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반쪽 순종과 니느웨의 온전한 회개

2012.01.20 09:56

윤봉원 조회 수:1889 추천:48

욘 3:1-1020110117제3강 요나의 반쪽 순종과 니느웨의 온전한 회개(찬송 357장)
본문: 요나 3장 1절 - 10절
1. 과연 잘한 것은 내 탓이고 못한 것은 조상 탓일까?
한국 속담에 우리의 일반적인 고정관념적인 잘못을 지적해 주는 좋은 속담이 있다. “잘한 것은 내 탓이고 못한 것은 조상 탓이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는 세상 말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피조물된 성도들이 세상 기준 이하에 못 미치는 생각과 행동들을 많이 하는 것 같아서 마음 아픈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나 또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자백(自白)한다.
나로 말미암아 어떤 놀라운 결과물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내가 뭔가 노력을 열심히 했더니 이런 결과가 왔다고 자랑하고픈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여기에 있는 여러분은 그런 적이 없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다른 사람 탓하기 바쁜 것이 우리의 현주소(現住所)가 아닌가요? 과연 우리는 우리가 현재 맞이하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돌아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2. 요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신 하나님(말씀하시는 하나님)(1-2)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욘 3:1-2)
하나님은 처음 말씀하셨을 때는 요나에게 무시와 면박(面駁)을 당하셨지만, 또다시 요나에게 니느웨성에 가서 회개의 복음을 외칠 기회를 주셨다. 하나님은 그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다른 선지자를 대신 보내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선적 관심은 요나를 통해 하실 사역이 아니라 요나 자신의 변화를 기대하셨던 것이다. 요나는 자신이 가졌던 편협한 민족주의와 왜곡된 선민주의에 사로잡힌 자신이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할 백성이었다. 불순종한 선지자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 사명을 맡기심으로 니느웨 백성의 회개와 요나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돌아서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택자와 불택자 모두에게 공평히 사랑하시고 인자하신 분이심을 깨닫게 해 주신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지난날에 내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엉뚱한 길로 갔음에도 다시 기회를 주셨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다릅니까? 나에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려고 사명을 주신 것을 기억함으로 이제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충성스럽게 순종생활을 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또다시 일에 묻혀서 나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내 갈 길(My way) 길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3. 절반의 순종 전파(3-4) → 절반의 순종은 불순종이다!! 따라서 우리는 온전한 순종의 복음 전파가 되어야 함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 일 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욘 3:3-4)
하나님의 이차 명령을 전달받은 요나는 겉보기에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니느웨로 향한 것처럼 보인다. 그가 과연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했을까? 어떻게 보세요? 온전히 순종함으로 니느웨 성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까요? 그렇지 않은 면이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유심히 관찰해보고 명확히 파악할 것이 하나 있다. 니느웨성은 2절에 몇 일 걸려야 다 걸어갈 수 있는 성이라고 했나요? 그 성을 가로지르는 데만 사흘이 걸리는 큰 성읍이었다.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 최후의 동방(東方) 수도였다. 티그리스 강 동쪽 유셀 강의 합류점에 있는 현재의 모술(Mosul)의 대안에 있었다. 메소보다미아 지방에 있어서 최고, 최대의 성읍 중 하나였으나, BC 612년의 함락 이후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앗수르어로는 `Ninua' 또는 `Nina'라고 한다.
이 큰 성읍에 도착한 요나는 단 하룻길만 걸은 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게다가 그의 선포에는 죄의 지적이나 용서의 가능성 없이 단지 40일 후에 무너진다는 심판의 메시지만 전달하였다. 이러한 그의 전파의 핵심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에 초점이 맞춰진 설교였다. 겉으로는 순종했지만, 속마음은 1장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음을 지각하고 조심해야 한다.
요나는 삼일은 다니며 전해야 할 니느웨 성에 하루 삐쭉 가서 전하면서 하나님의 용서(容恕) 가능성은 언급하지 않은 채 40일 후에 닥칠 심판만 전했다. 용서와 사랑이 없는 심판(審判)은 반쪽복음이다. 아멘!!! 그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아니라 니느웨에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을 전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과 자기 주장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한 메시지만 가지고 은근히 자기 주장을 하였다. 그래서 회개를 위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파하지 않고 멸망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만 전했다.
오늘날도 이처럼 하나님의 의도와 다른 메시지가 강단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에 두렵다. 하나님이 의도한 메시지만 깨달아서 바르게 전해야 함에도 그것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전반적으로 보면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데서 일어난다.
여기서 우리가 확실하게 받을 교훈은
모든 절반의 순종은 불순종이다. 모든 절반의 순종은 불순종이다.
혹시 우리도 우리의 겉모습과 속마음이 전혀 다른 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겉과 속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하는 질문이다!! 만약 이런 사람이라면 참으로 진실(眞實)한 사람이다!!
4. 회개에 동참한 니느웨(5-8)
1-4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요나의 복음 전파에는 온전한 순종의 전파도 아니요 좀 더 심하게 본다면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심판 메시지 전파였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니느웨성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 3:5~8)
니느웨는 일부 지역에 그것도 부분적으로 전해진 메시지 앞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선장과 선원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했던 것처럼, 니느웨 백성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회개) 어른 아이,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남녀노소(男女老少) 할 것 없이 모두가 회개운동에 동참했다. 요나가 성의 없이 던진 메시지가 사람들 마음속에 파고들었고, 큰 성읍 전체를 관통(貫通)하여 심지어 궁정에까지 이른 것을 보고 요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를 통하여 전달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信賴)했다. 그들은 40부터 0까지 재깍거리며 가는 예언적(豫言的)인 메시지의 시한폭탄(時限爆彈)을 기다리지 않고 즉각적으로 그들의 파멸을 피할 수단을 강구(講究)하여 서로 서로에게 애통해하도록 강권했다.
뒤늦게 백성의 분위기를 파악한 왕은 권세자들이 보통 그렇듯이 백성의 반응을 공식화한다. 짐승들도 사람들의 금식에 참여하고 베옷을 입혀야 한다는 취지의 법령이 공포되었다. 이와 같은 극단적인 조치들을 시행하는 가운데 열렬한 기도가 도성에 울려 퍼졌다. 약소국의 선지자 요나의 무례하고 불편한 메시지를 믿기지 않을 만큼 즉각적으로 받고 반응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를 정리해보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거나 들을 때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그때마다 니느웨성 사람들처럼 전국민적으로 회개에 착수하고 회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우리가 받은 말씀과 약속은 얼마나 분명합니까? 그럼에도, 그 어떤 방향 전환도 회개도 찾아볼 수 없다면 우리는 더더욱 심판받기에 합당하지 않을까요?
또 니느웨성 사람들이 놀랍게 회개 역사가 일어난 것은 요나가 최선을 다해서 회개의 메시지, 회복을 위한 메시지로 전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놀라운 회개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은 분명히 요나의 헌신을 통한 결과가 아니다. 아멘!! 이는 온전히 하나님이 이방인인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개의 놀라운 역사에 대해서 요나가 칭찬받을 것이나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또한 이와 같은 일들이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 주변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때에 나로 말미암은 상급의 결과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전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어떤 부럽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 아멘!!
또 한 편으로는 오늘날도 부족한 우리가 전하더라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며, 특히 우리는 요나와 같은 자세로 전하지 말고, 온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주의 충성된 종들이 되어 전하는 우리와 받는 모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린 니느웨 백성(9) →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욘 3:9)
‘누가 알겠느냐?’ 니느웨 왕에게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유와 주권을 인정하는 고백이 흘러나왔다. 이는 이방인 선장과 선원들(1:6.14)의 고백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이 요나의 메시지에서 하나님 용서의 기능성을 듣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회개했으니 구원받을 거라는 공식에 기대지 않고 마땅히 할 일을 한 후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린 것이다.
특히 “누가 알겠는가?”라는 고백 속에서 우리는 선민불패 공식 속에 갇혀 하나님을 제한한 요나와 달리 그들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자신들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나가 탓던 배의 선장처럼(1:6) 왕은 이 조서를 내리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치들을 성심(誠心)성의(誠意)껏 하기는 다했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9). 이 점은 요나와 전혀 대조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왕은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고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자신들이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죄에 대한 형벌이 도저히 이해 하기 힘들 정도로 가혹하다면, 왕은 요엘이 전했던 대로(욜 2:13-14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욜 2:12~14)
) 하나님이 처벌보다는 자비를 더 기뻐하신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그들이 마음과 행실을 고쳐먹는 모습을 보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정해진 시간이 다가오는 동안 숨을 죽였다.
이를 통하여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도 우리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죄악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 있다면 즉시 죄를 실토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죄에서 돌이킨 후에는 니느웨성의 왕처럼 잠잠히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주권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아멘!!
6. 니느웨 사람들이 돌아서자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10) → 내가 구원받고 살아가고 있음에 무한 감사해야 한다!!
요나의 기대와 달리 니느웨가 ‘돌아서자’, 하나님도 니느웨성에 내리시려던 준비된 재앙을 바꿔 ‘돌아서셨다’. 이방인인 선장과 선원, 니느웨 왕과 백성뿐 아니라 선지자 요나까지도 하나님의 이 ‘돌아섬’의 은혜가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다. 정해진 길을 따라서 가시는 편협한 신조(信條) 속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반응에 따라 기꺼이 마음을 바꾸시고 결정을 번복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자비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시다!! 할렐루야!!
 인간의 반응에 따라 기꺼이 계획을 바꾸시는 주권자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 때문에 선원들도(1장), 요나도(2장),니느웨 백성도(3장), 그리고 오늘 우리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가 살 길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자비와 주권을 인정하는 겸손뿐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주님만을 위해 살지 않았던 악한 길, 굽은 길, 타락의 길, 복 없는 사람의 길, 죄로부터 철저하게 돌아서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요 할 일이다. 아멘!!
7. 언제든지 자신의 뜻을 온전히 부인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라. 누가 전하든지 올바른 말씀은 사람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주인공이 되라.
3장 본문의 핵심 단어는 ‘돌이킴’이다. 요나의 성의 없는 선포만으로도 니느웨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자 하나님도 뜻을 돌이켜 재앙을 철회하셨다.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 23:1-3)
우리도 우리가 깨닫는 죄는 어떤 죄든지 돌아서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내 마음에 드는 목사나 선생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원수 같은 사람,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전하더라도 듣고 고치고 실행해야 한다. 그렇게 살기로 작정하십니까?
아울러 우리는 우리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결과를 보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행위와 다르게 전적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어떤 결과가 일어나더라도 항상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아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 16:18)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잠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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