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을 하늘에 두라

2008.08.26 23:00

윤봉원 조회 수:2075 추천:71

마 6:19-342008082401날자: 2008년 8월 24일 주일오전
제목: 소망을 하늘에 두라
본문: 마태복음 6장 19절∼34절
1.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성경을 바로 알고 믿을 수 있게 될까요?
구원 얻는 이치는 먼저 사람에게 배우고, 그 다음에는 이 문서 성경에게 배우고, 그 다음에 성령의 감동에게 배우고, 또 자기가 실지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데에서 배워서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지금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고, 또 이 성경 말씀에서 배우는 것이고, 또 성신의 감화 감동에서 배우는 것이니 세 단계로 이 시간에 배우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완전히 자기에게 구원이 되게 아는 것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자기를 자유하게 하는 능력적으로 아는 것은 경험과 체험에서 되는 것입니다. 얼토당토않은 명령이라도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성경을 온전히 알아가며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소망을 하늘에 두라
2.1. 심령이 밝아진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20~23)
이 말씀을 요약하여 한 말로 하면 우리 믿는 사람들이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면 심령이 환하게 밝아진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면 그 심령이 환하게 밝아져서 미래, 현재, 과거, 자기, 다른 사람, 모든 사물 그런 것을 바로 보고 정평정가하고 올바른 소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소망을 땅에 두면, 그 소망을 세상에 두면 그 심령은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면 제가 아무리 지혜 있다고 해도, 인간은 이 세상은 짧고 내세가 긴데 땅에 소망 둔 자는 그 심령이 어두워서 모든 심령의 견해가 짤막한 이 세상만을 표준으로 해 가지고 견해하기 때문에 영원한 긴 내세는 다 진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심령이 밝고자 하는 사람(신앙 양심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하늘에 소망을 가지고 살면 그 심령이 밝으니까 세상살이를 바로 하게 되기 때문에 하늘나라도 성공이요 세상도 성공이요 다 성공하게 됩니다. 양심은 힘이 있습니다. 자기 인간 요소로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힘이 제일 세고 그 다음에 힘은 양심이 셉니다. 뭐라고 쌓아도 그 사람은 그 지식대로 모든 움직임 생사를 하고야 만 것입니다. 그 지식에게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양심이 강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왜 힘을 못 쓰고 죽느냐? 살인자가 왜 잡히느냐? 살인할 때와 같은 용감 같으면 절대 안 잡힙니다. 그 양심에게 벌써 붙들려서 그는 꼼짝 못하고 제가 잡힐 곳으로 걸어 들어가서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밝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다 심령이 밝아서 속지 않고 후회하지 않을 생애를 하게 된다는 것을 첫째 말씀해 주셨습니다.
2.2. 현실에서는 하나님이냐 물질이냐 둘 중에 하나를 반드시 선택하며 살아가는 인생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이 말씀은 ‘성도야, 네가 수많은 현실 그것은 영원무궁의 세계를 지금 결정짓는 그것인데, 땅에서 매면 하늘에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 풀려지는 것인데, 영원을 결정하는 것인데 너는 영원이 결정되는 이 현실에 네가 누구를 섬기려느냐? 둘 다 섬기지는 못한다. 하나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둘 중에 하나지 둘 다 섬기지 못하나니 어느 것을 섬기겠느냐?’
이것이 결정되는 것이니까, 알든지 모르든지 결정되는 것이니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야, 내가 이 현실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으로, 그분을 위해서, 그분 중심으로, 그분에게 따라서 이 현실은 내가 움직이겠다. 그러면 이 현실은 분명히 내가 하나님을 섬겼다. 내가 그에게 속했다. 그를 따라서 움직였다.’
‘아, 이 시간에는 하나님 세상 이렇게 갈 지(之)자 걸음으로 이래 쌓았지만 가만히 비판해 보니까 이 시간에 나를 지배한 것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니다. 내 마음이 나를 주관했다. 내 몸뚱이가 내 주관했다. 내 생명이 나를 주관했다. 어느 인간이 주관했다. 사건이, 물질이 그런 것이 주관했다. 그러면 이것은 물질 섬긴 자라.’ 이렇게 영원을 결정짓고 나가는 현실에서 하나님이냐 물질이냐 둘 중에 어느 하나로 결정되어 나가는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이 전투를 해야 됩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과 내게 있는 부패성은 이 속는 일, 물질을 섬기는 자가 되게 하려고 애를 쓰고 성령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게 하려고 애를 쓰십니다. 거기에 나는 자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끼어서 자유 있습니다.
‘내가 물질 섬기는 이것은 내가 버린다. 물질을 섬기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것으로 결정짓는다.’ 이 현실에서 어디로 네가 속하느냐 할 때에 이 물질계의 것을 착 배반하고 하나님을 착 섬길 때에 하나님은 만족하십니다. 이것으로 하나님과 밀접하게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 아무리 부르고 좋아 해도 네가 어느 쪽이냐 할 때에 배신하고 척 가 버리면 그 본남편 되신 주님은 분개하기가 짝이 없을 것입니다.
2.3. 그 나라와 그 의만 구하면 물질은 이용물로 주신다(25절-34절)
물질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물질을 자기 배경을 삼고, 그 물질을 자기의 힘을 삼고, 자기의 근본을 삼고, 자기의 원동력을, 자기의 근원을 삼고 그 물질을 의지해 가지고 그들은 무엇을 건설하느냐? 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해야 영광스럽고 존귀해질까?’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좋게 많게 편리하게 잘하려고 그것을 마련합니다. 그것을 구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물질을 자기 주로 삼은 것은 그것들을 구합니다.
그 사람의 생애에 하나님을 구한 것이 50%가 되고 물질을 섬긴 것이 50%가 되면 그 사람이 지금 건설하는 건설은 뭘 건설하느냐? 50%는 하늘나라를 건설하게 될 것이고 50%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건설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것으로써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 그것은 다 이방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마련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의 전부를 삼아 가지고, 자기의 생명과 능력과 지혜와 배경을 삼아 가지고 무엇을 건설해야 되느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로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으라. 땅에 것을 생각지 마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그분이 땅 위에 살 때에 순전히 하늘의 소망만 가지고 살아서 모든 만물 위에서 만물을 구속하는 구속주가 되셨다.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것이 너의 소망이다. 땅에 있는 모든 지체들을 죽이라.”(골 3:1-5a) 말씀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좀 더 좋은 집, 좋은 직장, 좋은 건강 같은 것으로 자기의 안보를 삼고 살아갑니다. 자기대로는 자기를 행복되게 성장하려 하는 그것으로써 이 세상 것을 건설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 자기 섬기는 대상을 삼은 자들은 무엇을 구해야 되느냐? 무엇을 건설해야 되느냐? 하늘나라를 건설하라. 하늘나라는 하나님에게 통치 받는 것이 하늘나라인데 하늘나라를 건설하라.
이러니까 자기가 힘도, 힘도 세상에서는 이 힘이 필요하고 하늘나라에는 이 힘이 필요하면 힘도 하늘나라의 힘을 세상에서 마련하고, 지식도 하늘나라의 지식을 마련하고, 영광도 지위도 하늘나라 것을 마련하고, 기쁨도 하늘나라 것을 마련하고, 전부 하늘나라 것을, 웃음도 하늘의 웃음, 근심도 하늘의 근심, 울음까지도 하늘의 울음, 모두 다 하늘의 것을 마련하고,
또 의는 하나님의 뜻대로 결과 맺은 그것이 그 의인데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은 예수님밖에는 한 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대속으로 심판은 면한 그것이 하늘나라 영광을 주는 그 대가는 될지라도 심판을 면하는 그런 대가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해서 세 가지 대속을 해 가지고 입혀 주셨기 때문에 이제 안보는 예수님의 대속의 안보를 네가 노력해라. 주님이 우리에게 사죄를 입혀 주셨으니 이 사죄를 네가 뺏기지 않도록 노력해라. 또 이 사죄를 힘입어 가지고 사죄 안에서 영원한 것을 마련해라. 이 칭의를 네가 벗어놓지 않도록 뺏기지 않도록 이 칭의의 예복을 뺏기지 않도록 네가 노력하라. 또 의를 가지고 의 안에서 무궁한 것을 네가 마련해라. 하나님과 화친된 이 화친을 아무 것에도 뺏기지 말고 이 화친을 네가 뺏기지 않도록 네가 노력을 하고 이 화친을 이용해 가지고 네가 무궁한 것을 네가 마련해라. 그것을 가리켜서 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너는 안보해서 대속 안에 있어야 되지 대속 밖에 나간 것은 다 죽는다. 그것이 너희의 구할 것이니라.
그러면 이방인들이 구하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은 어떻게 합니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그것을 구하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그 다음에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더해 준다. 더해 준다. 
더해 준다 말은 많게 해 준다 말 아닙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 있는가? 떠날 건데, 두고 떠날 것인데 무슨 필요 있는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데에 이용물로 필요합니다. 이러니까 이용물로 필요하기 때문에 이용물을 더해 준다 그 말은 이 이용물이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데에 더 유효하도록, 하늘나라를 건설하는 데에 더 필요 있도록, 더 좋은 결과를 맺도록 그것을 조절해 주겠다 하는 말씀입니다.
2.4. 물질 의지하면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는다(24절-34절)
종이 주인을 섬길 때 중하게 여겨 섬기는 그것이 섬기는 것이지 첫째 중하게 여기고 그 다음에 찌끄러기 그 다음으로 섬기는 것은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다 중하게 여기고 보다 섬기는 그자를 섬기는 것이지 보다 중하게 여기는 그것 다음으로 천하게 여겨 가지고 섬기는 그것은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마지막에 결론을 지워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냐 물질이냐, 물질보다 하나님이냐 하나님보다 물질이냐? ‘나는 하나님도 섬기고 물질도 귀중히 여긴다. 둘 다 귀중히 여겨서 나는 섬긴다.’ 하지만 둘 중에 어느 것인가 하나를 귀중히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둘을 동시에 중하게 여길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제일 권위 있고 제일 높게 크게 여겨서 그를 바라보고 그를 두려워하면서 그를 좋아하도록 그를 위해서 그의 법도대로 섬기는 그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업신여기는 것은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에는 반드시 크기 때문에 섬깁니다. 또 두려워하기 때문에 섬깁니다. 그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에 섬기는 것입니다. 그에게 따라 움직여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현실 현실의 생활에서 자기야 알든지 모르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영원한 결정을 짓고 지나가든지, 이 물질, 물질은 이 우주에 있는 나라도 물질이요, 인간의 육체도 물질이요, 마음도 물질이요,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지식도 물질이요, 모든 행락도 물질이요, 가정도 물질이요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물질입니다. 자기 기분 위주로 사는 그자도 물질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면 우리 한 현실을 당했을 때에 이 현실은 하나님 섬기는 자로 영원을 결정하고 이 현실에는 지나가느냐 물질을 섬기는 자로 결정하고 지나가느냐? 알든지 모르든지 이것은 결정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그 사람을 하나님이 책임질 것이고 물질을 섬기면 물질이 그 사람을 책임질 것입니다. 물질 책임은 언제까지 그 책임이 가능한가? 그는 세상을 떠날 때에는 그것으로 끝나 버리고 맙니다. 책임질 권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의지해도 냉면(冷面)만 당하고 분함만 당했지 그것이 책임져 주지도 못하고 질 권리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떠날 때에 그것은 다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도적맞는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지나갔으면 그 면에는, 우리 현실을 당할 때에 우리 현실에서 이 면에 대한 영원한 결정이 되고 이 면에 대한 결정이 되고, 우리에게는 수많은 다각의 현실을 주시는데 그 현실 현실마다 하나님 섬기는 것 하나님 다음에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이것 저것 모든 것을 섬기는 것, 크게 나누면 하나님 섬기는 것과 물질 섬기는 것 이 둘로써 현실은 다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생각 하나 가진 것도 빠짐이 없이 낱낱이 그것을 다 행동록에 기록해 가지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현실을 주면서 ‘이 현실은 어떻게 하노? 자유로 해라. 네가 병신이라도 좋고, 못나도 좋고, 무식해도 좋고, 가난해도 좋고, 네 몸뚱이가 고름 투성이라도 좋다. 이 현실에는 누구를 모시고 누구를 의지하겠느냐? 뭘 의지하겠느냐?’
이것으로써 결정되는 이대로 무궁세계에 ‘이 각도에서는 나를 바라보고 나를 섬기고 내게 부탁하고 속했으면 내가 책임지겠다. 또 네가 세상과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바라보고 섬김으로써 그에게 부탁하면 그것이 책임질 것이다.’
홍포 입은 부자는 물질 의지했지만 물 한 방울도 와 가지고 도와 줄 권리가 없었습니다. 물 한 방울의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3. 교훈
3.1. 하나님은 인간이 모르는 수많은 방편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중심 위주로  살 것이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함으로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더해 주시는 은혜로 살 것이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사업을 하면서 이 사업을 거짓말 해야 붙들 수 있는 그 형편에 거짓말 아니면 무너진다 하는 그 지식이 누구 지식이냐? 너거 인간 지식 아니냐? 그런 것을 얼마나 봤느냐?’ ‘역사에 전부 다 통계를 보니까 그렇습디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사업이 붙들리고 그렇게 해야 사업이 되는 그 방편밖에는 모릅니다. 그 방편밖에는 모르지만 방편은 너거가 모른 수백 수천 방편이 있다. 너거가 아는 방편은 일방적인 방편이라. 그 방편 외에는 없는 줄 알지만 그 방편 외 이 수없는 방편이 있다.
네가 봐라. 사람은 먹으려면 농사 지어야 되는 줄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6-27)라고 질문하십니다. 새는 농사 안 지어도 먹는 방편이 있다. 너는 길쌈을 해야 베를 짜 가지고 의복을 입는 줄 알지? 의복 입는 것은 그것 아니고 백합화는 솔로몬보다도 아름다운 것 입었는데 땅속에 살면 땅에서 올라와 가지고 아름다운 채색을 입혀 주는 그런 방편도 있다.
그런 몇 가지를 예를 든 것은 무엇이냐? 인간이 살고 수입하고 자기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하는 방편이 너거 인생들이 알고 있는 그 방편만 아니다. 그 방편 후에 수많은 방편이 있다. 수많은 방편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너거 지식으로 이렇게 그 나라와 그 의 구하면 이것은 망한다 그렇게 생각지 말아라.
그 방편 외에 얼마든지 수없는 방편이 있기 때문에 그 나라와 그 의만 구하면 잘 되니까 너거 일방적 지식 가지고 ‘이것은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지 말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다 더해 주시마고 했으니까 이 약속을 믿고 이 방편을 취해라. 자기의 좁은 지식, 고정관념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이 인도하는 그 걸음을 따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 것은 그 나라 그 의 때문에 자꾸 매맞고 쫓겨나고 망치고 뚜드려 맞고 감옥에 갇히고 그 나라와 그 의 때문에 망하는 것 일로뿐이었는데 그 결말을 봐라. 그것이 요셉의 성공한 그 순서가 아니냐?
너거 조부라운 일방 지식을 가지고 ‘여기에서는 의를 지키면 안 되겠던데, 여기서는 죄 안 지으면 안 되겠던데, 여기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안 되겠는데, 여기에서는 주일 지키면 안 되겠는데, 여기에는 거짓말 안 하면 안 되겠는데, 여기에는 새벽기도 나가면 안 되겠는데, 여기에는 새벽기도 나가고 주일 지키면 공부에 합격 안 하고 낙제하겠는데.’ 그게 너거 생각이지 하나님은 그 외에 하시는 방편이 얼마든지 있다.
수없는 방편, 너거가 모르는 방편이 많이 있는데 너거 생각에 방편 몇 가지 아는 그것만 가지고 ‘이 방편뿐이니 이것은 틀림없이 안 된다.’ 그렇게 생각지 마라. 너희들이 모르는 방편이 수없는 방편이 있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겠다.
이제 방편에 하나님 편에 수없는 방편이 있기 때문에 제가 아는 조부라운 지식에 그 방편에 틀렸다고 틀렸다고 생각지 마라. 안 된다고 안 된다고 생각지 말고 염려하지 마라.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해라.
홍해 바다를 건너가라는데 건너가는 것은 죽는 것 외에 다른 역사 통계가 어디 있느냐? 들어가면 빠져 죽는 것이지. 그렇지만 하나님이 건너가라는 것은 당신이 하는 방편이 딴 방편이 있기 때문에 가니까 육지같이 건너가지 않았습니까?
이러니까 너희들의 조부라운 생각에 아는 기존 지식의 방편 그것뿐 아닌데 그것뿐으로 알아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해 나가면서 염려하고 낙망하고 두려워 떨지 말아라. 너거가 모르는 수없는 방편이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네 보기에 이것은 폭망이다 해도 안심하고 시키시는 대로 따라가라 그 말입니다.
3.2. 하나님께서 성도의 사는 방편은 따로 주셨다.
네가 예수 믿기 전에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자기의 숭배의 대상도 배경도 삼은 것이 물질이요 또 그들이 구하는 것도 물질이라. 물질을 힘입어 물질 따라 살다가 물질과 함께 망하는 것이 불택자요 이방인들이라.
그러나 너는 이방인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됐기 때문에 새사람으로 변화가 됐다. 구더기가 파리가 됐으니까 구더기 살던 데로 들어가면 너는 죽는다. 물벌레가 잠자리가 됐기 때문에 잠자리가 됐으면 공중에 날아가야 제가 먹을 것도 있고 살지 잠자리가 물 속에 들어가 버리면 당장 죽는다.
너는 이제 중생돼서 성도가 됐기 때문에 성도에 대한 생활 법칙은 하나님이 따로 줬다. 보라, 새의 사는 법칙도 있고, 나무의 사는 법칙도 있고, 백합화 사는 법칙도 따로 있는데, 백합화가 새의 사는 법칙을 제가 하려고 공중에 날아다니며 툴툴 털어 봐라. 하루면 빠짝 말라버린다. 백합화 사는 방편을 새가 취하려고 땅속에 반만 파다 묻어 놓으면 그것은 얼마 안 가서 죽어버리고 만다.
하나님이 주신 그 만물에게 생의 방편이 있는데 네 성도의 방편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함으로써 무궁도 성공하고 이 세상도 모두가 다 자기에게 가장 유익된 세상으로 더하여지는 이것이 너희들의 방편이기 때문에 이 방편으로 살아야 되지 이 방편 어기면 안 된다 그것을 여기에서 가르쳤습니다. {참조. 82010853}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8-26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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