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대한 지식

2003.08.09 17:08

윤봉원 조회 수:2478 추천:147

사 40:12-312003081001날자: 2003년 8월 10일 주일오전
제목: 하나님에 대한 지식
본문: 이사야 40장 12절 – 31절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1. 하나님의 위대하심

오늘날에는 거의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기적 같은 사건들이 성경 내용 중에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삼손이 한 것처럼 나귀 턱뼈 하나로 일천 명을 죽였다는 사람에 관한 신문 기사가 보도된 일은 없다. 또한, 물 위에 뜬 도끼 자루라든가, 한 가족이 한 줌의 밀가루와 작은 병 하나에 든 기름으로 여러 달을 살았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이러한 사건들이 재미는 있지만, 너무나 오래되고 또한 현실과 동떨어져 보여,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것들이 오늘날에는 실용적 가치가 별로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성경이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인한,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이야기들이 당신과 나와 같은 실제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실제 사건들에 관한 참된 기록임을 믿는다.

2. 하나님께서는 한다면 하시는 분

구약성경에 기록된 놀라운 기척들 가운데 유대인들에게 가장 엄청난 기적은 홍해를 건넌 사건이다. 하나님깨서는 자신의 영광을 보이시고, 바로의 군대를 몰살시킬 목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와 애굽의 군대사이에 끼여 오도 가도 못할장소로 이끄셨다. 성경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에게로 질주해 오는 바로의 정예군을 보고 무서워 떨며, 왜 자신들을 광야로 불러내어 죽게 하느냐고 모세에게 심하게 불평한 사실을 알 수 있다(출 14장).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원 된지 몇 날이 못되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을 부리던 주인들이 추격해 오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해 보면 그들이 처했던 난관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이러한 위험에 처했다가 나중에 기적적인 구원을 경험하게 되었다면 어떠한 감정이 마음에서 솟구치겠는가? 홍해가 갈라져 길이 되고, 당신과 다른 이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 마른 땅 위를 걸어서 건넌다고 상상해 보라. 물이 위로 솟구쳐 올라 벽이 된 그 사이로 바다의 밑바닥을 밟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어느 순간에 물로 된 그 벽이 무너져 내리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 것이다.

마침내, 바다 건너편에 도착한다. 그리고 뒤를 보니 애굽인들이 뒤따라오는 것이 보인다. 갑자기 갈라졌던 바다가 닫히고 군대가 모두 바다에서 익사하는 것을 목격한다. 불과 몇 시간만에 당신은 두려움, 불안, 실망, 흥분, 그리고 엄청난 안도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당시 그 엄청난 사건을 통해 경험했던 것은 단순한 안도감이나 득의 만면한 감정 이상의 것이었다.

성경 말씀을 보자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 14:31).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였다. 이러한 경외심은 자신들을 추적해 오던 애굽의 군대를 보고 느꼈던 두려움이나 공포와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나타난 것을 보고 일어나게 된, 일종의 공경심에서 나오는 경외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다

출애굽기 14:31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함과 동시에 그분을 믿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그분을 믿는 것은 상호배타적 개념이 아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구원한 하나림의 놀라 우신 능력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그분을 믿을 수 있었다. 애굽인들도 목격했듯이, 하나님의 그 능력은 능력 그 자체를 나타네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함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편 6-11절 말씀들을 통해서 주어지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과를 경외할지어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 말씀들은 먼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을 높이고, 나중에 민족들을 다스리시는 그분의 주권을 찬양한다. 이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경외하라는 권고를 듣게 된다.

우리가 이럿게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과 민족들을 다스리시는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나오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데하심을 확신하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을 두려워하고-경외하게되고-또한 그분을 믿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그분을 믿는 것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파 그분을 믿는 것은 상호 비례한다.  

4.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1) 손바닥으로 온 바닷물을 담으시는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 보여 주신 엄위 하심을 위대한(great), 또는 위대함(greatnes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말한다. 모세는 홍해를 건넌 직후에 지은 노래에서, "주께서 주의 큰(위대한)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니이다"(출 15:7)라고 말했다.

모세는 또한 여호와를"크고 두려운 하나님"과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으로 일컫고 있다(신 7:21, 10:17). 시편도 이 말을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나타내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시 96:4). 모든 자연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묘사하고 있는 시편 104편은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라는 감격의 외침으로 시작하고 있다. 시편 150:9 말씀은 우리에게 "그의 능하신 핼등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 할지어다"라고 명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한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라"(시 145:3) 한마디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무한하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격려하고 있는 구악성경 말씀 중 하나는 이사야 40:13-31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씀에는 수사학적인 질문들이 제기되고, 창조와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함을 모사하는 비유들이 나온다.

또한 이사야는 인간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표현들로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은데도 마치 손으로 무엇인가를 측량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신인동형론적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사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자신을 계시하심을 보여 주는 본보기들이다.

이사야의 질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랴?"(40:13) 하나님께서는 그 손바닥 안에 대양의 모든 물을 담으실 수 있을 정도로 크신 하나님이시다. 우리 인간은 우리 손바닥에 담을 수 있는 물의 양 1티스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지구의 3분의 2이상이 물로 덮여 있으며,장소에 따라서 그 깊이는 10킬로미터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지구를 덮고 있는 물의 양은 계산할 수도 없다. 심지어 우리가 그 양을 갤런으로 짐작한다 해도, 그 수치는 우리의 이해의 한도를 넘어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대양의 모든 물을 손바닥에 담으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측량할 수 없는 차이를 보게 된다.

이것은 바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벌어져 있는 무한한 간극이다. 대양의 모든 물과 겨우 티스푼 하나 정도의 물이라는 드라마틱한 대조는, 우리는 얼마나 작으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크신지를 보여 준다.

2) 뼘으로 하늘을 재시는 하나님

이사야가 웅변적으로 던지는 두 번째 질문은 "누가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랴'이다 한 뼘이라고 하는 것은 손가락을 완전히 펼쳤을 때, 엄지 끝에서 새끼손가락 끝까지의 거리를 말한다. 성경 시대에 변은 길이를 래기위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단위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내 뼘을 재어 보았는데 그 길이는 20센티미터를 약간 넘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크신 까닭에 뺌으로 하늘을 '재신다. 실제로, 우리는 우주의 길이를 잴 수 없다.

우리는 태양 이외에 가장 가까이 있는 별까지의 거리를 빛의 속도로 4년 반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빛은 일초에 3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움직이므로, 가장 가까이 있는 별까지의 거리는 41조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는 결론이 된다. 숫자로 이것을 표현해 보면, 41,000,000,000,000이 된다. 가장 가까이 있는 별까지의 거리가 이 정도다! 그러니 전 우주의 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치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뼘으로 그 거리를 잴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두 가지 측량 수단을 언급함으로써, 즉 사람의 손바닥과 뼘이 나타내고 있는 작다는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전 우주를 우리가사소한 물건을 다루듯이 다루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욥기 26장 14절은 자연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에 관해 말씀하고 있다.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 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 이 말씀대로 우리가 피조 세계의 모든 젓을 헤아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는 그것이 그의 행하신 일 가운데 지극히 미약한 것에 불과하고, 단지 미 세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3) 땅과 티끌과 산들을 재시는 하나님

이사야는 계속해서 말한다. "누가 땅과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7•'. 명칭"이란 문자적으로 "3분의 1단위"를 나타낸다. 가령 예를 들면, 오늘날 우리가 쿼터라는 척도로 1갤론의 4분의 1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매우 작은 양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크셔서 땅의 모든 흙을 그러한 용기로 잴 수 있으시고, 산들을 저울에 달듯이 잴 수 있으시다는 것이다.

온 세계에는 알프스든, 히말라야든, 로키산맥이든 이것들은 모두 그 웅장함과 크기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모두 저울에 올려 다신다. 대양이나 하늘이나 산,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이것들을 재는 일은 하나님께는 시시한 일이다. 손바닥이나, 뼘이나, 저울과 같은 이미지들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측량하는 일을 쉼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사야는 자연에 나타나 있는 위대한 것들, 즉 괄먼는 바다, 무한히 광활한 하늘, 웅장한 산봉우리들을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이것들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과 비교할 때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이러한 진리들을 더욱더 생각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엄위하심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 열방의 한 통의 물같이 여기심

이사야는 또한 하나님께서는 세상 나라들보다 우월하시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분의 위대하심을 보여 주고 있다.

“보라(확실히) 그에게는 열방은 통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15절)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속하겠고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16절)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17절).”

15절 말씀이 ‘확실히’라는 강조어로 시작되는 것을 주목하라(한글 개역』경에는 "보라'로 되어 있음). 이 말은 바야흐로 이사아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역본들은 보라라는 명령어로 번역하여 관심을 집중케 한다. "이것을 생각해 보라"는 말로도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는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고자 한다. 그갸 바야흐로 말하려고 하는것이 너무나도 믿을 수 없는 일이기에 멈추어 깊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하나 님 앞에서 세상 나라들이란 톳에 들어 있는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라! 세상에서 가장 힘있는 나라들을 모두 모아 놓는다 해도 하나님께는 통에 있는 한 방울의 물, 또는 (어떤 역본들의 번역에 따르면)통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는다. 한 통의 물이라면 상당히 많다고 하겠지만, 한 방울의 물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극 소량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 나라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5) 땔감 정도에 불과한 레바논 백향목

다음에 비교되고 있는 것은 훨씬 더 엄청나다. 하나님께서는 세상나라들을 저울에 있는 티끌처럼 여기신다. 여기에서 저울이란 과학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천칭(접시 저울)을 말한다 성경 시대에는 이것을 일상적인 거래에 사용 했다. 저울의 접시에 묻어 있는 먼지 정도는 중량을 잴 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한마디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식품점에서 과일이나 채소를 살때 계산대에서 점원에게 "내가 산 것을 달기 전에 저울에 묻어 있는먼지를 닦아주세요. 먼지 값을 지불하고 싶지 않거든요"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러한 데까지 신경을 쓴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먼지의 무게는 지극히 사소한 것이고 중량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하나님께 있어서 세상의 나라들은 이러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수준에서 볼 때 세상 나라들은 나름대로 상당한 위용을 지니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세계적인 제국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위대한 나라들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들보다 무한히 크시다. 하나님 앞에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나라들도 통에 있는 한 방울의 물이나 저울에 붙은 먼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나라들에 관한 비유가 16절 말씀에 또 묘사되어 있다. “레바논의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세상 나라들의 세력이 아니라, 그 나라들이 가지고 있는 천연 자원이다. 레바논이 그 본보기로 선택되었다. 이사야 당시에 이 지역은 울창한 삼림으로 유명하였다. "레바논의 백향목"이라는 말은 널리 알려져 있는 표현이었다.

예를 들면, 시편 93:12에는 "의인은‥‥‥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용하였다. 레바논의 나무들을 자른 후 뗏목 형태로 이스라엘 해안선을 따라 운송했는데 한 번에 일만 명씩 교대로 파견되어 이 일을했다(왕상5:8-14). 하지만 이사야는 레바논의 모든 나무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단의 화목으로 사용한다 해도 그분의 위대하심과 엄위하심을 위해서는 불충분하다고 말한다.

6) 아무 것도 아니며 빈 것 같은 세상

17절 말씀에서, 이사야는 하나님과 세상 나라들을 한층 더 현격하게 대조시킨다. 하나님 "앞에서"-하나님과 비교할 때-세상 나라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없으며", "빈 것" 같을 뿐이다. 아무것도 아니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없는 것 같다는 말은 그 개념을 보다 강화한다. 빈 것 같다는 말은 의미나 목적에 있어서 완전히 무가치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과 비교할 때, 세상 나라들이란 이 정도밖에는 안 된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존재케 하시고, 그것들의 존재를 전적으로 통제해나가시는 창조자이시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치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행 17:36) 비교의 목적은 세상나라들을 깔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말하기 위함이다. 이사야는 자연과 하나님을 비교해서 말한 것처럼, 세상 나라들과 하나님을 비교하여 말한다. 세상 나라들의 세력을 한데 모아 놓으면 진실로 위대하겠지만, 하나님과 비교할 때는 없는 것 같고 무가치한 것일 뿐이다.

7) 셀 수 없는 별, 셀 수 없는 이름

다시 한번, 이사야는 우리의 눈을 창조 세계로 돌리게 한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 빠짐이 없느니라(26절).

하나님께서는 별들을 창조하시고, 그 각각의 이름을 부르신다. 그리고 별들이 정해진 진로를 따라 움직이게 하신다.

천체 물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하늘에는 모두 천억 개의 은하계가 있고, 하나의 은하계는 각각 천억 개의 별들을,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천억 개의 천억 배의 별들이라니! 하지만 성경은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시 147:4)라고 말한다.

땅 위에는 현재 60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고, 우리 중에는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므로 대략 30억 정도의 다른 이름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이름들을 모두 외우는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천억의 천억 배에 해당되는 그 별들의 이름을 부르신다.

우리는 별들이나 별자리,은하계 등에 대해서 기껏해야 몇 가지 이름들, 예를들면, 북극성, 오리온,은하수 등과 같은 이름을 부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들 모두의 이름을 부르신다. 이뿐만 아니다. 그분의 위대하신 능력과 권세로 인하여 그것들 가운데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신다. 그것들은 성자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에 의해서 유지되는 "만물"에 속한다(히 1:3).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주권과 권능을 나타내는 이러한 말들을 통해서, 이사야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느끼게 한다.

5. 하나님을 더욱 믿기 위한 노력

지금까지 한 말의 요지는 무엇일까? 그 대답은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사 40:18),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사 40:25)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함과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분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고, 또한 이해하기를 원하신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가 처한 어려운 상황이나 문제들 혹은 우리 주변 사회에 있는 문제들과 비교하려 든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과 문 제들을 비교함으로써 그것들이 하나님보다 더 큰 것처럼 착각한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괴기가 없다고 불평하자 경솔하게도 그러한 비교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루가 아니라 한달 동안 신물이. 날 때까지 고기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모세는 회의적이었다.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대 주의 말씀이 일 개월간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들을 위하여 양떼와 소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길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21-12).

모세는 하나님을 그들의 상황, 곧 고기가 보이지 않는 광야의 상황과 비교하여, 하나님을 부족하게 생각하였다. 애굽에 임했던 열 가지 재앙을 목결하고,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넜으면서도 최소한 그 순간 만큼은 모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믿지 않았다.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들어보자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11:2.1)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이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수사학적 질문이다 그 대답은 물론 "아니오"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도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창 18:14)고 물으셨다. 하나님께시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입을 빌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렘 33:37)고 말씀하셨다. 그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고 했다.

시편 50:21에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우리와 같은 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아마도 우리와 같거나 조금 다른 정도로 하나님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즉 우리는 약간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좀더 많은 힘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도 어떤 상황을 처리해 나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조금 더 잘 처리하실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수준에 한정시킨다.

이사야 40장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에도 한정되지 않으신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자족하시는 하나님과 사람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단지유한하고, 제한되며, 죽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그 무한한차이를 명심해야 한다. 이사야 40장 말씀은 이러한 관점을 갖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홍해를 건넌 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기억하라. 여호와의 위대하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 후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믿었다.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비례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권능과 피조 세계에 대한 그분의 주권에 압도되어 그분을 얼마나 경외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사야 40장과 같은 성경말씀들을 자주 묵상할수록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믿는 일에 유익할 것이다.

6. 소중히 여겨야 할 하나님의 엄위하심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경외감과 최고 공경심으로 가득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 모든 생명, 모든 지성, 모든 지혜, 모든 능력, 모든 선, 그리고 모든 행복의 다함이 없는 원천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행 17:25)이시고,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섞물"(약 1:17)이 그분에게서 나온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8)는 말씀은 참으로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 각자는 다윗과 함께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시 31:IS)라고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단 4:17) 분이시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 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롬 11:36)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말씀과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엄과 탁월하심과 같은 완전하신 그분의 속성들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뼘으로 하늘을 측량하신다는 사실을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

바다나 호수를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손바닥에 담으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동네를 빠져 나와 드라이브 하다가 우리 도시 위로 치솟아 있는 산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산을 천칭에 달아 중량을 재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제4장‥‥데교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하니님 81이 필요하다 성경은우리를 위해서 창조 세계를 해석하고 있고, 창조 세계는 성경의 진리를 예증한다. 시편 19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계시의 두가지 측면을 아름다운 시로 그리고 있다.

”여호와여 주와 같은 자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인하여 크시니이다 열방의 왕이 시여 주를 경외치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이는 주께 당연한 일이라 열방의 지혜로운 자들과 왕족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음이니이다(렘 10:6-7).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위엄을 묵상함에 있어서, 우리가 가진 능력을 모두 발휘하여 분의 위대하심을 헤아린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을 다 헤아릴 수 번다는 정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진실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무한히 엄위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쁨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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