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사랑

2004.07.19 22:45

윤봉원 조회 수:1563 추천:164

골 3:122004071801날자: 2004년 7월 18일 주일 오전
제목: 온유한 사랑
본문: 골로새서 3장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1. 온유한 사람과 억센 사람

바울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고 말씀 하셨다. 이것은 쉽게 따르기 힘든 명령이다. 온유함은 어떤 사람에게는 반사 작용과도 같이 나타나는 반면 또 어떤 사람에게는 낯설고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공항이나 쇼핑 센터와 같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보게 된다. 어떤 할머니가 수화물이나 선물 꾸러미를 어쩌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데 건장한 사람들이 계속 그냥 그 옆을 지나간다. 인상을 쓰며 “할머니, 좀 비켜요”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드디어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할머니를 보고는 길을 멈추고 도와 준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종교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마음이 온유하지는 않음을 가르쳐 주셨다.(눅 10:30-37). 제사장과 레위인은 골치 아픈 일에 말려 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길 저편에 있는 다친 여행자를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종교가 없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온유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왜 어떤 사람은 온유하고 어떤 사람은 억센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유가 잇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유가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다 다르게 만드셨으니까 집안 내력이나 당사자의 기질, 그 사람의 경험도 이유가 된다. 온유함과 억센 것은 둘 다 인격의 중요한 특질이며, 없어서는 안된 사랑의 한 측면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적 성품을 지니고자 한다면 여러분의 삶에 다소라도 부드러움이 자리 잡아야 하고, 다정하고 온유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2. 억센 사내의 진퇴 양난

우리같이 마음이 억센 그리스도인들은 남에게 억세게 대하는 것이 그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시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농담하지 말아야 할 대상에게 농담을 해 놓고 그들이 상처를 받으면, "농담도 못하니?"라고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별로 귀 기울여 듣는 편이 아니다. 남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흔히 딴 생각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속으로 말대꾸를 한다. 우리는 왜 사람들이 그렇게 연약하고 소심할까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을 이용하고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가차없이 버린다 우리 자신은 깨닫지 못할 수도 있지만 남들은 우리가 상전이라도 되는 양 행동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의견이 옳아야 좋아하고, 경쟁을 좋아하며 무엇보다 이기고 싶어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속으로 온유한 사람을 감상에 젖은 약골이나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본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용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많아야 일 년에 한두 번, 그것도 경제적인 타격이나 사고나 병환, 이혼이나 어떤 다른 어려움에 부딪혀 풀이 죽었을 때에나 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우리 내면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면 특히나 그렇다. 몇 번 안 되는 반성의 시간을 가지며 나는 계속 이렇게 자문했다. '어떻게 내 마음이 이렇게 냉정할 수 있을까?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사랑을 직접 체험해 보았는데, 그 분의 사랑으로 내 영혼이 감화를 받고 변화를 받았는데. 성령님이 내 삶에 거하시고 나를 더 사랑 많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나를 속속들이 뒤집어 엎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데.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더욱 사랑 많은 사람으로 자라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한 무리의 형제 자매를 내게 맡기셨는데.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너무 무신경하고 냉정하구나. 내가 더 온유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람들에게 더욱 온유하게 다가가려면 어떤 실제적인 단계를 밟아야 할 것인가?'

3. 왜곡된 시각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소경을 고쳐 주시는 장면과 마주치게 된다. 보통 예수님이 사람들을 고쳐 주실 때에는 그들에게 안수하시거나 말씀하심으로써 병이 즉각 나았다 그러나 마가복음 8장 22-26의 이야기에는 치유가 두 단계로 나와 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눈에 안수하신 다음 물으셨다. "무엇이 보이느냐?"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예수님이 다시 안수하시자 이번에는 온전한 시력을 찾았다. 드디어 왜곡된 모습이 아닌 사람들의 모습을 밝히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이야기 해 주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는 말씀이 우리도 ‘사람들이 그저 주변 경치의 일부분일 뿐이야. 내게는 그저 나무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니까.' 이렇게 생각했던 것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위에서 사람들을 볼 때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 야, 이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손수 정밀 제작하신 피조물이로구나. 하나님의 형상이 그대로 나타나네, 하나님이 최고로 사랑하시는 대상이기도 하지, 예수님은 이 사람을 위해 보혈을 흘리셨지, 성령님은 이 사람을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불러들이시기 위해 밤낮으로 뒤쫓아 다니고 계시고. 하나님께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그런데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 내겐 사람이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 그리고 사람에 대한 나의 시각이 예수님의 시각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를 깨닫게 된 후 나는 내 시각이 변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했던 것이다.

4.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나는 냉정한 사람을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은 대개 출세 가도를 달리는 것 같다. 그들은 여기 저기를 다니며 많은 일을 해낸다. 또한 정력적으로 활동한다. 목표를 이루어야 하고, 할당량을 채워 야 하며 계약도 맺어야 한다. 이들은 자신의 일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사람을 바라볼 때 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계획, 목표와 관련해서만 본다 사람은 이들이 목표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거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다. 출세 가도를 달리는 냉정한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이란 이용할 수 있는 도구 아니면 피해야 할 골치덩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냉정한 사람은 세상을 둘로 나누어 보는 경향이 있다 승자와 패자, 중요한 사람과 별 볼일 없는 사람, 살아 남은 사람과 반신 불수가 된 사람, 총명한 사람과 제정신이 아닌 사람 등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가 우연히 만난 사람이라도 평범한 사람이란 없다는 것을, 즉 살아서 숨쉬며 활동하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특별한 보화라는 것을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이들은 패자와 반신 불수가 된 사람이 어느 모로 보나 승자와 살아 남은 사람만큼이나 하나님께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쿠바, 리비아, 팔레스틴 사람이 하나님께는 미국 사람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 하나님은 죄수나 동성애자나 부랑자를 증권 거래인이나 의대생이나 신학생만큼이나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십자가의 용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 모든 사람을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을 하늘 나라의 가족이 되도록 부르셨다. 따라서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지 이들은 모두 형제나 자매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진리를 인식하고 이들을 하나님께 그런 의미를 떤 존재로 보기 시작하면, 좀더 부드럽고 온유하게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게 된다.

냉정한 사람들은 잘 들어주기 바란다. 상대방이 대단찮은 사람이 라고 무례하게 대한다면 -그들이 식당 여종업원일 뿐이라고 해서, 주차장 관리인일 뿐이라고 해서, 겨우 정육점이나 빵집 주인이라고 해서, 또는 겨우 촛대나 만드는 사람일 뿐이라고 해서 - 정신차리라! 하나님의 눈에  ‘…일 뿐’ 인 사람은 없다. 큰 일을 하고 있지 않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께는 다 특별한 사람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 한 것이다. 고용주는 직원을 해고하더라도 단순하게 생각하고 '목을 자르지는' 말아야 한다. 독신 남녀들은 사귀고 있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더라도 무례하게 '걷어 차지는' 말아야 한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소중한 사람임을 잊지 말라. 운전을 하게 되거든 차를 몰고 가는 중에 누군가가 당신을 향해 주먹을 흔들어도 맞받아 고함치지 말라. 성질급한 사람도 하나님께 소중한 사람임을 기억하라. 그러니 하나님의보화는 온유하게 다루어야 한다.

5. 하나님의 마음으로 느끼기

그러므로 우리같이 냉정한 사람이 온유함을 배우려면 첫째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로는 다른 사람의 처지에 서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온유한 사람은 선천적으로 감정 이입을 잘하고 남의 감정을 잘 공감하는 경향이 있다. 대조적으로 냉정한 사람은 상처 받고 마음 상하고 화가 난 사람을 보고도 '무슨 일이 제대로 안 돼 가나봐' 하고는 만다. 이들은 다른 사람과 공감하기보다 그들의 문제를 분석하는 데 훨씬 더 능하다.

몇 해 전 아내와 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학살이 저질러진 수용소가 배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좀 무거운 심리 영화인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나는 그 날 저녁 정말 싱글벙글이었다. 마치 학교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과 데이트하는 십대 소년의 기분을 느끼며 팝콘을 사고 팔을 아내에게 두르고 영화를 즐기기 위해 깊숙이 앉았다. 영화는 4분의 3쯤이 지난 무렵부터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소피는 두 아이를 양 팔에 안은 채 나치에 넘겨 줄 아이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있었다. 넘겨 준 아이는 틀림없이 연소실에서 타 죽게 될 것이다. '이거 왜 심각한 영화군. 그런데 좀 긴데, 팝콘 아직 팔고 있나? 하나더 사와야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아내가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팝콘은 좀 있다가 사기로 했다. 아내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내내 울었다.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지금 농담을 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조용히 집까지 차를 몰고 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아내가 왜 그랬는지 몰랐으나,마침내 이틀 후 아내가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왜 그렇게 분개했는지 이야기하고 싶어요. 전 양 팔에 토드와 쇼나를 안고 있는 제 모습을 그려 봤어요. 그리고 30초 안에 누가 죽고 누가 살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모습도요. 세상에 제가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있겠어요?" 아내는 단지 소피의 신발만을 신었던 것이 아니었다( '남의 신발을 신다' 는 표현은 '남의 처지에 서다' 는 뜻 - 역주). 아내는 소피의 양말을 신고 소피의 옷을 입고 소피의 차양 모자까지 썼던 것이다. 즉 아내는 잠시 동안 소피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등장 인물의 외부에서 영화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한 것이다. 사실 나는 아내가 왜 그렇게 영화에 큰 영향을 받았는지도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같은 냉정한 사람은 감정 이입이 쉽지 않다. 우리는 조금 느긋하게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도록 단단히 결심하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처지에 있다면 그 마음이 어떨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불구자가 되어 서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혼자 옷을 입거나 차를 몰거나 심지어 휠체어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교회에서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게 된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실업자가 되어 재산을 저당 잡히고 자동차세도 못 내고 아이들도 부양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소수 민족에 대해 별 다른 배려를 하지 않는 백인 동네에서 흑인으로 사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이혼을 하거나 남편을 여의거나 아이를 잃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신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암이나 치매나 에이즈에 걸린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남과 공감하며 남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노력을 한다면 우리의 굳은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콘크리트에 몇 줄의 금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하듯 사람들을 대하기

물론 온유함이라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온유해지려면 사람을 하나님의 보화로 보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사람들과 공감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 사람마다 드러내 놓고 칭찬해 주고 떠받들어 주어야 할 것인가? 내 가게를 선뜻 내주면 될 것인가? 집을 팔고 평화봉사단에 가입하면 될 것인가? 온유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성경에서는 사람을 대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대하듯이 하라고 말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7)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당신이 기도할 때 주님은 한마디 한 마디 귀 기울여 들으신다. 당신이 배우자, 자녀, 친구나 직장 동료에게 이같이 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텔레비전을 끄고 주의를 산만하게 할 만한 것을 다 치워 놓고 이렇게 말하라. "이제 들어 보세,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정말 들어 보고 싶어."당신이 실수할 때도 예수님은 일으켜 세워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여전히 사랑과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해 주신다. 당신이 함께 살고, 일하고,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 이같이 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당신이 외롭고 불안할 때 성령님은 곁에 머물러 위로해 주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당신이 위로와 도움을 주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성경을 펴면 그에 대한 증거가 수도 없이 나온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사 43:4). "(나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 :20).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시 103:13).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사랑받고 확신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신다. 그렇다면 당신의 사랑을 나 친구나 직장 동료에게 정기적으로 표현해서 당신이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 주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우리같이 냉정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기 시작하고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하듯이 그들을 대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결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배우자나 자녀는 첫 놀라움이 가신 후에 기뻐서 펄쩍 될 것이다. 직장 동료들은 고개를 흔들며 "분위기가 바뀌었어. 저 냉정하던 친구가 어떻게 된 거지?"라고 할 것이다. 피상적이던 우리의 우정은 점점 깊어져 따뜻한 형제와 자매의 관계에 이르게 될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곳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음을 알게 되면 교회는 실질적으로 부흥하게 될 것이다.

타고 날 때부터 온유한 사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메마르고 불만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가 온유함에서 자라갈 수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 하라. 타고 날 때부터 억센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으므로.



빌 하이블즈의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에서 발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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