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올바른 건설구원관

2004.02.06 23:19

윤봉원 조회 수:1784 추천:142

약 4:13-172004020801날자: 2004년 2월 8일 주전
제목: 올바른 건설구원관
본문: 야고보서 4장 13절∼17절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1. 일반적인 성공의 통계

1) 한 가지 성공에 십 년은 걸린다

사람들이 인생의 생애에 대해서 지혜 있는 사람들이 통계를 내서 말하기를 '인간 일생에 운이 세 번밖에는 안 돌아온다' 그 아주 행운이 행복스러운 운이 세 번밖에는 안 돌아온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것이 깊은 뜻은 한 가지 일을 성사하려고 하면 아무래도 십 년 걸린다, 십 년 걸리니까 인간에게 삼십 년이라는 그 토막을 빼 버리고 나면 인간 생애는 다 그 밖에 것은 다 껍데기 쭉정이 같지 참 사람이 일할 때는 한 삼십 년밖에는 안 된다, 그런 말과 같은 말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가 무슨 욕망을 가지든지 욕망을 가지는 일을 그것을 성사하려고 하면 십 년 걸려야 되는 것인데,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때에 그저 하루 이틀에 그 일이 되리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시작할 때에 벌로 시작합니다. 아무나따나 그 일을 시작했다가 안 되면 또 저 일 또 안 되면 저 일 이래 가지고 일생 동안에 시작하는 것을 여러 번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를. 수십 가지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다 말할 것 없이 결론은 실패자입니다. 세 가지 시작하는 것보다 두 가지 시작하는 사람이 더 성공이 크고, 두 가지 시작하는 사람보다는 한 가지 시작하는 사람이 성공이 큽니다. 세상일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업이든지 나는 성공을 하겠다 하는 그것을 가지고 그 업을 시작했으니까 업에 종류가 아주 성경에 위반되지 안한 종류라고 하면 그 업을 자꾸 충실히 이렇게 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서울에 도착하는 것과 같이 성공이 됩니다. 그러기에 업이 좋고 나쁜 그것이 성경에서 금하는 것 외에는 나쁜 업이 없습니다. 그것도 할 수 있다 하면 그 업을 보면 그 업으로서는 성공한 사람이 없느냐? 그 업으로서 성공한 사람들이 다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업 쳐놓고 성공 못 한 업이 없고 업 쳐놓고 다 성공한 업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해 나가는데 따라서 성공도 되고 실패도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 일도 그 사람이 하루 아침에 당장에 되리라고 그렇게 너무 쉽게 보고 자기의 자본을 적게 넣는 사람은 그 사람은 성공을 못 합니다. 자기가 하다 못 해 무슨 하나 신발명, 그 발명가가 아닐지라도 다른 사람이 발명하지 못한 어떤 것을 하나 발명을 해 가지고 그 사람이 그것으로 성공을 합니다. 성공할 때는 다른 사람보다 앞서야 다른 사람보다 앞선 성공이 되고 다른 사람 모르는 일들을 발견해 가지고 해야 그 사람이 성공이 됩니다. 그러기에 구멍가게를 해도 그 구멍가게를 하는데 앞집 구멍가게 하는 사람이 성공을 했으니까 나도 구멍가게를 성공을 하겠다고 앞집, 구멍가게 하는 것을 보고서 그 사람들 보자, 일어나는 시간에 같이 일어나고 밥먹는 시간에 같이 밥 먹고, 또 그 사람들 무슨 사라 가는 구입하는데 같이 구입하고. 또 판매하는 시간을 같이 판매하고 껍데기를 꼭 같이 한다고 해도 하나는 성공이고 하나는 성공 아닐 수 있습니다. 왜? 그 성공하는 그 이유는 실패하는 사람은 성공하는 그 사람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사람이 하는 것을 하지 못합니다. 성공이라 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여지는 껍데기에 붙어 있지 안 하고 알맹이에 붙어 있습니다.

2) 인내는 성공의 어머니

인내는 성공의 어머니 입니다. 그러면 인내라야 성공을 낳지 어머니 없는데 뭐 아이가 나옵니까? 인내가 있어야 성공을 하지 인내 없으면 성공을 못 합니다.

3) 자기의 전부를 다 기울여야 성공한다

이 세상 일도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자기를 기울여야 되지 자기를 기울이지 안 하고 자기 기울일 때에 부모의 재산 가지고 온 그 재산을 기울이면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성공을 못 합니다.  

2.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의 관계

1) 세상 성공만큼도 가치를 기울이지 않는 건설구원

이러니까, 세상 일도 이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같이 되어지는 것인데, 하나님같이 되어지는 것이고 참 이 구원 이루는 것은 완전한 것을 만드는 것이요, 영영한 것을 만드는 것이요, 영원한 것을 만드는 것이요, 불변하는 것을 만드는 것이요, 우리의 건설구원은 그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건설구원은 완전한 것을 만드는 것이요, 영원한 것을 만드는 것, 불변의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있는 것을 다 기울인다고 해도 그것 안 됩니다. 우리가 무슨 완전을 만들 수 있습니까? 다 기울인다고 해도 안 되는데 다 기울일 때에는 하나님이 당신이 거게서 보증을 해 주시기 때문에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는 건설구원을 하는데, 힘으로도 능으로도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건설구원을 하는데 이 건설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가지고 된다, 은혜로 가지고 되는데, 은혜로 가지고 되는데 그 은혜를 사람들이 받아야 되지 그 은혜를 받지 못하면 안 된다. 그 은혜를 받으려고 하면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하고, 성품 다하고, 자기에게 있는 것 하나 남김 없이 있는 것을 다해야 하나님이 건설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그 은혜를 받는다 그 말입니다.

이러니까 그 은혜를 받으니까 그 행위가 온전한 행위,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도 정죄받을 것이 없는 온전한 행위, 완전한 행위, 온전한 행위, 완전한 행위라야 행위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이것 다 말해 놨다 그것입니다. 이런데 사람들이 이 건설구원에 대해서 아주 무시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뭐 기본구원만 얻으면 됐지 건설구원 뭐 그것이야 뭐 얻으나 안 얻으나 천국 갔으면 다 좋지' 세상에서 성경에서도 기본구원 얻은 자와 얻은 자의 차이점을 발표를 했고 또 이 자연계시들도 같은 이름에서 그 존비귀천의 가치의 차이가 심히 크고 같은 종류에서 그 귀천이 심히 차이가, 크고 또 같은 이름에서 그 가치와 차이가 심히 크고, 같은 또 위치에서 가치의 그 차이가 크고, 같은 종류에서 가치의 차이가 크다 하는 그것을 성경에서 말했고 이 모든 자연 만물들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참 기본구원을 얻은 것은 어디다가 비유해야 가치 있느냐? 기본구원 얻은 것은 지옥과 비교하면 참 가치 있습니다. 기본구원은 지옥과 비교할 때는 가치가 있습니다. 기본구원은 지옥과 비교할 때는 가치가 있습니다. 지옥 갈 자가 기본구원 얻은 이것은 참 기본구원은 얼마나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 가지고는 안 되고 순전히 하나님의 대속하신 그 공로라야 되어지지, 이것은 인간의 공로 가지고 되지 안 하는 지극히 어려운 공로요. 어려운 것으로 하늘나라는 가기는 갔지만 하늘나라 거기에서 차이 있는 것은 뭣이냐? 건설구원을 얻은 사람과 건설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영원한 차이라 그 말이요, 영원한 차이.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모든 장애인들을 볼 때에 그 장애인을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자연계시로 봐야 됩니다. 병신을 봐도 그것이 자연계시로 봐야 되고 모든 사람이 실패한 그것을 보고도 내게 자연 계시로 '저 사람 실패가 내 귀에 왜 들려오며 내 눈에 왜 들려오느냐? 이것이 나는 그것을 하지 안 하는 사람인데, 나는 하지 안 하는 사람인데 저걸 가지고서 하늘나라의 실패를 지금 나에게 보이고 있다.' 그 사람에게 무슨 요소, 사람이 욕심 하나 잘못 가지고 안 가질 욕심 하나 가지고 일생을 실패한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욕심 하나 안 가질 욕심을 가져 가지고서 영원 무궁을 실패할 수가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모든 나쁜 그 전부를 다 가지고서 하늘나라의 우리의 영원한 것이 있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 짧은 토막의 가난을 보고서 영원한 가난을 자기가 느껴야 되고, 세상에 짧은 토막의 영광을 보고서 영원한 영광을 느껴서, 조그만한 그것도 얻기 위해서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전부 다 기울이는데, 짧은 그것도 기울이는데 하물며 영원한 것을 위해서 기울여야 될 것, 아니요 영원을 믿는다면. 영원한 건설구원을 믿는다고 하면 그 사람이 안 기울일 리가 없다 말입니다. 필연적으로 기울어진다 그 말입니다.

이러니까 세상에 모든 것도 다해야 되는 줄 알면서 이 건설구원에 대해서 이것을 아주 등한히 하고 있다. 등한히 하고 있다. 그것을 여기에서 가르친 거라 그 말입니다. 어디 그런 말이 있느냐?

'들으라 너희들이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게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이것 세상 사업이라. 세상 사업에 이제 모든 사람들이 있는 것을 다 기울여 가지고서 이러면서 천국 사업하는 건설구원 하는 사람은 기울이지를 아니한다 그것입니다.

2) 건설구원은 기본구원을 써 먹는 것

건설구원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기본구원, 기본구원 그것을 이 세상에 자꾸 이건 현실 저런 현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네가 기본구원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느냐? 시험이라면 다 시험이라. 기본구원을 어느 정도 네가 가치를 인정하고 있느냐? 기본구원을 네가 실상이라고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느냐? 네가 기본구원을 어느 정도 네가 보수하고 있느냐? 네가 기본구원을 에서와 같이 그렇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 명분을 파는 것과 같이 기본구원을 네가 돈 몇푼에 팔며 어떤 조그만한 직장에 팔며 네가 기본구원을 어떻게 천대해서 파느냐 하는 그 시험이라 그 말입니다. 그 시험인데 그 모든 현실에서 기본구원을 가치로 아느냐 안 아느냐 할 때에 모든 가치보다 기본구원이 크다 하면 그게 합격이라. 또 기본구원은 자기의 몸과 생명을 다 내 줄지라도 기본구원은 내 줄 수가 없다 하는 그것이 기본구원의 보수라 그 말입니다. 기본구원이 네게 있어서 기본구원을 네가 쓰느냐 안 쓰느냐, 기본 구원을 얻은 자로 사느냐, 네게는 지극히 큰 능력이 있는데 지극히 큰 능력을 네가 써먹나 안 써먹나 보자, 그 써먹는 그것이 통과라 말입니다. 기본구원을 자기가 인정하고 보수하고 기본구원을 써먹고 하는 그것이 전부 성화구원이 되는 생활이라.

그러니까 이 사람은 기본구원을 얻었으니까 자가자 기본구원을 세상에서 쓰는 데는 내비두고 그 기본구원이 그저 천국이나 가고 심판이나 면하고 하는 거기에, 세상에 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날 때에 쓸 수 있는 것, 떠날 때에 쓸 수 있는 것 그것은 자기에게 다 그대로 다 쓰여지지만 그것을 세상에서 써먹어야 될 때에는 안 써먹었으니까 버린 것이라 말입니다. 버렸으면 제가 얻었지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았다.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건설구원은 기본구원의 생활을 하는 그것이 다 건설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기본구원의 가치를 참 믿는 것이요, 인정하는 것이요 자기가 보배로 알고 보수하는 것이요, 그것을 받은 자로서 그 권능을 써먹는 것입니다. 기본구원의 행사를,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니까 한 것만큼 그 사람에게 건설구원이 됩니다. 이러니까 세상에서 쓰는 사람은 하늘나라도 쓸 수 있지만 세상에서 쓰지 안 하고 포기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기본구원을 얻었다는 그런 명의는 가지고 그 자리에 가서 있기는 있지만 실상은 그 사람에게는 기본구원을 쓰는 권위가 하나도 없습니다.

3. 건설구원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

1) 다 기울여야 한다

① 지식, 지혜, 마음, 힘을 다하라

사람들이 이것을 바꾸어 놓지 안하면 자기는 바로 분별하지 못한 그 어두운 마음 가지고 신앙 생활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실은 신앙 생활이 안되는 것을 여기에 말씀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면 세상 일 하는 그 일에는 자기의 마음도 뜻도 소원도 지식도 힘도 다 들입니다. 자기가 어떤 사업을 하든지 어떤 경영을 하나 가지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세상에서 자기가 무슨 성공을 하나 하려고 하면 거게는 자기 지식도 있는 대로, 지식 남구어 놓고 하지 안하고 지식 있는 대로 다 활용을 하고, 또 지혜 있는 대로 다하고, 정성도 있는 대로 다하고, 마음도 다하고, 힘도 다해서 합니다.

세상 일도 사람들이 하는 데에는 자기의 가진 것을 다 들여 그 일을 성공을 하려고 애를 쓰거든 하물며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이루는 데에 자기의 있는 것을 다 기울이지 아니하고 구원이 되겠느냐 하는 것이 첫째 여기에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② 마음, 힘, 성품, 목숨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에 세상에 어떤 일을 하는 것도 그 일을 하는 데에는 자기의 마음이 잘 기울어집니다. 이 세상 일은 죽는 일이요 악한 일이요 타락하는 일이기 때문에 마치 공중에 달아 놓은 것이 내려오기는 저절로 내려옵니다. 위로 붙들고 있는 붙들고 있는 힘이 끊어지면 즉시 아래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죄악으로 타락하는 것, 사망하는 것, 악이 되는 것 이런 것, 악이 되는 일과 죽음이 되는 일 사망이 되는 그런 일은 저절로 됩니다. 세상 에서도 다 사망의 일이지만 거기에 세상에서도 조금 지체가 되는 그런 일은 하려면은 힘이 많이 듭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세상에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그 가치 있는 그런 일을 하려고 하든지 또 자기가 소원하는 죄를 짓는 일을 하려고 하든지 하면은 거기에 마음도 지식도 지혜도 힘도 생각도 다 들인다. 다 들여서 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이루는 데에 다 안 들어 가지고 되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일에 자기의 지식과 지혜와 마음과 힘과 뜻과 지혜 이런 것을 다 기울여야 예수 믿는 것이 되지 기울이지 안하면 예수 믿는 것이 안 된다 그것을 표준한 말입니다.

우리는 많이 에누리를 합니다. 우리 구원은 기본구원과 건설구원인데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그 건설구원이 이루어진 것을 말하기를 영생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건설구원이 이루어진 것을 영생이라.

영생은 건설구원 이루어진 것을 영생이라, 다른 말로 하면은 완전이라, 다른 말로 하면은 영원한 것이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건설구원이 이루어진 것은 전부 완전 그 수준 위에 올라가야 되고, 영생 수준 위에 올라가야 되고, 영원히 변치 않는 그 불변의 수준에 올라가야 성화구원 건설구원이 되는 것이지 그 이하의 완전성이나 견고성이나 가치성이나 모든 그 지능성을 가진 것들은 다 소용 없습니다.

그 수준 이상 것이라야 되는데 이것을 하는 데에는 똑똑히 말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다른 데는 보면은 성품을 다하고 네게 있는 것을 다해서 해야 건설구원이 된다 그래 성경에는 그렇게 말해 놨습니다.

네게 있는 것 무엇이든지 한 가지라도 '요것만 이 건설구원 이루는 데에 투자할 수가 없다. 요것만 나는 건설구원 이루기 위해서 요것만 포기하라 할 때에 요것까지는 내가 포기 못 하겠다, 딴 것은 다 들인다 할지라도 이것 까지는 드리지를 못하겠다.'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자기의 건설구원은 안 된다 그렇게 말한 것이 성경입니다.

이런데 우리가 이 구원 얻는 이 일을 너무 우리 주장대로 우리 생각대로 그 방편을 정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요만하면 되겠지'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서 그 표준을 우리 마음대로, 건설구원 성화구원을 이루는 이룸의 그 표준을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정해 놓고 '이와 같이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 가지고 다 속는 일을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2) 자연계시를 통해서 차이가 심히 많은 것을 깨닫는 자가 되라

성경에 똑똑히 말한 대로 성화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행위로 말하면 온전한 행위라야 되고, 온전한 행위라야 되고 또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기울여서 한 일이라야 된다. 우리 건설구원을 이루는 표준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표준을 정하셨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정하신 이 표준에 따라서 우리는 건설구원을 이루는 그 방편을 삼아야 되는데 요것을 삼지 않기 때문에 다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뭐 기본구원만 얻으면 되지 건설구원이나 있으나 없으나 기본구원만 이루면 되지 않는가? 기본구원 이루면 지옥 안 가고 천국을 가니까,' 네, 천국도 갑니다. 영생도 합니다.

기본구원을 며칠 전에 열 가지로 말했는데 그 열 가지는 다 얻습니다. 열 가지는 얻는데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과 얻은 사람과의 세상에서는 그것을 모르지만 영원 불변한 그 나라에서 차이가 있기를 세상에 사람과 사람의 그 차이로서 비교 못 할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차이를 보면은 그 사람이 차라리 사람이 안 되고 짐승이 됐으면 훨씬 나을 뻔 했습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그 사람으로서 자기가 갖추어 가질 것을 가지지 못했을 때에 그 사람의 천함이 얼마나 천하며, 그 사람의 가난이 얼마나 가난이며, 그 사람의 그 수치가 얼마나 수치며, 그 사람의 그 가련함이 얼마나 가련한가 그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모든 종류의 같은 종류의 그 차이가 있는 그 차이점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차이점을 내 놨느냐? 인간과 인간의 차이점, 또 형체와 형체의 가치의 차이점, 또 육체와 육체의 가치의 차이점, 이 세상에 모든 이름이 같은 것도 있고 모양이 같은 것도 있고 또, 그 이름 같은 것, 모양이 같은 것, 종류가 같은 것, 같은 것이 있는데 같은 것으로서 차이가 얼마나 많으냐? 그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차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내셨느냐? 그거 없어도 되는데, 그것이 다 자연계시입니다, 자연계시.

자연계시라 말은 하늘나라에 구원을 얻어 가지고서 간 사람과 사람의 차이,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과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의 차이가 이러하다 하는, 그 차이는 하나님이 완전한 자를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차이들입니다. 이 모든 차이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에 차이가 있느냐? 이 차이는 하나님의 목적인 완전자를 만들려는 하나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만물을 지었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지으신 것인데 그러면 지으신 것 가운데에 이렇게 이름은 같으면서 차이가 많다. 형체는 같으면서 차이가 많다. 종류는 같으면서 차이가 많다. 차이 많은 것은 이것은 우리에게 '차이가 많다. 같은 종류라도 그 가치의 차이가 심히 많다.'

형체라면 형체라는 것은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는데 그 형체와 형체의 가치 차이가 심히 많다. 육체와 육체의 가치 차이가 심히 많다. 우리가 기본구원 얻은 자와 기본구원 얻은 자의 차이가 이렇게 많다. 차이는 우리에게 차이를 알려 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학에서 사용하는 그 신학 술어는, 계시가 두 종류 있습니다. 계시를 특별계시라 보통계시라 이렇게 말하는데, 계시라 말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알려 주신다, 인간이 모르는 것을 알려 주신다. 이래서 알려 주면 뭘 알려 주느냐? 하나님의 목적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 목적을 알려 주고, 하나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계시는 신구약 성경과 영감이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이고, 또 자연계시라 일반계시라 보통계시라 그렇게 이름하는데 그것은 어떤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고 하니 하나님의 창조물, 또 하나님의 모든 섭리, 이리 하고 저리 하고 자꾸 섭리해서 하나님의 역사하는 그 섭리, 또 인간들의 마음의 구조, 인간들이 뭐 별별 마음, 사람들이 세상에 '사람이 어디 저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느냐?' 하는 그 사람은 처음으로 그 마음 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별별 마음이 있는 그것이 그런 것이 다 무엇을 보이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이냐? 그것들이 다 우리의 구원의 차이성을 보이기 위해서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뭐 기본구원만 얻었으면 됐다' 하는 그 말은 '나는 인생 중에 제일 가련하고 불쌍하고 천한 사람이 될지라도 사람됨으로 만족한다' 하는 말 한가지요. 사람이 됐기 때문에 고통입니다. 인간 중에 천한 사람은 그 천한 사람이 차라리 무생명의 돌이 됐든지, 그러면 무생명의 무슨 흙이 됐든지, 무슨 식물이 됐든지, 버러지가 됐든지, 됐으면 그렇게 자기에게는 천하고 곤고함이 없지만 사람으로서 천하기 때문에 천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엇이든지 '기본구원만 얻었으면 됐다' 그런 생각을 가지지 맙시다. 물론 지옥과 비하면 지옥보다는 좋습니다. 지옥보다는 좋지만 지옥과 천국이 비교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지옥과 천국이 서로 비교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의 구원 얻은 사람들과 구원 얻은 사람들의 그 비교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불 가운데서 구원 얻은 것과 같은 수치가 있다" 또 지극히 크다 지극히 작다, 큰 자가 된다, "이런 자는 하늘나라에서 지극히 작다고 하는 자가 되리라" 하늘나라에서 지극히 작다 지극히 큰 자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본구원으로 만족이 된다' 그런 망령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사람으로 하룻밤 나그네와 같이 잠깐 동안 살고 가는 그 인생살이에 있어서도 제일 천한 그런 사람이 다 되지 안하고 잠깐 동안 인간으로서 제일 불행스러운 일이 한 토막 한 시간만 만나도 제가 죽을 지경일 것입니다. 그 한 시간 만나는 그 일을 자기가 뭐 괜찮다 그렇게 하지를 안할 것이오.

만일 하루 동안이라도 인간으로서 제일 천한 고통을 당한다든지, 인간으로서 제일 천한 천대를 받는다든지, 인간으로 제일 무능한 그런 무능한 꼴을 만나면 기가 찰 것이요, 이가 갈려서. 사람이 제일 분개하고 마음에 고통스러운 것은 그저 가끔가다 하나님이 알려 주기 위해서 천한 것을 좀 맛보이고 무능한 것을 맛보여. '세상에 참 권리 없는 사람이 죽은 사람이다' 이 권리 없어 권리에게 압제를 당하고 권리 없을 때에 그 고통당하는 것, 또 다른 사람보다 영광된 그 자리에서 천대 받는 그 고통당하는 것, 이런 것이 다 무엇이냐? 영원한 구원을 얻은 자의 그 영광의 차이입니다. 구원 얻은 자의 영광의 차이. 그러기 때문에 기본구원은 꼭 같지만 영광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본구원 얻었으면 뭐 됐다' 하는 그런 망령된 생각을 우리가 가지지 말아야 됩니다. 제가 '기본구원을 얻었으면 됐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반드시 '아이구 이 시간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 시간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럴 때는 죽어서 내가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일은 닥치지 안했으면 좋겠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훨끈 나아도 죽지를 못해 그렇지 그런 고통한 감을 깨닫게 될 것이오.

'그러면 네가 사람인데 뭐, 네가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사람은 사람 아니냐? 사람은 사람인데 뭐 고통을 네가 그렇게 못 견뎌 말하는 것이냐, 기본구원이면 됐다 한 자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그 고통을 느끼고 그것이 없었으면 하느냐?' 그렇게 사람들이 보여 주는,

사람들에게 탐박 탐박의 못 견디는 '참 이것이 없으면 좋겠다' 그만 사람들이 죽을 지경의 고통이 되는 그런 고통이 자기에게 오는 것은 무엇을 보여 주기 위함이냐? 네가 인간과 인간으로서 지금 이 시간 어떤 인간은 한없는 영광을 행복을 누리고 영광과 존귀를 누리고 만족을 누리고 사는데 너는 얼마나 불행스러우냐? 인간과 다른 사람과 너와의 이 현실이 차이 있는 이것이 무엇이냐? 다 같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가진 행복이 차이 있을 때에 이렇게 불행감을 가지는 그것으로써, 짧은 인간과 인간의 그 차이점 이것을 가지고 영원무궁한 하늘나라에 기본구원 얻은 자와 기본구원 얻은 자의 차이가 있는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계시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모든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구원 얻은 자로 고통스러운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지옥에 고통을 보여 주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이렇게 차이 있는 그 일을 당면하는 세상에 무엇이나 그런 것은 '저 사람은 저런데 이 사람은 이렇게 된다' 네가 듣는 것이든지 보는 것이든지 그 사람과 사람 차이가 그렇츰 있지 않느냐? 사람과 사람의 행복의 차이나, 기쁨의 차이나, 평강의 차이나, 권세의 차이나, 부요의 차이나 그 차이가 있지 않느냐? 그 차이 있는 그것이 막바로 하늘나라는 이것으로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수많은 차이가 있다, 그 차이점을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자연계시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차이점 있는 그것을 보아서 다 같이 기본구원을 얻은 자지만 기본구원 얻은 자와 얻은 자간에 모든 차이가 있는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자연계시와 특별계시, 성경에도 말한 것은 성경은 특별계시인데 성경에서도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은 거기에 똑똑히 말해 놨다 말입니다.

그러면 모래알 하나와 하늘의 햇빛 하나와 같겠습니까? 다 같은 육체는 육체지만 그 육체의 영광이 같으며 가치의 영광이 같으며 권위의 영광이 같습니까? 같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보아서 차이를 깨닫고 우리가 얼마든지 세상에서 차이 있는 데에 가장 천한 차이에서 점점 힘써 가지고서 존귀한 그 차이점에 가서 도달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건설구원에 소망과 욕망을 가지고 건설구원의 필요성을 가지고 네가 기본구원, 그런 말을 할 수 없으나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되어야 됩니다.

사람이 '나는 그만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하는 그때는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는 그때 죽을 수가 없어 못 죽지 죽는 것이 살아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 말입니다. 인생이 인생되어 있는 것보다 인생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 낫겠다 그 말입니다.

이런 걸로 본다면 하늘나라에 기본구원 얻어 가지고 있는 사람이 기본구원 얻은 그것만으로써는 기본구원을 얻지 못하고 차라리 지옥 갔으면 좋겠다 할 수 있는 그 고통이 하늘나라에도 있지 않겠나 하는 것은 주장은 못 해도 우리가 미루어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면서 온갖 불구자를 봅니다. 온갖 불구자를 볼 때에 왜 하나님께서 내 눈에 불구자가 보이게 되느냐? 그 불구자가 보이는 것은 '네가 세상에 저 불구자도 가련하다고 네가 하지 않느냐? 영원한 불구자를 보라.' 세상에 있는 불구자에서 영원한 불구자를 생각하고, 제가 '기본구원이면 됐지 뭐 건설구원을 이룰 필요가 뭐 있느냐?' 하는 그 망령된 생각을 말아야 되고,

또 어떤 지금 가련하고 들으면 가련하고 불쌍한 형편과 처지를 만날 때에 말만 들어도 징그러워서 '그런 징그러운 흉한 그런 형편에는 닥치지 안했으면 좋겠다. 일생동안 그런 일 닥치지 안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그 형편을 보아서 네가 기본구원을 얻어 가지고서 하늘나라에 이렇게 다른 사람은 행복된데 너는 이렇게 비참하게 되는 이런 처지를 미루어 생각해서 네가 기본구원에만 만족하지 말고, 기본구원은 이미 얻었으니까 얻었지만 기본구원 얻은 자가 건설구원을 얻어야 그 기본구원 얻은 것이 얻은 가치가 있지 기본구원만 얻고 건설구원을 얻지 못했으면 그는 불행스러운 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수준에 따라서 아무리 영광스러운 자리에 갖다 놔도 영광스러운 자리에 갖다 놓은 그 자리가 제일 천한 인간은 자기 천한 그 자리만큼 재미가 없다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는 하늘나라를 버리고 깜깜 어두운 지옥을 가고 싶어도 가지를 못한다 그것입니다. 지옥을 가고 싶어도 가지를 못하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불 가운데 얻은 것, 불 가운데 얻었다 말은 그 수치스럽고 낯이 부끄러워 뜨거워서 못 견딘다는 그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런 구원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기본구원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건설구원을 이루려면 이룰 수 있는 것이니까 기본구원을 다 활용해 가지고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 전심전력을 기울이는 자 되게 하기 위해서 자꾸 이 차이점을 보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차이점을 성경이 '구원의 차이점이 이렇게 있다' 이것을 성경이 보여 주고, 이 자연 만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기본구원을 얻은 자로서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에 우리가 무엇보다도 욕망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세상 일은 오늘로서 끝날런지 모르지만 성화구원 이루어 놓은 것은 영원히 자기가 가지는 그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변동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루어 놓은 그 나라기 때문에 그 나라는 변동이 없다 이랬습니다. 그 나라는 변동이 없다. 알파와 오메가라.

그러니까 변동 없는 천대, 변동 없는 무능, 변동 없는 그 무용지물, 변동 없는 가련, 변동 없는 수치, 변동 없는 후회 이런 것이 다 불 가운데서 구원 얻은 것과 같은 구원이기 때문에, 지옥에보다는 낫지마는, 지옥에보다는 낫지만 실상은 낫지만 본인이 낫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 낫지만 하늘나라는 전부 기본구원 얻은 사람들끼리 있는 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아무리 그 병신이라도 개보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짐승보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만일 그 사람이 아무리 등신이고 바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만일 이런 물고기가 됐다든지, 짐승이 됐다든지, 식물이 됐다고 하면은 굉장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몰라도 그래도 아버지도 알 것이고, 아들도 알 것이고, 또 사람도 알 것이고 이런 것 알 터인데, 어떤 식물을 하나 갖다 놨는데 그 식물이 아버지니 아들이니 무엇이니 이것은 누구라 누구라 이름만 안다 해도, 그 식물을 하나 사다 놨는데 그 식물이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개다. 이것은 누구다.' 그것을 알아 보십시요. 아마 그 풀 한포기 꽃 한 포기가 그것을 아는 꽃 한 포기가 있다 하면은 억억만 원도, 억억만 원도 더 할 것입니다. 억억만 원도 더 할 것입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 알아봤자 소용 없는 가치가 없게 된다 그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의 영광 없는 부끄러운 그 구원도 이런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자연 만물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도에 대한 것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선후를 바꾸어야 한다

선후를 바꾸어야 된다. 모두 다 세상 것 해 놓고 난 다음에 이것 하겠다 하기 때문에 망한다 그 말입니다. 이것이 뭐 된 줄 알았는데 좀 가다가 보니까 또 헛일이라. 가다 보니까 벌써 세상하고 바꾸었다 말입니다. 이게 처음에는 철이 없어서 이러다가 조금 돈 맛을 보고 세상 맛을 보면 훼딱 바꾸어 버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일학교 학생들은 건설구원에 대해서 욕심을 모두 가지고 전부를 다 기울이고 있지만 그것이 국민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가니까 바꿔버리고, 고등학교 가니까 바꿔버리고, 대학에 가니까 바 꿔버리고, 바꾸는 것은 무엇이냐? 썩을 것과 썩지 안 할 것을 바꾼다 그 말입니다. 천국과 세상을 바꿔요. 이러기 때문에 '이게 뭣이 될란가?' 해도 조그매 사업에 맛보고 난 다음에는 벌써 세상 사람 됐습니다. 만나보면 뒤에 세상 사람이 됐습니다. 자기가 주일학교 때에 욕망하던 욕망이 바꾸어졌고, 벌써 제가 학교 다닐 때에 욕망한 욕망이 사업하고 난 다음에 바꾸어졌고, 사업할 때에 욕망하던 그 욕망이 사업 성공을 하고 난 다음에 바꿔졌더라 말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선후를 바로 해야 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대로 깨달음으로써 '이렇게 하는 것이 이것 참 신앙 생활은 신앙 생활인데, 양심 생활은 양심 생활인데, 이것이 주님에게 순종 생활은 순종 생활인데, 그렇지만 요것부터 먼저 해 놓고 그 다음에 요래 하자.'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이 자기의 욕망이라는 그 마음은 어디 가 있느냐? 최종 마음은 어디 있느냐? 최종 마음은 있는 것-몸과 소유와 생명 다해서 예수 믿겠다 하는 그 욕망에는 다 두고 있습니다. 욕망에는 다 두고 있지만 현재를 다 빼앗겨 버리기 때문에 헛일이라. 마귀라는 놈이 그렇게 주는 것이라 말입니다.

이러니까 선후를 바꾸어야 된다. 이것도 얼마나 중요한지. 선후를 바꾸어야 된다. 이것도 그렇게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라 자꾸 '내가 또 선후를 바꿨다' 선후를 하늘의 것을 먼저 하고, 먼저 하면 땅의 것은 할 것 없이 저절로 되어 집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하나님이 하신다 했다 말입니다. 이러니까 이것 먼저 하는 이것을 해야 될 터인데 자기가, '내가 이것을 할 때에 또 이것 한다' 선후를 바꿔 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바꿔 하는 그 놈하고 싸우고 바꿔 하는 자기를 책망을 하고 자기를 마구 바꿔 하는 요놈이 자기 원수인 줄 알고 죽이고 그 투쟁하는 전투하는 그 일이 있을 때만 저는 그 선후를 바로 하는 것이지 '이제 나는 선후를 바로 하도록 탁 착수해 놨으니까 지금 바로 된다' 싸움이 없는 데는 벌써 졌다 그 말입니다.

{83100533 설교를 요약한 것입니다}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