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금식

2004.08.30 08:07

윤봉원 조회 수:3397 추천:142

마 9:152004082902

날자: 2004년 8월 29일 주일 오후

제목: 성경에 나타난 금식

본문: 마태복음 9장 15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 성경에 나타난 금식

1) 부분 금식

성경 전체를 통하여 금식은 영적 목적을 위하여 음식을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금식은 정치적 세력을 얻기 위해서나 혹은 어떤 좋은 목적에 주의를 끌기 위해서 하는 단식 투쟁과는 구분된다. 또한 금식은 건강을 위한 식이 요법과도 구분된다. 식이 요법은 음식을 금하는 것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영적인 목적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목적을 위해 하는 것이다.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종종 금식이 허영심에 의하여, 혹은 세력을 얻기 위한 욕망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기도 한다. 이러한 형태의 금식이 반드시 나쁘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 목적이 성경에서 설명된 금식의 목적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성경의 금식은 언제나 영적인 목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성경에 나타난 일반적인 금식 방법은 모든 음식을 금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물을 금하는 것으로는 되어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실 때, "아무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라고 말씀되었다 그리고 금식이 끝나갈 무렵 예수님이 심히 주리셨다고 말씀되었다. 이때 마귀가 예수님께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을 하였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금식이 음식은 금했으나 물은 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눅 4:2~4) 육체적인 견지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금식은 음식을 금할 뿐 물은 금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부분적인 금식이라고 볼 수 있는 금식이 설명되어 있는데, 이 경우에는 식사를 제한할 뿐 음식을 완전히 금하는 것은 아니다. 선지자 다니엘에게 있어서 전적으로 음식을 금하는 금식이 습관으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니엘은 3주간 동안 다음과 같이 한 경우가 나타나 있다.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단 10:3)

다니엘이 이 때에 왜 그의 정상적인 금식을 이행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 길은 없으나, 아마 그의 행정적인 과업이 정상적인 금식을 할 수 없게 하였던 것 같다.

2) 절대 금식

또한 성경에는 음식과 물을 모두 다 금하는 금식, 즉 "절대금식"이라고 일컬어지는 금식이 몇몇 차례 나타나 있다. 이 "절대금식"은 어떤 비상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필사적인 조치인 것 같다. 학살이 에스더 자신과 그녀의 백성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다음과 같이 통보하였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에 4:16).

바울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난 직후에 삼 일 동안 "절대 금식"을 하였다(행 9:9).

인간의 육체는 물을 마시지 않고는 3일 이상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에, 모세와 엘리야가 40일 동안 "절대 금식"을 한 것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신 9:9; 왕상 19:8). "절대금식"은 예외적인 것이므로 하나님의 명확한 명령이 있기 전에는 삼 일 이상의 "절대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금식은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은밀한 일이다. 그러나 단체적인 금식을 하는 특별한 때가 있다. 모세의 율법에서 요구하는 단체적인 연중 금식은 속죄일에 있었다(레 23:27). 이단체적인 금식은 유대인의 월력에 있어서 그 백성들이 죄 사함을 위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날에 있었다(오늘에 이르기까지 점차적으로 다른 금식일이 추가되었는데 결국 금식일은 스무 날이넘게 되었다). 또한 단체적으로나 혹은 국가적으로 긴급한 일이 있을 때 금식이 선포되었다.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백성을 모아 ‥‥‥(욜 2:15-16).

유다가 침략을 받았을 때 여호사밧 왕은 백성에게 금식할 것을 선포하였다(대하 20'1-4).

요나가 심판을 선포하자 짐승을 포함하여 니느웨성 전체가 금식하였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여행을 하기 전에 에스라는 금식을 선포하고 위험한 길의 안전을 위하여 기도하였다(스 8 21-23).

3) 단체 금식

단체 금식은 한마음을 가진 준비된 사람들이 있으면 놀라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교회나 혹은 그밖에 어떤 단체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일치된 단체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치유를 받을 수 있다. 충분한 수의 백성들이 문제의 내용을 올바로 이해할 때 국가적으로 기도와 금식을 선포하는 일은 역시 유익하고 복된 곁과를 가져 올 수 있다.

1756년 영국의 국왕은 프랑스의 침공 위협을 받고 기도와 금식의 날을 선포하였다. 요한 웨슬리는 2월 6일의 일기에서 다음과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금식의 날은 영광스러운 날이었다. 왕정복고 이후 런던에서 보기 드문 날이었다. 런던의 모든 교회가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엄숙함이 깃들어 있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기도를 들으신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의 평온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웨슬리는 각주를 달아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프랑스의 침공 위협을 막을 수 있게 됨으로써 겸허한 행위는 국가적인 기쁨으로 변하였다. 

4) 규칙적인 금식

또한 전역사를 통해서 규칙적인 금식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금식이 발전되었다. 스가랴 시대에 네 가지 규칙적인 금식이 이루어졌다(슥 8:19). 예수님의 비유에서 지적된 바리새인의 교만을 보면 규칙적으로 금식하는 날이 있었던 것을 말해 준다-"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눅 18:12)." 디다케(Bidorar)는 일주일에 이틀, 즉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6세기에 제2차 오를레앙 공의회(the Second Council of Or-leans)에서 규칙적인 금식이 의무적인 것으로 정해졌다. 웨슬리는 디다케의 가르침을 회부할 것을 추구하고 초기 감리교 신자들에게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금식을 크게 중요시하고 그 이틀간 금식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감리교 목회자로 안수하기를 거부하였다.

어떤 사람들의 삶에서 규칙적인 금식이 혹은 매주의 금식이 이렇게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들은 규칙적인 금식에 대한 성경의 명령을 찾아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촉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노력은 허사였다. 성경에는 규칙적인 금식을 명령하고 있는 계명이 없다.

하지만 복음 속에 있는 자유가 방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기회가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매는 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날이든 자유롭게 금식할 수 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자유는 자주 금식을 하는 데 사용되었다(고후 11:27). 우리는 항상 사도 바울의 권면을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갈 5:13).

오늘날 널리 알려져 있는 훈련으로 금식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금식과 비슷한 것이 있다. 그것은 "철야"라고 불려지고 있는데,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고난과 관련하여 "잠을 자지 아니하였다"는 말을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고후 6:5, 11:27).

철야는 기도나 혹은 그 밖의 영적인 임무에 집중하기 위하여 잠을 자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철야가 금식과 어떤 중요한 관계 가지고 있다는 시사는 없다. 만약 철야와 금식이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짧은 기간의 금식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철야가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필요를 위하여 우리들에게 철야를 요구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성경의 관례가 별로 없는 이 일들을 중요한 의무 사항으로 높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모든 훈련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바울의 다음과 같은 경고를 유의하고 올바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골 2:23).

2. 금식은 계명인가

1) 예수님의 산상 수훈에서 언급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는, 성경이 금식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의무로 규정하고 있느냐 하는 사항이다. 이 질문의 해답을 얻기 위한 시도가 많이 있었으나 결론은 아주 다양한 것이었다.

1580년에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는 이 방면에서 고전적인 책이라 할 수 있는 진정한 금식의 거룩한 실행에서 금식을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의무로 보는 답변을 하였다.

금식을 주제로 다룬 대목이 성경에 많이 있지만,그 가운데서도 두 곳이 특히 중요하다.

그 첫번째 대목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금식에 대하여 가르치신 내용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금식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이 헌금과 기도에 관한 교훈의 맥락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헌금과 기도와 금식은 모두 다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교훈에서 헌금이나 기도를 제외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금식도 제외할 이유가 없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금식할 때에 너희는‥‥‥‥(마 6:16)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금식하는 것을 전제하고, 금식을 올바르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 같다.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금식을 배격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도가 아니었다‥‥‥올바른 금식을 회복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도였다. "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명령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그 당시 일반적인 관습을 올바르게 실행하는 일에 관하여 교훈하고 계셨다. 예수님은 금식이 올바른 관습인지 혹은 금식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너희가 금식을 하려면"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너희는 금식을 해야 한다"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2)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답변

금식에 관한 두번째 중요한 대목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 나타나 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질문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금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진술이 바로 이 말씀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새 날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적인 능력으로 그들 가운데 임하였다. 신랑이 그들 가운데 있었다. 이때는 금식할 때가 아니라 잔치할 때였다. 그러나 비록 옛 질서의 율법주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제자들에게 금식할 때가 온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할 때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오늘날의 교회 시대일 것이다. 특히 그 대답에 곧 이어서 나온 하나님 나라의 새 포도주 부대에 관한 예수님의 진술이 그 대답과 미묘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을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렇다(마 9:16-17).

아더 월리스는 예수님이 그의 죽음과 부활사이의 삼 일 동안을 가리키신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 시대를 가리키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월리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그의 주장을 결론 짓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랑을 빼앗길 그날을 오늘날 이 시대로 보아야 한다. 즉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올라가신 때로부터 하늘에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 사이의 시대로 말이다. 사도들이 이해한 바가 분명히 이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승천하기 전까지는 사도들이 금식하였다는 기사를 우리는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행 13:2,3) 우리 주님께서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그때가 오늘날의 교회의 이 시대이다. 그때는 지금이다!

 여기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피할 길은 없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간 후에 그의 제자들이 금식할 것을 기대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그 말씀을 명령의 형태로 하지는 않으셨지만 그것은 언어적 기술에 불과하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금식 훈련을 지지하고,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금식할 것을 기대하셨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예수님이 금식을 명령하시지는 않았기 때문에 "명령"이라는 용어는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은 금식한다는 원리에 의거하여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하나님과 더욱더 친밀하게 동행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이 대목이 마음을 끄는 말씀이 된다.

그리스도의 이 요청에 응답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소위 "값싼 은혜"에 익숙해져서 보다 더 많은 순종의 요청에 대해 본능적으로 물러나고 있지는 않은가? "값싼 은혜"는 제자도가 없는 은혜이며, 십자가가 없는 은혜이다. 예를 들어서 헌금은 그리스도인의 헌신의 한 요소로 의심 없이 인정되면서, 왜 금식은 많은 논란이 되는가?

우리는 분명히 성경에서 헌금에 대한 증거 이상으로 금식에 대한 증거도 가지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풍요한 사회에서 아마 금식하는 일은 헌금하는 일보다 훨씬 더 큰 희생일 것이다.

3. 금식의 목적

예수님께서 금식에 대하여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금식의 동기문제였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마 6:16-18). 좋은 것을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일은 항상 거짓 신앙의 증표가 된다. 우리는 금식과 같은 것을 택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시도록 만드는 데 사용하기가 대단히 쉽다. 금식의 그러한 축복과 이익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약간의 금식으로 하나님을 포함한 온 세상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유혹에 빠지기가 쉽다.

금식은 항상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것이어야 하고 하나님이 정하길 것이어야 한다. 여선지 안나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겨야"(눅 2:36-37: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한다.

금식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안디옥교회의 일단의 제자들이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금식과 주를 섬기는 일(예배하는 일)은 동시에 언급되어야 한다(행 13:2).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가 성전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던 그 시기는 정말로 고귀한 날들이었다. 하늘의 문이 그토록 넓게 열린 적은 없었으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광에 그토록 가까이 이른 적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시대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셨다. "너희가‥‥‥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슥 7:5). 만약 우리의 금식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실패한 사람들이다. 육체적인 유익, 기도의 성공, 능력을 부여 받는 일, 영적 통찰력-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금식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눈을 오직 하나님께만 고정시킨 가운데 하나님을 위하여 금식하도록 하자. 그래서 우리의 의도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데에만 있도록 하자‥‥‥‥‥ 이것이 축복을 주시는 분보다 축복을 더 사랑하는 그 일에서 우리가 구출 받는 유일한 길이다.

일단 이 근본적인 목적이 우리의 마음에 굳게 자리 잡은 후에는, 금식에는 이차적인 목적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자유롭게 알 필요가 있다. 다른 그 어떤 훈련보다도 금식은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형상으로 변화를 받고자 갈망하는 진정한 제자에게 있어서는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유익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속에 있는 것을 음식이나 그밖의 것들로 감추고 있다. 그러나 금식함으로써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이 밖으로 드러난다. 만약 교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면, 금식할 때 그 교만이 거의 즉각적으로 드러난다.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시 69 10).

분노, 원한, 질투, 분쟁, 공포-만약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있다면, 금식하는 동안에 그것들이 밖으로 드러난다. 처음에는 우리의 그 분노는 배고픔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그러나 곧 이어서 우리 속에 분노의 영이 있기 때문에 분노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기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금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마 4:4). 음식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하나로 뭉친다"(골 1: 17). 그러므로 금식할 때 우리는 음식을 안 먹는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잔치를 하는 것이다. 금식은 잔치이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먹을 것을 가져 왔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2, 34) 이것은 멋진 은유가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의 능력을 먹고 사셨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에서 금식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하신 것이다.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실제로 우리가 슬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먹고 있다.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내린 만나를 먹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다.

금식은 삶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근본적이 아닌 것들을 우리의 삶에서 우위에 놓는 일을 시작하기가 대단히 쉽다. 우리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갈망한 나머지 결국은 그것 들의 노예가 되어 버린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전 6:12). 우리 인간의 갈구와 욕망은 제방을 넘어 흐르는 경향이 있는 강물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금식은 그 갈구와 욕망이 올바른 길로 흐르도록 돕는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 9:27).

또한 다윗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시 35:13). 이것은 금욕주의가 아니라 훈련(단련)이다. 훈련이 자유를 가져다 준다.

4세기에 아스테리우스(Asterius)는, 금식이 영혼을 제어하는 것에 대하여, 위장이 몸을 주전자처럼 끓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비유하여 말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금식의 가치에 대하여 글을 썼다. 거기에는 중보 기도의 효력 증대, 결정을 위한 인도, 집중력 증대, 속박에서의 구출, 육체적 평안, 계시 등이 있다. 여기서도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열심으로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상급을 기대할 수 있다.

[리챠드 포스트의 영적 성장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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