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6일 오전
강사: 신두범 목사
제목: 성도 존재 목적 회복 과정
본문: 창 3:21; 롬 5:8-11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의 삶을 바로 살았는가 바로 살지 못했는가 하는 것을 창세기 3:1절 말씀을 통해서 인류  시조 아담과 하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의 목적대로의 삶을 이루지 못한 결과를 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죄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죄냐? 죄는 하나님의 목적 완성을 이루시기를 원하셔서 절대적인 공의의 법인 지공법과 지성법을 거스려 거역하는 것을 죄라 합니다.
하나님이 ㄹ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만 따라서 순종의 삶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 순종의삶을 이루지 못하고 자율을 따라서 주관을 따라서 이 모든 산 불의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배신한 이것이 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죄의 값은 뭐냐? 죄의 값은 영원한 사망이다. 죽고 망한다. 죽는 것은 먼저는 단일체인 영이 죽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영의 존재 자체가 없어졌다는 말은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연결이 단절된 상태에서 영원한 생명에 속한 것을 아무것도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것을 죽었다. 말하는 것이다.
 영이 죽고 나니 두 번째는 몸이 죽게 됩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주격이 되는 여에게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 에너지를 영으로부터 공급받아서 살아가는 것이 육인데 영이 죽어 버렸으니까? 마치 큰 저수지에서 수도관을 통하여 우리 가정에 식수가 공급이 되어지는데 수도 꼭지를 미제나 우주에서 가서 만들어 놓아서 중간에 끊어져 버리면 안 나옵니다. 이미 풍부한 물을 공급시켜 주는 중간에 수도관이 파열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영이 파열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 인하여 육신이 후패해져서 나중에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육신의 죽음입니다.
세 번재는 사망의 부활이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이 있고, 심판의 부활을 통하여 마지막 영원히 심판을 받는 것이 죽음이다.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죽음이라. 그렇게 이야기 하면 우리 물질로 되어 있는 육신적인 죽음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육신적인 죽음도 엄청난 비극을 초래 한다. 그러나 이 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것은 영의 죽음인 것입니다. 영의 죽음이라 하는 것은 마치 우리 육체가 죽으면 땅위에 가지고 있는 어떤 좋은 것들, 어떤 소중하고 귀한 것들도 다 두고 가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 영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만 살아갈 수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은혜가 다 끊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것을 사망이라 죽고 망하는 것이다.
이 사망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났느냐 고통으로 나타났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했을 때 인간과의 관계에서 배신을 당해도 고통을 당하는데, 우리 육신이 당하는 고통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육체의 고통도 참고 견디기가 힘이들고 어렵다. 그런데 영이 당하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인간의 지식이나 말로서 표현 할 수 없는 이 사실을 좀 깨달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는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가난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이 이 가난에 대한 것을 우리에게 조금 느낄 수 있도록 주신 것이 지식적인 가난이 있다. 물질적인 가난, 건강적인 가난, 명예적인 가난도 있다. 권력적인 가난, 사람은 좀 부요해지려고 내가 부요해지려고 안되면 자식만큼이라도 부요해 지려는 사람을 만들려고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죄로 인한 가난의 한 단면을 보여 준 것이 홍포 입은 부자를 통해서 보여 주었다. 물 한방울을 소유할 수 없는 완전한 가난, 살맛 나겠습니까? 살맛이 없겠습니까? 이것이 실상적으로 아멘이 되어져야 합니다. 물질적인 가난, 건강의 가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로 인한 영원한 가난이 얼마나 큰지, 고통과 가난이 언제 끝난다고 하면 희망이 있다. 소망이 있다.
여름에 농부가 땀을 많이 흘려도 가을에 소출에 대한 소망이 있다. 아이들을 공부시키면서 고생하는 부모는 떨어져 살아도 소망이 있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 죄의 값으로 당하는 사망이라는 것은 영원한 절망으로 나타난 것이다. 소망이 없는 것이다. 희망이 없는 것이다. 죄는 이 사망으로 모든 관계를 다 단절 시켜 버립니다. 여러분들 죄만 있으면 아무리 가까운 한 이불 덮고 자는 부부간에도 원수가 되고 맙니다.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가 내 살중에 살이라 하다가 죄를 범하고 난 다음에는 남남이 되어 집니다. 여자 그가 나에게 선악과를 갖다 줌으로 먹었나이다.
이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하나님과 원수를 만들게 한다. 두 번째는 이 죄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립니다. 육신의 나눔도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아픔도 죄로 인하여 나타난 것이다. 원수의 관계로 변화 시켜 버리는 것이다. 죄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니까 자연적으로 모든 물질과의 관계가 원수가 되는 것이다. 모든 식물들의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
마지막은 자기 자신과도 단절이 되는 원수 관계가 되고 마는 것이 죄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 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고 미워하시고, 진노하시고 분개하는 것이 죄이다. 이 죄와 악을 우리 하나님이 제일 싫어 하신다. 이 죄와 악은 왜 하나님이 싫어하실 수 밖에 없느냐 하나님의 목적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죄라고 하는 데 대해서는 하나님도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인생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느냐 해결 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죄도, 천국도, 지옥도 몰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죽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죄로 인한 사망의 고통과 가난과 절망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목적 완성을 이루시기 위한 과정이요, 그 과정은 완전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죄가 얼마나 두려운 것이며, 무서운 것이며, 죄의값이 얼마나 큰 것이며, 이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큰 것인 것을 산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부자집에서 자란 사람은 가난이 뭐인지 잘 모른다. 우리가 영원을 사는데 있어서 죄에 대한 것을 알려 주지 않고는 하나님의 목적 완성을 이루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이 아니면 아무리 말로 퀴하고 아름답고 정말 숭고하다고 말로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본래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영원히 범죄하지 아니하는 영으로는 창조하지 않았다. 사람의 영은 범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의 시조 아담하와로 인하여 범죄하도록 하고 교육을 통해서 알게 하시고, 그대로 버려 두시지 않고 영원히 모든 것을 예정하신 목적 완성을 이루는데 어떤 것이든지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런 과정을 거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범위가 자꾸 좁아지면 안됩니다. 넓은 것, 큰 것, 완전을 생각하고 영원무궁까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요한 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독생자를 주셨으니...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8: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내어 주신 이가 ...아니하시겠느냐?
오늘 봉독한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어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일서 4장에 가서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왜 우리가 사랑 할 수 없습니까? 죽어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뭐를 사랑합니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독생자를 주셨다 쉽게 생각하고 지나 갈 수 있으나 차원이 다릅니다. x새끼 그러면 듣기 싫다. 내가 짐승이며 부모를 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이 사랑은 이 사랑 때문에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대속물로 주시는데 주시는 것이, 옛날에는 아들이 많았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할렐루야. 완전자가 이는 사람이 짐승되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가 피조물 되는 것이다. 완전자가 불완전한 사람의 몸을 입고 오는 것이다. 주인이 종으로 섬기려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화장실에 구더기 되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낮아지심과 천하심과 고난 받으시려고 이 땅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 힘의 근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루어 나가는 건설구원의 자본입니다. 세상의 돈, 인간 지식을 가지고 성화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의 배경을 알아....
우리가 책을 읽든지 다른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 보면 나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예수님을 만났다. 어릴 때부터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해도 몰랐는데 인격적으로 만난 후 이틀 삼일 울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만남은 나라는 사람이 어떻게 존재 되어졌는가 하는 것을 성령님이 알게 해 주실 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은 죄의 값이 어떠하나, 나의 과거가 어떠했나? 그런데 영원한 가난과 고통과 절망의 문제를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를 보내셔서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 나를 위해서 낮아지셨다. 나를 위해서 살찟고 낮아지셨다. 이것이 깨달아지고 믿어 질 때에 이것이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도 놀라운 것인데, 그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에쿠스, 벤츠 타고 대접 받으시다가 하늘나라 올라갔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이야기 하다 보면 십자가를 이야기 안할 수 없습니다. 손과 발에는 못 박혔다. 성지 순례가보니까 손 바닥에 못 박으면 쳐저 버리니까 손 목에 박고 발을 포개서 못을 박았다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라 살찟고 피흘리심이라 하면 단순히 육체적인 것만 생각하기 쉽다. 육체적인 것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라고 하면 누구도 못 박혔어요. 좌우편에 강도도 못 박혔다. 전래에 의하면 베드로는 거꾸로 못 박혔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로 인한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죽음이 끝이 아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정망 고통은 하나님과 연결된 영이 단절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서 모든 것을 받아서 전해야 하는 영이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죽음이 죄로 인한 죽음이다. 그 죄로 인한 죽음의 고통과 가난과 절망은 육체적인 당하는 것이 끝이 아니고 우리의 주격이 당하는 영이 당하는 고통과 절망, 이 부분으로 들어가야 한다. (돈 없다고 무시당하는 것보다 인격을 무시하는 것에 대한 모독을 더 크게 느낀다.)
영의 사망과 가난과 고통과 절망의 절규를 무한성을 가진 것을, 하나님이 친히 신성과 인성을 가진 무한성, 영원성, 충족성을 가지고 우리의 죄값을 다 지불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 능력이 저와 우리 속에 역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사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비록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없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떠한 사랑을 입었는지 깨닫는 것.
나 때문에 그 사랑이, 정말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견딜 수 없어서 영원전에서부터 시작하셨던 목적 완성을 이루기 위하여 다시는 실패가 없는 완전한 구원을 입혀 주시기 위해서 엄청난 고난과 고통을 지불하시고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운명하실 때는 테텔레스타이, 우리의 원죄 본죄, 모든 죄의 값을 지불하시고 지불의 완성을 이루셨다는 것이 십자가에서 선언하신 선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저와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 받았습니다.
육체적인 고난이 아니라 신성이 함께 받으시는 고통, 가난, 절망, 모든 값을 지불하시고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돈 주고 사시겠습니까? 엡 2장에 가서 보면 너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선물이니라.
신인양성 일위로 오신 예수님께서 그 죄의 값은 사망의 고통을 대신 받으시고 그 값을 다 지불하심으로 우리에게 사죄의 은혜를 입혀 주셨습니다. 인성만으로 다 이룰 수 없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도성인신하신 참사람이시고 참 하나님이 되셔서 인간이 죽었다고 깨는 것이 아니고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의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 의를 입혀 주신 것을 칭의의 공로라 말합니다. 롬 3장에,,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의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국가를 상대해서, 세계 인류를 상대해서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의, 성경에서 말하는 것 말고도 이루어 가져도 대단한 사람으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 집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에게 의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윤리적인 것이고, 도덕적인 것이고, 유한하고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 미국을 가도, 불한 /. 중국/ 이는 없어서는 안되는 영원한 영원히 필요한 하나님의 의를 어떤 사람이 누가 무엇을 해서 이 의를 완성하겠습니까?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순종으로 말미암아 창세 이후로 의의 공로가 입혀 준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힘있게 하는 방법이 나는 의인이라. 자기의 의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다. 이 의를 도성인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셔서 선물로 공짜로 받아 놓으니까? 만약에 목숨 주고 받았다면 금고 안에 넣어놓고 귀하다 할 것인데 우리가 값을 안치러 놓으니까 너무 값에 대한 것을 몰라서 이 자리에 불러 모아 주신 줄로 압니다.
이 의가 얼마나 귀하고 어디에서 필요한 것을 너희로 하여금 알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교훈, 책망하시고 알기를 원한다. 깨달아 알아라고 권명하시고 강권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의는 사죄의 은혜의 공로보다 더 커다고 저는 봅니다. 사죄보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완전하게 이행하여 영원무궁토록 그 효력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이 땅에 살 때만 누립니까?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거나 금생에서나 내세에서나 영육간에 영원무궁토록 이 의가 없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서 순종으로 오셔서 완전하게 순종으로 주신 것입니다.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커서 형체가 없어. 얼마든지 가지고 다닐 수 있고 누릴 수 있고, 이 효력을 입을 수 있는 이런 칭의의 대속의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도성인신하신 예수님께서 신인양성일위가 연합하여 고난 받으시고, 육신이 살찟고 피흘리심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원수 되었던 것을 화친 시켜 주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한 집에 있어도 원수지간에 살밖에야 안 사는 것이 좋지.
롬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나하고 자존자 창조주, 전지전능, 주재주권자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창조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유일한 목적의 대상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원수로 만들어 버렸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원수가 되어져 버린 것입니다.
대주재자와 영원히 살아야 하는데 원수가 되었으니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단순히 육신이 살찟고 피흘린 것만 생각하지 말고 그 이면을 생각하고, 하나님과 화목되었은즉,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고린도서에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화친 화목시킬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이런 직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 화목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화목이 이루어지느냐? 내가 하나님과 화목되었으니 아들, 아버지 하나님과 화목시켜야지 안됩니다. 내 안에서부터 하나님을 떠났던 삶, 마음이 하나님과 화목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중생한 영과 성령이 더불어 역사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화목이 되면 몸이 화목이 됩니다. 화목은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과 진리가 우리 마음을 하나님과 화목이 되는 동질의 사람을 만들어 가신다. 우리가 힘 쓸 것은 밖에 있는 것보다 내 안에 있는 것을 힘써야 한다.
내가 변화가 되어야 나를 통해서 나타나시는 피의 능력과 진리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줄 믿습니다.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마누라 보고, 남편 보고 바꿔지라 하지 말고 내가 바뀌어 져야 합니다. 내가 완전하신 하나님과 완전히 동질된 결합이 되어질 때 내 속에 이질적인 요소를 하나씩 제거해 나가면 화친의 완성을 이루어 나가게 되고, 이것이 되는 것만큼 내 이웃의 사람들도 하나님과 화친 시키는 이 일을 할 줄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얼마나 중대한 직책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무한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알아가도 다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죄의 값이 무한한 것이었기 때문에,
구속의 사랑이 내 안에 감사와 감격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되는데는 주신 말씀을 듣지 않고는 안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 정말로 확신하고, 확신 가운데서 은혜에 입각해서 본능적으로 죄를 멀리하고 의를 가까이 하고 힘쓸 때마다 우리의 구속의 은혜를 더 풍성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만큼이라도 깨달았다고 하면 우주를 얻은 것보다 더 큰 수입을 얻은 줄로 믿습니다. 이 구속의 놀라운 은혜 감사하는 사람이 됩시다. 감격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이로 인하여 즐거움이 있고, 기쁨이 충만하고, 이런 삶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목적의 삶이 되는 줄로 믿는 줄로 믿습니다.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5-0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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