과 불행을 의미합니다(참조. 신 31:17,18; 시 30:7; 104:29).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그분의 인자한 얼굴을 보여 주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의 얼굴빛이 우리를 향하여 비추시는 것은 은혜와 평강(平康)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시 67:1)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간절히 바랄 것은 하나님의 얼굴빛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얼굴을 드시도록 기도합시다.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시 123:1-2)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 6:27)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소속됨을 표시하는 인장이나 서명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그들 위에 놓는 것입니다(참조. 사 44:5; 계 14:1).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토록 놀라운 복을 전하는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축복의 특권을 행사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아름다운 복을 마음껏 누리는 주인공이 됩시다.
6.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려 약속의 복을 풍성히 받아 누리는 주인공이 되라!!
나실인 서원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는 성도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실인이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되는 삶을 살았듯이 성도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몸된 교회를 위하여 성별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나실인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표상이 된다고 곧바로 연결짓는 것은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나실인은 특정 시대에 한시적으로 존재했던 경건한 무리입니다. 나실인은 자원해서 그렇게 살겠다고 나선 무리입니다. 그들은 독특한 외형과 습관으로 자기들의 경건을 다른 사람들에게 표현했던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한시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성별된 존재(存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에는 어떤 시간적인 한계가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그 이후에는 다시 세속인(世俗人)으로 돌아가도 되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제자(弟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걷는 자들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럼에도, 나실인의 삶은 오늘날 부름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귀담아 두어야 할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나실인으로 살겠다고 서약(誓約)하며 나서는 자들이 해야 했던 일은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서약(誓約)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제자됨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실인의 정신인 “우리의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일” 만큼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우리가 힘써야 할 분명한 일이요, 길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욕심, 생각, 고집, 주관을 다 내려놓고,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을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온전히 순종하는 산 제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온전히 받아 누림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인공 되세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항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륵 하라’(롬 12:1-2)
참조. 왕대일,「민수기」, p. 182.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09-15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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