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즐거움의 하나님

2010.08.19 11:57

윤봉원 조회 수:1704 추천:68

시 43:1-52010081833

날자: 2010년 8월 18일 수밤
제목: 기쁨과 즐거움의 하나님
본문: 시편 43편 1절 -5절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1. 형편이 어렵고 이해가 안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형편이 어렵고 이해가 안 될 때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고 있는가 돌아보자. 한 번 나눠보자. 오늘도 신문에서는 이건희 회장의 조카 이재찬씨가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매일 43분만에 한 명씩 자살한다는 통계가 있다. 우리도 형편이 어려우면 자살해야 할까요? 아니면 인생을 포기하고 흥청망청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 해답을 찾아보고 하나님이 교훈해 주는 대로 살아가는 성경대로의 주인공이 됩시다.
2. 시인의 고백과 간구
2.1. ‘어찌하여’
시편 42편과 43편은 서로 이어지는 한편의 연작시이다. 시인은 축복보다도 하나님을 바랐다. 물질을 구하지도, 건강과 장수를 구하지도, 자녀의 성공이나 사업의 형통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하나님뿐이었다.
‘하나님이여, 나의 옳음을 판단하시고 매정하게 나를 무고하는 자들을 거슬러 변호해 주소서. 거짓밖에 모르는 악인들에게서 이 몸을 구하소서. 나의 요새이신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옵니까? 이 몸이 원수에게 짓눌려 슬픈 날을 보내다니 이것이 어찌 된 일이옵니까?’(공동번역 1-2절)
시편 기자는 42장에서 자신의 영적 목마름(42:1-2)과 원수들의 조롱과 압제(42:9-10)에 대한 이중적 애통을 하였다. 이제 그의 애통이 기도로 바뀌었다. 담대하게 주님에게 나아간 것이다. 시인은 ‘나를 판단하여 주십시요’와 ‘나를 변호하여 주십시오’라는 말이 병행을 이룬다. 원수로 인하여 자신이 곤란한 지경에 이른 것에 대하여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개입을 구하고 있다(참조. 시 7:8; 9:4; 26:1). 시편 기자를 괴롭힌 자들에 대해서 그는 ‘간사하고 불의한 자’라고 정의한다. 이의미는 비방하고 중상모략하며 명예를 훼손하는 자들의 특징을 묘사해 줄뿐 아니라 이들의 무기를 말해 준다. 이들은 한마디로 사악한 거짓말쟁이들이다.
2절에서 시편 기자는 간청의 근거를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라고 제시한다. 여기에서 ‘나의 힘’은 “나의 요새” 혹은 “나의 피난처”를 뜻한다(시 31:4; 37:39; 삼하 22:23; 겔 24:25). 시인은 인생의 위기 때마다 하나님에게 피하여 구원을 받았다. 그와 하나님 사이에는 변함없는 언약관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찌하여’를 반복하며 애통해한다.
‘어찌하여’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hM'l'”(라마), 영어로는 “Why?”이다. 시편에는 이 ‘어찌하여’라는 탄식이 참 많이 나온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2절).
우리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내 삶이 꼬여 몹시 힘겨울 때, 어려운 일이 엎치고 덮칠 때 흔히 ‘어찌하여’하고 부르짖는다. 내 스스로 문제와 고난을 해결 할 수 없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따라서 모든 인생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기에 우리의 탄식은 그만큼 더 처절하고 절박할 수밖에 없다.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내게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하여’란 결코 불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의뢰하고 믿기 때문에 탄식하며 더 간절히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숱한 믿음의 선진들도 다 이렇게 ‘어찌하여’하며 탄식하다 주를 만났다. 따라서 우리도 지금의 형편이 어렵고 꼬인다고 좌절 낙망해서도 안 되고 너무 빠른 답을 구하는 것도 금해야 한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간절히 부르짖고 기다리는 인내가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이다. 우리의 탄식이 깊을수록 우리와 하나님과의 만남도 깊어진다.
2.2.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고 감당이 안 될 때 시인이 원하는 것은 주의 빛과 진리였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3절). 시인은 자신들의 조상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듯이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주님은 지금도 주의 빛과 진리, 즉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아멘!! 이 자리에서 예배 드릴 수 있도록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신 분도 주님이시다. 아멘!
그런데 시인은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거룩한 산’이란 ‘시온 산’, ‘주께서 계시는 곳’이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그렇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는 언제나 우리를 성산과 성전으로 인도합니다. 예배가 있고, 찬송이 있고, 기도가 있는 성소, 그곳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2.3. 기쁨과 즐거움의 하나님!!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43:4)
이 본문을 개정개역은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4절)로 번역하였다.
‘극락의’로 번역한 그락은 히브리어로 “lyGI”(길) 즉 “기쁨, 즐거움”이라는 단어와 “hx'm.fi”(쉬므하) 즉 “즐거움, 유쾌함”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극락의 하나님’으로 번역한 개역은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즉 시인은 자신에게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돌아보자. 시편 기자처럼 기쁨과 즐거움의 하나님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를 아주 힘들게 하고 괴롭혀서 못살게 구시는 하나님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쁨과 즐거움의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믿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사실은 내가 아직 하나님과 코드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렇게 하나님을 정상적으로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은 자기 속의 “욕심”이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3~17)
그래서 시인은 기쁨과 즐거움의 하나님 제단에 나아가 예배하고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해달라고 간구 한다. 수금은 시편의 예배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악기이다(시 33:2; 49:4; 57:8 등). 시인은 궁극적으로 성전예배에 동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자신을 돌아보자. 이 시인처럼 하나님을 기쁨과 즐거움의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믿고, 이 하나님 예배하는 것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가? 이 시인처럼 예배 가운데서 가장 큰 기쁨을 누리는 중인가? 오늘 우리에게도 가장 시급한 것이 바로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이다. 감격이 사라지면 예배도 형식적이며 지루한 종교의식이 되고 만다. 온갖 기교와 장치와 현란한 기악 연주가 있다 할지라도 정작 은혜와 감격은 실종되고만 예배가 된다. 이렇게 예배가 죽으면서 오늘 우리의 인생도,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신령과 진정으로’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요 4:2). 그렇다면 ‘신령’과 ‘진정’이란 무엇일까요? 신령(Spirit)은 성령을 가리키고, 진정(Truth)은 진리를 말씀한다. 즉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예배,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서 예배하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이다. 아무리 달콤한 소리로 재미있는 설교를 하고 사람들이 은혜 받았다며 찬사를 보낸다 할지라도 성령의 임재가 없는 예배, 성령을 따라서 예배하는 예배가 아닌 것을 받지 않으시겠다는 선포이다. 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충실한 설교가 아니면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가 될 수 없다. 오직 기쁨과 즐거움의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성령과 진리를 따라서 예배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 인생이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살아갈 길임을 이 시는 교훈해 준다.
3. 기쁨과 즐거움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감사하고 찬양하라!!
5절에서 시편 기자는 결론을 짓는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3:5)
시편 기자는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자신, 풀이 죽어 있고 불안해하는 자신을 향하여 하나님을 기다리라. 나를 구원해 주신 분, 기쁨과 즐거움의 하나님 그를 찬양하라고 선포한다. 우리 성경에서 ‘찬송하리이다.’로 번역된 “hd'y"”(야다)는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다. 따라서 이 기자는 자신을 돕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자기의 형편이 어렵다고 원망 불평, 좌절, 낙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고 찬송하겠다는 고백이요 선포이다. 앞에서는 애통의 애통의 배경을 이야기 했지만 이제는 기도의 배경 속에서 희망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것에 대한 확신에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지금의 현실이 낙심되고 불안한 현실이라 할지라도, 또 앞으로 어떤 불안하고 낙심되고 이해가 안되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어찌하여’라고 소리치고 싶은 슬픈현실이라 할지라도, 왜 하나님인 나를 버리셨나?라고 믿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시편 기자처럼 “성령과 진리를 보내 주셔서 인도해 주세요! 기쁨과 즐거움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겠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겠습니다! 내 얼굴을 도우시는 기쁨과 즐거움의 하나님을 찬송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승리하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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