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실상(實狀)

2005.02.14 02:14

윤봉원 조회 수:2885 추천:81

계 21:1-42005021301

날자: 2005년 2월 13일 주일 오전

 

제목: 천국의 실상(實狀)

 

본문: 요한계시록 21장 1절 - 4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1. 우리의 영주처는 천국

 

시골에 계시는 우리 어머님께서는 어렵고 힘들 때면 종종 이 세상을 빨리 떠나서 천국에 가고 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릴 때 제가 그 소리를 들으면서 그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왜 어머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저는 생생하게 이해가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천국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를 하고 있으며 진정으로 그곳에 가기를 소원하는 강도가 이 세상에 살기를 소원하고 낙을 누리는 것과 어느 정도 비교가 되고 있는지요?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고 말씀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이 이 세상 살이로 끝이 나고 영원한 천국이 없다면 우리만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천국, 앞으로 가서 영원히 살 천국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우리만큼 복 있는 소망을 가지고 복 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거처로 주실 우리의 본향,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고 약속하신 천국, 믿는 자에게 영생의 선물과 영생의 소망을 주시고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하실 그 천국에 대해서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항상 가지고, 감사와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삶을 통하여 천국 준비 잘하는 나그네 인생이 되도록 합시다.

 

2. 천국의 실상(實狀)

 

1)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에 대해서 성경에서 여러 곳에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 중에서 천국에 대한 가장 생생하고도 극적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성경이 요한의 성령을 통한 계시를 통해서 기록해 준 요한계시록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여기서 우리는 고난 받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 피조물의 미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출현을 통해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진다'는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원창조가 없어지고 옛 질서가 하나님의 진노로 파괴되고 멸절되고 나서 옛 질서가 새로운 창조행위로 대체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에서 새 질서를 창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해석이 아닙니다.

 

또 다른 견해는 새로운 질서가 무에서의 새 창조가 아니라 옛 질서의 혁신을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이 성경적인 해석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벧후 3:10~12)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에는 모든 기존의 일차 창조의 것들이 다 풀어지고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재창조 하셔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1절에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어떤 것을 완전히 파괴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으로 대체하는 것은 구속 행위가 아닙니다. 어떤 것을 구속하는 것은 사망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릴 어떤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2) 바다가 없는 곳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하늘과 새 땅은 완전히 새롭게 정화되어 악이 존재할 여지가 없습니다.

 

바다는 요한계시록 13장 1절에서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말씀하신 대로 적그리스도인 짐승이 바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다는 이번 쓰나미 해일이라는 자연 재해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엄청난 위력을 가진 죽음의 세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노아 홍수, 요나의 바다 속 경험등을 통해서 우리에게 위험과 두려움과 공포와 죽음의 대상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 데 이것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시편 46편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시 46:1~3)라고 말씀하심으로 바다는 우리의 두려움과 환난과 공포의 근거지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시 46:4)고 말씀하심으로 바다와 전혀 상반된 시내가 흘러 내리는 고요하고 평안하고 행복한 하나님의 성을 말씀하고 있는 그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3) 거룩한 성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로운 질서의 절정은 하나님의 도성, 구속받은 시온,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의 도래로 이루어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합니다. 보다, 보다로 구별하여 부정한 것은 조금도 없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고 온전한 것으로만 되어진 성이 하늘 나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눈에 거슬리고 더럽고 추하고 악한 것으로 가득차서 차라리 안 보았으면 좋겠다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 세상입니까? 이런 세상과는 전혀 상반된 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까? 우리는 이미 그 나라의 시민권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시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옵니다.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하나님의 나라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10절에서 27절 사이에 보면 얼마나 아름다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아름다운 보석으로 단정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가시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불가시적인 기쁨과 행복으로도 가득 찬 세상입니다. 어린양 예수의 빛과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찬란하게 밝게 비춰지는지 어두움과 밤이 조금도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속된 것, 가증한 일, 속고 속이는 일이 전혀 없으며, 술 취함, 음란, 수상 숭배하는 것이 조금도 없는 아름다운 나라 입니다. 이곳에 가서 살고 싶습니까?

 

4) 하나님과 함께 삶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새 예루살렘의 주요한 특징은 이 땅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아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성령님의 모습으로 중생한 성도들에게는 항상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 하고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나날의 체험에서 동떨어지고 격리된 분으로 간주되지 않으시고, 그분은 왕으로 자신의 백성 중에 장막을 치시고 함께 영원토록 사시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에스겔의 환상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 척이라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겔 48:35)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삼마" 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는 뜻입니다.

 

요한도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기록함으로 말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하시매'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장막을 치다, 거주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장막을 치고 그들고 함께 살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을 가진 임마누엘이라 불리 십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오셨던 그분이 실제적으로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시고 그분과 함께 사는 곳이 바로 우리가 가서 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우리가 보고 싶고, 인사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기대고 싶고, 찬송하고 싶고, 영광 돌리고 싶고, 위로 받고 싶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기쁘게 살 수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5) 모든 눈물, 사망, 애통, 곡, 아픈 것은 끝

 

"모든 슬픔의 끝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 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 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세상에서 살아 오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 슬픈 일, 사망이라는 이별의 고통, 배고픔, 사업 실패로 인한 가난과 절망, 여러 가지 빚으로 인한 스트레스, 직 간접으로 질병이라는 고통, 아픈 것들을 내가 대신 아파 주고 싶고, 죽어 주고 싶고 하지만 해 줄 수 없을 때의 고통등을 얼마나 많이 겪으며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얼마나 많이 겪게 될런지요?

 

40여년이라는 짧은 제 인생을 돌아 보면 앞에서 열거한 것들을 참 많이 겪은 사람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정들을 우리는 많이 겪으며 살아 왔습니다. 지금도 그 과정 속에 살아 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어떤 원치 않는 것들이 우리에게 닥쳐 올지 모릅니다. 물론 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온전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과정들로 주신 현실들이기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는 현실들이었지만 그 현실을 당할 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러나 요한은 천국에서는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흘리는 눈물이 있다면 그것은 기쁨의 눈물일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을 흘릴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도 더 이상 없습니다. 슬픔도 고통도 없습니다. 왜요? 이러한 모든 것들은 죄의 결과로 오는데 그곳에는 죄가 없기 때문이지요.

 

새 예루살렘에는 묘지가 없습니다. 시체 공시장도, 장의사도, 병원도, 진통제도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처음 것들, 이 세상의 수고에 속한 요소들이다. 그것들은 다 지나갈 것입니다.

 

3. 바울의 소망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7절 이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소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궁극적으로 고난을 향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훨씬 초월하는 소망과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향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미래의 기업에 대한 소망이다. 이 소망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분을 의지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선물이요 기업인 것입니다.

 

4. 나에게 적용

 

1) 감사하며 살자!

 

우리의 행위로가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시민권 허락하여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갑시다.

 

2) 천국의 실상을 기억하고 살자!

 

우리는 우리의 삶이 바쁜 나머지 이 땅에 것을 생각하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데는 전문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천국에 대해서는 그저 막연히 아련한 추억 정도로 그치고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천국의 실상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 감으로 바울의 기도대로 참으로 소망이 넘치는 삶,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어떤 환경에 처하여서도 오늘 죽어도 나는 내가 그리고 그리던 새 하늘과 새 땅, 바다가 없는 곳, 거룩한 성,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예비한 곳,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처를 하며 살 곳, 눈물, 애통, 사망, 아픈 것이 영원히 없는 천국에서 살 무한한 복 있는 자라는 사실에 지극히 담대한 삶을 살아가는 복 있는 자들로 살아 갑시다.

 

3) 천국 준비 잘하자!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천국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 받고 사활대속의 공로를 값 없이 선물로 입은 자들은 다 들어 갑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들도 있으며, 불가운데서 얻은 구원과 같은 구원을 이루어서 영원히 부끄럽게 살아가는 자들, 먼지의 형체와 같은 모양을 하고 살아 가고 있을 자들도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그 나라에서 나타날 나의 형체의 영광을 생각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소망 가운데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이 기름 준비하지 않고 세월 다 보내고 있다가 후회 할 인생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게 네게 명하는 명령 즉 영감을 따라서 진리를 따라서 대속의 공로를 벗지 말고 한 순간 한 순간을 순종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순종한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자기의 영광이 결정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에, 우리 개인의 죽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마음, 힘, 뜻, 목숨 다하여 내 진리, 내 영감 순종하는 생활을 힘쓰다가 점도 없고, 흠도 없고, 평강 가운데서 해와 같이 빛나는 구원을 이룬자들로 우리의 인생을 마감하는 복된 주인공들이 되도록 죽도록 충성합시다! 목숨 걸고 충성합시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4)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 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170 고난과 죽음의 의미 기록하라 하시고(계 21 : 5). 너무 좋아서 사실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바로 고통과 슬픔과 눈물과 죽음이 추방되는 곳이 있다는 선언일 것입니다. 그 사실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른다. 우리는 혹시실망을 하게 될까봐 그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하나님의 보좌에서 울려 퍼지는 명령이 요한에게 직접 내려졌다."기록하라." 그분은 이렇게 명령하셨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이 말을 참되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 말들이 친실에 상응한다는의미이다. 그 말은 공허한 환상에 불과한 약속들이 아니다 또한그 말이 신실하다는 것은 실망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말을신뢰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계 21.6). 헬라어 알파벳은 알파라는 철자로 시작해서 오메가라는 철자로끝난다. 그것은 영어의 에이와 제트에 해당된다. 그리스도께서는자신을 만물의 시작과 끝으로 계시하고 계신다.

 

다시 한번 우리는창조의 승리를 담은 승리에 넘친 선언을 듣게 된다. 의미 없는 반복이 영원히 반복된다는사실은 전혀 암시되어 있지 않다. 만물을창조하신 분은 만물의 좌미 있는 종국을 초래하신다. 공허함과 무익함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분에 의해 추방된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인 분께서는 모든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생명수를 주시겠노라고 약속하고 계신다. 목마름이라 천국은 어떤 곳인가 171는 강력한 이미지는 성경에 자주 나타난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썼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 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 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 42 1-2).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갈망이 혀를 내밀고 헐떡거리며 물을 찾는 사슴에 비교되고 있습니다. 그 감정은 강렬하다. 그 목마름은 절실하다. 그리스도에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사람은 바로 이런 열정적인 갈망을 소유한 사람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예수님의 말씀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나눈 대화를 상기시 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 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룻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 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 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 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 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 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 10-14).172 고난과 죽음의 의미 이 약속들은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절정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사역을 성취하셨다. 그리고 그 결과로 미래의 승리가 확보되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 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흥악한 자들과 살인자 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 이 둘째 사망이라(계 21 :7-8). 이 구절은 불길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지막심판 행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실한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유업에 온전히 참여하게 되리라는 약속이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에 입양될 때 그리스도와 함께 기업을 무를 자들로 부름받았다 그러나 계속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 적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자들은 천국의 복에서 제외되고, 불못에 참예하게 된다. 언급된 죄의 목록(거짓말, 우상 숭배 등)은 강팍하게 그리스도께 충성하기를 거부하는 적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의 특징들을 요약해 놓고있습니다. 거룩한 성의 팡휘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 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 천국은 어떤 곳인가 173 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 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계 21 :9-11). 앞서 요한에게 큰 음녀, 바벨론에 대한 환상을 보여 주었던 바로그 천사가 이제는 그를 그와 대조되는 거룩한 성으로 데려가고 있습니다. 그 거룩한 성은 빛나는 하나님의 영팡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것은 숨막히는 ◎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 빛은 벽옥에 비교되고 있습니다.요한계시록 앞 부분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출현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었다.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홍보석 같고"(÷fl 4 : 3). 벽옥은 그 색깔이 노랑색에서 빨강색, 그리고 초록색까지 다양하다. 그것은 또한 투명체이다. 반면에 홍보석은 붉었다. 그 성은빛처럼 투명하고 타는 듯이 붉은 하나님의 영광, 쉐키나를 반영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북편에 세 문,남 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계 21 : 12-13).

 

고대 세계에서는 성의 세력과 위엄이 그 성곽에 의해 평가되었다. 성곽은 성의 경계를 나타낼 뿐 아니라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였다. 고대의 전쟁에는 필수적으로 포위 공격과투석기가 포함되었다. 오늘날 옛 예루살렘성을 방문하는 사람들은그 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헤롯 대제174 고난과 죽음의 의미가 돌로 쌓은 예루살렘성의 성곽은 그 높이가 23m에 달합니다. 현대인이 보기에도 깜짝 놀랄 만한 이 장소는 시간이 흐르는 과정을통해서 지금은 지하에 묻혀 있는 나머지 23m의 성벽이 드러날 때그 모습이 훨씬 더 장엄할 것입니다. 지상의 예루살렘 성곽은 하늘의 예루살렘 성곽에 비교할 때 무색해집니다. 이 성곽은 크고도 높다. 그것은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대 없이 그성에 들어오려고 시도하는 모든 자에게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진 열두 문을통해서 그곳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원은 유대인으로 말미암는다. 구속사의 뿌리는 유대 민족 위에 심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는 모든 민족이 들어갈수 있는 문들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그 원래 민족인 이스라엘에게 영광을 부여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어린양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계 21 : 14). 우리는 교회의 기초석이 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데 가장 자주 사용되는 상징은모퉁이 돌이다. 그리스도 안에 세움을 받지 않고서는 어떤 기초석도 세워질 수 없습니다. 기초석(터)의 이미지는 서신서들에도 나타나고 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0). 천국은 어떤 곳인가 175 그 성곽이 한 기초석이 아니라 열두 기초석 위에 세워져 있다는것은 의미 심장한 사실이다. 여기서 열두 사도들과 열두 선지자들을상징하는 열두 기초석과 열두 문의 대칭은 신구약성경의 일치와 하나넘의 모든 백성이 완전히 포함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 량하려 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 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사 규텟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계 21 . 15-17). 거룩한 성은 금 갈대로 척 량된다. 그 척 량은 그 성의 완전한 대칭을 알려 준다. 비뚤꺼진 선이나 균형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은 완전하게 수직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그 성이 정육면체라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그 정육면체 구조는구약성경의 지성소를 상기시켜 준다(왕상 6:20을 보라). 아마도이것은 유대인들을 놀라게 만들 새 예루살렘의 특징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즉 그 성에는 성전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성전체가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성전이기 때문이다. 그 성은 일만 이천 스다디온(2200km점도)으로 척량되어 있습니다.그 수치는 상징적이다. 그것은 열둘이라는 숫자를 곱한 숫자이다.그 성은 무한히 확장되고 있습니다. 뉴측체서 덴버 정도까지 확장되어있는 성을 상상해 보라. 그 성막을 척 량한 수치들 또한 놀랄 만하다. 일백사십사 규텟도열둘을 제곱한 수치임을 보여 준다. 일 규빗은 원래 인간의 손가락끝에서 팔꿈치에 이크는 길이로 측정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성175 고난과 죽음의 의미곽을 6Sm정도로 평가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천사가 측정한 규빗이라는 사실을 주지하게 된다.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 리 같더라(계 21'18). 최근에 어떤 사람이 내가 태어난 해인 1939년에 일어난사건들을 담은 테이프를 내게 건네 주었다. 거기 언급된 사건들 중 하나가 미국에서 가장 호화롭고 비싼 개인 저택인 허스트 맨션(Hearstmansion)을 세운 사건이었다. 방이 100개가 넘는 그 맨션을 짓는데에는 1939년에 3000만 달러가 들었다. 그 맨션에 있었던 금으로된 시설들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그러나 허스트 맨션은 새 예루살렘과 비교하면 개 집에 불과하다. 우리는 맑은 유리 같은 정금으로 된 성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솔로몬 성전이 풍부한 금도금으로 장식되었던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그러나 새 성은 단순한 금도금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빛으로 빛나는 정금인 것입니다.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 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 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덖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 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둘째 는 자정이라(계 21 : 19-20). 그 성의 기초석에서 발견되는 보석들은 이스라엘 대제사장의흥패를 장식한 보석들을 상기시켜 준다(출 28 : IS 이하를 참조하 천국은 어떤 곳인가 177라). 어떤 사람들은 그 보석들이 12궁도 점성술에서 기능을 발휘하는 방법과는 역순서로 나열되어 있는 사실을 보고 이방 종교가 은밀하게 거부되고 있음을 본다. 이방 종교에서는 왜곡되어 있는 참된 실재가 하나님의 성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계 21'21). 이 본문은 "진주 문"과 정금으로 된 길이 있는 천국이라는 대중적인 개념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54 : 12의 예언을상기시켜 준다. 고대의 랍비들은 종종 이사야의 예언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예루살렘이 폭이 30규빗이고 높이가 20규뎃이며 그안의 공지가 길이 20규빗에 폭이 10규뎃이나 되는 진주를 갖게 되는 때를 학수 고대하였다. (그런 진주를 만들어내는 조개의 크기를상상해 보라.) 나는 피츠버그에서 태어나서 성장했다. 피츠버그는 뜨거운 열기를 뿜어 내는 철강 공장들에서 나오는 검댕과 매연으로 뒤덮인도시라는 대중적인 이미지보다 휠씬 아름다운, 사랑스러운 도시이다. 그 도시는 도시 갱신의 기로에 서 있었으며 토시 부흥의 모델이 되고 있었다. 피츠버그의 문제는 철강 공장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이 아니다. (지금은 많은 공장들이 쉬고 있습니다. )그 도시의아버지들을 계속 괴롭히고 있는 문제는 악명 높은 거리의 구덩이들이다. 지난 겨울에는 도로가 끊임없이 얼었다 녹았다 하는 일이되풀이되었고,그것은 급속하게 도로 표면을 파괴시켰다. 도로의움푹 들어간 구덩이에 빠져 영원히 사라져 버린 폴크스바겐(Volkswagen) 자동차들에 려힌 전설들이 있을 정도이다.

 

하늘의 성에는 구덩이들이 전혀 없습니다. 끊임없이 도로를 보수하는 데 필요한 도로세도 없습니다. 그곳의 거리들은 절대로 다시 보수할필요가 없는 수정같이 맑은 정금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교리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러한 회화적인 이미지들은 하늘에 존재할 영광을 가장 잘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요한이 환상에서 본 것과 꼭 같은 성을 만들어 낼 수 없으시다고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전이 없는 성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 ' 22) 이 구절은 그것을 읽은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성전이 없는 새 예루살렘이란그들에게는 전적으로 상상도 못할 것이었다. 그들의 미래의 소망은 마지막의, 장엄한 성전에 초접이 맞춰져 있었다. 예수님의 대적들은 예루살렙 성전이 멸망하리라는 그분의 예언을 듣고 분노했었다(그 멸망은 A.D. 70년경에 일어났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했을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답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 전은 사십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 천국은 어떤 곳인가 179 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 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 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 19-22). 성전은 하나님과 어 린 양, 즉 하나님의 아들의 직접적 인 임재로대체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만남의 장소"가 되신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의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췽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계 21 : f3). 다시 한번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구약성경의 이사야의 예언을반영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취지 않을 것이요 로직 여호와가 네게 영영한 빛 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사 60: 19). )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세상의 빛"(요8: 12)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분의 부활의 빛은 하나님의 찬잔한 영광과 더불어 해와 달의빛을 무색하게 만들 것입니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 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 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무엇이든지 속 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계 21 : 24-27),

 

거룩한 성은 만국에서 온 사람들이 왕이신 메시아에게 공물을드리 러 모여드는 곳이다. 구속받은 자들 중에 계수된 지상의 왕들이 어린 양의 발 앞에 영광과 존귀를 드리러 서둘러 몰려을 것입니다. 고대의 박사들이 멀리에서부터 여행하여 아기 그리스도께 선물을 드리러 왔듯이, 미래에는 왕들과 왕자들이 그리스도의 보좌로 나아오는 휠씬 더 큰 장관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만국이 만왕의 왕에게 경배를 드리기 위해 모일 것입니다. 그 문들은언제나 열려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해가 질 위협도 없을 것이며,그림자가 하나님의 임재의 빛을 가릴 수 있는 순간도 전혀 없을것입니다. 그 문들이 열려 있다 하더라도, 속된 것은 하나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그 문들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분에게 속한 자들에게만 열려 있는 어린 양의 성인 것입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 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 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 22: 1-2)이 광경은 에덴 동산의 몇 가지 요소를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천국을 타락으로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사물의 원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훨씬초월합니다. 미래의 낙원은 원래의 에덴에서 향유했던 축복을 훨씬초월합니다.

 

그 광경은 또한 에스겔의 예언과 흡사하다.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 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 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 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또 이 강가에 어부 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 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나 그 물이 성소 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 는 약 재료가 되리라(겔 47:7-12). 에스겔의 환상에서는 강물이 성전으로부터 흘러 나온다. 반면에 요한의 환상에서는 강물이 성전이 아니라 영구한 성전이며치유의 물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흘러 나오고있습니다.182 고난과 죽음의 의미 저주의 제거 요한의 환상에서는 그가 강 양편에 가지를 드리운 한 생명 나무를 보았는지 아니면 구별된 두 생명 나무를 보았는지를 결정하기가 어렵다. 어떤 경우든간에 그 나무는 미래에 존재하게 될 새로운생명의 질서를 상징합니다. 일년 사계절의 순환은 봄에 시작해서 겨울에 끝이 난다. 그런데 그 나무들은 달마다 새 실과를 맺는다. 그잎사귀들도 시들거나 죽지 않는다. 땅의 저주는 끝이 났다. 자연계내에서 더 이상 가시 덤불이나 엉겅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추수를위협하는 가뭄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약 재료가 된다. 그 잎사귀들은 열방의상처를 치유하는 향유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은 치료받을 필요가 있는병들이 어떤 것들인지 자히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는 자연 세계내의 일반적인 고통이 제거되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아니면적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해진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계 22:3). 저주의 종말은 하나님의 구속이 완전히 완성된다는 신호이다.저주라는 개념은 인류의 타락으로 말미암았다. 저주는 불순종에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최초의 타락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와를속인 뱀을 저주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을 주시고 남자에게는 땀 흘려 수고하는 고통을 주셨다. 땅도 가시 덤불과 엉겅퀴가 나도록 저주를 받았다. 저주라는 주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실 때 다시 한번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 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 와의 명 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신 11'f6-28). 저주는 긍정적인 축복들을 상실하는 것을 훨씬 초월합니다. 궁극적으로 저주에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단절되는 것이 포함된다.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사 "아버지"께 버 림을 받으셨을 때,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단절되셨다. 빛이 사라지고, 예수님은 어둠의 심연에 빠지셨던 것입니다. 저주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재(◎◎)를 어느 정도까지 체험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한의 환상에서는 저주가 제거될 때 두 가지가 즉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분명한 임재이다. 두번째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발적인 섬김이다. 이것은 처음 저주를 초래한 상황과 명백한대조를 이룬다. 저주가 임한 것은 불순종 때문이었다. 저주가 사라지면 더 이상의 불순종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주와 그 원인인 죄가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184 고난과 죽음의 의미 지복 직관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 리라(계 22 : 4). 여기에 천국에서 이뤄질 가장 커다란 소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지복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복직관은 즉각적이고도 심오한 기쁨을 초래하는 일견(-덧)이다. 모든 사람은 바로 그 축복을 위해 지음받았다. 여기서 인간의 영혼을괴롭히는 공허감이 마침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믿음의 삶에 따르는 문제 가운데에서전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섬 기고 경배하라고 부름받은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격언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적용될 때 더민감하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그분의 장엄한 영광을 보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자신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시 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나타나신 구약의 이야기들에서도 우리는 기껏해야 신현(◎똔)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록을 대하게 된다.

 

신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았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구름 기둥을 보았다. 이러한 신현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얼굴에 드리워 있는 베일을 그대로 남겨 두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 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185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 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 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 1-2). 사도 요한은 이러한 지복 직관이라는 주제를 놀란 어조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을 수 있다는사실을 깊이 놀란 어조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양자된 자녀들에게 이러한 특권을 부여하시는 것은 모든 일반적인 범주들을문제시하지 않는 "방식" 또는 종류의 사랑을 반영합니다. 성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자신의 자녀라고 부르시게 만든 것은 초월적인 방식의 사랑이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호칭을 부여받을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그 호칭의 근거들은 우리의 어떤 공로에서도 발견될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근거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보여 주실 수 있는 비상한 사랑에 있는것입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까지 계시되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거울은 아직도 희미하다. 미래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흥분시키는 몇 가지 암시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희미한 ◎의 번쩍임이 어두운 거울을 레뚫는 것처럼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사실이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와 같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그분의 형상으로 치음받았다는 것은 역설로 가득 차 있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신 의도 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도록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형상은 더럽혀졌다.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는 거짓말하는 형상이 되었다. 그 형상은 왜곡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한다는 사실보다 더 인간의 특성을 잘보여 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는 중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 아니신지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하나님의 성품에는 악이라고는그림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죄가 우리에게서 완전히 제거될 때, 우리 하나님의 진정한 형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을 것입니다. 요한은 사건들의 정확한 순서를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우선 청결해져야 하는가? 아니면베일을 벗으신 하나님을 보는 그 체험이 우리를 청결하게 만들어줄 것인가? 나는 어떤 것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전자일 것이라고생각합니다. 팔복에 나오는 예수님의 약속은 다음과 같다. "마음이 청결한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데 필요한 절대적인 조건은 마음의 청결함이다. 죽을 운명의 인간들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이유는 그 인간들 중에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우리의 눈에 있지 않다. 우리의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영광을 입게 될 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그의 계신 그대로 보게" 되기전에 우선 부정한 것들이 우리의 마음에서 완전히 일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루 월리스(Lew Wallace)의 소설을 영화화한 할리우드 영화 "벤허"(Ben-Hur)에는 주인공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의미 심장한장면이 나온다. 우물 옆에 먼지를 뒤짚어 쓴 채 쓰러져 있는 벤허 천국은 어떤 곳인가 187는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다. 카메라는 벤허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한 남자의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가린다. 우리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카메라는 벤허의 얼굴에 계속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남자는그에게 물을 준다. 벤허가 지친 얼굴을 들어 자비로운 이방인을바라볼 때, 우리는 갑작스러운 빛이 그의 얼굴을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의 얼굴에 나타나는 극단적인 변화를 보고,그가 얼굴을 들 때 그리스도의 얼굴을 직접 바라보고 있음을즉시 알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뵐 때, 모든 고통과 고난의 기억이 사라질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영혼도 치유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우리 이마에 기록하실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수(◎)가 그곳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영원히 자혀 줄 지울 수 없는 이름을지니게 될 것이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룻 하리로다또 그가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 지라(계 22 : 5-6상반절).

 

이 말씀은 요한이 천국의 은밀한 방들을 들여다본 것의 절정을이룬다. 다시 한번 그는 모든 어둠이 추방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있습니다.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영원히 빛으로 그분의 자녀들을 덮으실 것입니다. 또한 그분께 속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온전한 기업을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188 고난과 죽음의 의미듣게 될 것입니다. "오너라, 내 사랑하는 자녀들아. 태초부터 너희를위해 예비되어 온 나라를 상속하거라." 이것이 하늘의 선언으로 확증된 약속이다. "이 말은 신실하고참된지라." 이 선언은 현재의 고통과 고난에 관한 우리의 모든 의심을 제거해 준다 우리가 이 생에서 겪고 있는 고난이 하나님께서하늘에 우리를 위해 쌓아 두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도의 비교를 확증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약속이다. 고난이 절대로 헛되지 않다는하나님의 맹세로 봉인되어 있는 것이 이 약속인것입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

 

 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언젠가 인간의 불행의 중요-픈◎ 한요소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발견죈다고 관찰했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달성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생각할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괌을 꿀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상상력이 상상의 나래를 타고 날아 오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상력을 극한대로 몰아갈 때, 우리는 미지의 세계의방벽에 부딪히게 된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누가 상상할 수 있는가?그것은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선다. 우리의 가장 야심적인 꿈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한 현자(◎골)는 만일 우리가 가장 만족스러운 체험을 상상하고영원히 그것을 행하는 데 대해서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가 천국보다는 지옥에 더 가까운 어떤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절대적으로 행복한 상황을 헤아릴 수없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햄릿(Hamlet)으로 하여금 사후의 삶에 대해서 다146 고난과 죽음의 의미음과 같이 선언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신비스러운 미지의 영역이 다. 나그네가 일단 그 경계선을 넘어가면 영영 못 돌아오는 미지의 나라 죽음 다음에 있을 그 뭔가에 대한 두려움이 결심을 흩트리고, 이래서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로 날아가느니 차라리 이대로 현재의 환난을 참게 마련이지 그렇지 않다면 그 누가 힘든 삶에 끙끙대며 무거운 짐을 지고 진땀을 HUf겠는가? 분별심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든다. 햄릿(ffarlfef),

 

3장 1막 우리를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로 날아가기보다는 현재의 사악한 땅에 눌러 있게 만드는 것이 사후의 삶의 알려지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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