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설교]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

2004.10.03 22:37

윤봉원 조회 수:1453 추천:211

사 3:1-42004100301

날자: 2004년 10월 3일 주전

 

제목: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

 

본문: 이사야 3장 1절∼4절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그 의뢰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공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 하실 것이며 그가 또 아이들로 그들의 방백을 삼으시며 적자들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1. 예수 믿게 되는 동기

 

요한복음 15장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너희가 세상에서 나왔음이니라 너희가 세상에 속해 있으면 세상이 저희 것임으로 너희를 사랑할 터이나 너희가 세상에서 나왔으므로 너희들을 핍박하는도다 핍박하는 것은 너희들 때문에가 아니고 너희들을 나오게 한, 세상에 붙지 말고 세상과 다른 자가 되어 세상에서 나오게 한 내가 너희들을 핍박받게 한 원인이요 또 나보다도 나를 세상에 보내셔서 대속의 역사를 베풀게 하신 아버지라. 그러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들을 미워하는 것은 너희들보다 먼저 나를 미워함이요 나보다 먼저 아버지를 미워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왜 온 세상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는 길, 세상에서 나오는 그런 길을 걸을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세상에서 살 때에 세상과 다른 도리 구원 도리가 있어 이 구원 도리로 말미암아 세상에게 핍박이나 미움을 당하는 일이 있지만 그것보다도 이 구원 도리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저들에게 오는 그 은혜와 구원의 가치는 세상에게 핍박받는 것보다 더 크기 때문에 세상에서 나와서 주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권능이 된다. 십자가의 도의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영원 무궁에 얻을 그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재세의 고난을 당해도 수지 계산을 맞추어서 십자가의 도를 자기가 따라가게 되는 것은 세상에서 오는 핍박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은혜가 더욱 넘쳐서 그것을 다 메우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하나되어 살면 아무런 애로가 없을 것입니다. 뭐 쪽믿음으로 믿는다고 아내가 갈빗대가 뿔라진다, 이혼을 당한다, 쫓겨남을 당한다, 또 집안에서 다 모듬벌을 받는다, 제명을 당한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불교도 있고 온갖 이종교들이 있는데 그들과 같은 종교를 믿으면 아무 핍박 없고 다 좋아하고 하나될 터인데 왜 독특한 예수교를 믿어 가지고 그렇게 집안을 어지럽게 하느냐?

 

그러나 이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온 세상과 다른 자존하신 유일하신 하나님 그분의 목적이 있고, 그분의 목적 달성의 진행의 선택이 있고, 이를 이루기 위한 예정이 있고, 창조가 있고, 보존이 있고, 섭리가 있고, 도성인신 사활의 대속이 있고, 중생된 자기 속에 지극히 큰 생명이 와서 내주해 계시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오다 가다 보니까 예배당에 가자 해서 끌려가 가지고 듣고 배우는 가운데에서 자기가 이상한 보배를 발견을 했습니다. 사람만이 아니고 사람 속에 참 영생하는 생명과 지극히 큰 능력이 와서 친히 역사하는 것을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하고 이렇게 되니까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 온갖 어려움을 당해도 도를 배반치 안하고 도인으로 걸어갑니다. 아마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고,

 

또 진주를 찾는 자가 아무리 돌아다녀도 진주를 못 찾았는데 진주를 만난 비유와 같이, 자기가 인생길을 해결해 볼라고, 이 세상과 죽음과 내세를 무엇인가 좀 그것을 궁구해 볼라고, 찾아볼라고 온갖 이종교에 돌아다니다가 아무리 다녀봐도 거게서는 자기가 찾고 있는 그 실상이 없는 것을 깨닫다가 이 기독교의 구원을 깨닫고 예수 믿기 작정한 그런 사람들도 있고 두 종류가 있습니다.

 

1) 선다씽

 

산다싱 같은 그런 사람도 불교의 독신자며 또 그는 인도의 왕의 아들로서 굉장한 그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아무리 거게서 불교 믿어봐야 만족이 없고 인생은 허무한 것뿐이고 갈 길이 없다는 그것을 그가 깨닫고 낙망해서 자살을 할라고 기차 오는 그 시간에 레일을 베고 누웠었습니다. 그랬는데 차가 곧 올 시간이 될 때까지 이제 그는 레일에 발통이 지나가면 그만 자기 머리는 박살이 돼서 죽어 버릴 터이니까 그래 죽는 것이 낫지 하고 자살을 계획하고 그렇게 누웠었는데, 그때에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셔 가지고 ‘산다싱아, 네가 왜 이렇게 여기에서 누워 낙망을 하고 있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인생길이 없기 때문에 나는 인생을 끝마칠라고 여기에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산다싱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겠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따르라.’ 하는 이 말씀을 하시는 그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그 시로 일어나 가지고 그는 그의 여생을 주님 주신 도를 따라서 구원을 이루어 갈 때에 그 높은 지위층 그 고귀한 층에서 수많은 박해가 있었고 일생을 박해와 박해에서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껍데기에서 오는 그 박해보다 자기 속에서 나오는 그 위로와 기쁨과 평강과 능력과 환하게 보이는 맺어지는 그 결과를 보고 그는 그런 어려운 걸음을 걸었으나 한번도 기쁨 없이 평강 없이, 유일한 자기가 행복된 자인 것을 깨닫고 감격해서 살지 않는 그런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세상을 떠날 때도 안 보여서 그는 아마 산 채로 승천했는가보다 이랬는데 그 후 얼마 뒤에 발견돼 보니까 자기가 늘 자주 가는 그 깊은 히말리야 산에 가 가지고 굴에서 기도하다가 세상을 떠나서 벌써 다 녹아지고 뼈만 좀 남았는데 그래도 그가 입고 다니던 도복이 남아 있어서 산다싱이라는 것을 발견을 했습니다.

 

그분이 자기 전기에서 말하기를 ‘나는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만일 십자가가 없으면 나는 주님에게 구해 가지고 십자가 있는 곳으로 나를 보내 달라고 하겠다.’ 하는 그 말을 자기가 간증한 것을 제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외부에서 오는 모든 어려움보다 자기 속에서 솟아오르는 그것이 더 큼을 알았고, 또 자기에게 더 생명과 평강과 행복을 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속에서 역사하는 그 역사로 외부의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어서 그는 평생 소원이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가 미련하고 우는 것이요, 슬픔 같고 고통 같지만 그로 인하여 자기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신령하고 고귀한 생명과 평강이 오는 것을 체험하고 체험했기 때문에 그는 하늘나라 가서 만일 십자가가 없으면 이런 재미의 수입과 성장과 전진이 없을 터이니까 나는 십자가 있는 곳으로 나를 보내 주십시오 하고 십자가 있는 곳에 살겠다 그렇게 말을 했다는 것을 기록한 것을 봤습니다.

 

2.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

 

1) 주 만군의 여호와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위에서부터 죽 읽어내려 보면은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 하는 것을 위에 다 기록했는데 여기에 와서는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요렇게 해 놨습니다. 여기에 주라 말은, 우리를 일차 창조도 내가 없는 데에서 나를 있게 하신 분이요, 또 타락한 것을 이차 창조 예수님의 대속으로 나를 이제 온전자로 있게 하신 분이요 두 가지, 두 가지 하신 분이 우리 주라. 이 두 가지 하신 분이 우리 주라. 두 가지로 주라. 우리를 책임 맡으신 주, 우리에게 있어야 될 모든 지도나 은혜나 필요한 것을 다 부족함이 없이 충만하게 주시는 주, 나를 안보해 주신 주, 이분이 이렇게 하셨는데 이렇게 하셨는데 이분이 만군으로 나타난 것은 뭐입니까? 만군으로. 만군으로 나타난 것은 싸움쟁이로 나타났다 그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만군으로 나타났다 말은 전투할 하나님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주가 전투의 하나님으로 우리를 대적해서 ‘너 한번 싸워 보자’ 하는 우리를 원수로 삼아 가지고 우리를 대적하시는 이 전투의 하나님으로 바꿔졌습니다. 주가 전투의 하나님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이렇던 주가 이런 전투의 하나님으로 바꿔졌데 그분이 또 “여호와께서”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와께서라 말은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으로 모든 계약을 선포해 놓고 이 계약대로 처리하시는 불변의 하나님이라 그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주, 만군, 여호와께서. 우리가 이 주님이 우리에게 한없는 긍휼과 은혜의 사랑의 주님으로 나타나 역사하신 주님이 하다 하다가 안 들으면 이렇게 사랑하시는 것만큼 미워하고, 열심을 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던 것과 정반대로 우리를 멸하시는 일에, 우리를 대적해서 멸하시는 일에 그전과 같은 열심을 가지고, 은혜 베풀 때의 열심과 같이 정반대로 우리를 멸하시는 데 열심을 가지고 역사하신다 하는 것을 다른 성경에 많이 말해 놨습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하는 이 말은 ‘내가 너에게 이런 은혜를 베푼 나인데 이제는 내가 너를 대적하겠다. 대적하되 내가 벌로 무조건으로 대적하지 않겠다. 너희에게 계약을 선포해 놓고 계약대로 이행하는 그거 계약을 준해 가지고 너에게 내가 심판하고 대적하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2) 자멸 행위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들을 제하여 버리시되” 예루살렘과 유다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 말기에는 이것뿐입니다. 예루살렘 유다뿐이오. 거게서 열 지파는 다 도망 가 버렸고 이제 베냐민 유다 지파 둘 있었는데 예루살렘은 중앙청이요 그 다음에 거기에 소속한 그 지방은 유다 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선포한 계약은 진리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다 해당되고, 개인에게도 해당되고, 단체에게도 해당되고, 시대에도 해당되고 다 해당됩니다. 요 심판하는 이치를 말했기 때문에 이치는 그 이치에 맞은 일이 있는 데는 그 이치는 따라가는 것이고 그 이치를 범해서 벌할 때에는 그 따라가는 것이, 이치는 지역에 제한 받지 않습니다. 국경에 막혀지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막혀지지 않습니다. 사회에도 막히지 않소. 어데든지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좌우에 날선 검이라, “하나님 말씀은 좌우에 이한 날선 검이라” 못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적응 안 될 데가 없습니다. 다 적응 됩니다. 어데서든지 다 적응 됩니다.

 

여기에서 의뢰하며 의지하는, 다른 것들을 의뢰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분개하셨습니다. 의뢰한다 말은 의지한다 말과 다릅니다. 의뢰한다 말은 그것에게 내가 받았다 그 말입니다. 의뢰한다 말은 내가 그것에게 받았고 또 앞으로 받을라고 지금 소망하고 있는 그 작용사를 가리켜서 의뢰라 그렇게 말합니다. 의뢰. 그에게서 내가 받았고 그를 의지하고 하는 것을 의뢰라 하는 것이요, 의지라는 것은 내가 받은 것은 말하지 안하고 내가 지금 모든 대외를 상대할 때에 뭘 배경으로 삼느냐 하는 배경으로 삼는 것을 가리켜서 의지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의뢰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다 절단을 내겠다 그 말은 우리들이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 이 하나님에게 얻어 가진 것이 아닌 다른 데에서 얻어 가졌다. 이것은 다른 데에서 받아 가졌다. 다른 데에서 얻어 가졌다. 이렇게 하나님 외에 다른데에서 받아 가졌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을 총칭해서 의뢰하는 것들이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제 자기의 실력으로 했다, 어느 인간의 배경으로 했다, 협조로 했다, 뭐 과학의 혜택으로 했다, 정권의 혜택으로 했다, 시대의 혜택으로 했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마지막 결론에 말하기를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이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에 있느뇨” 말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의뢰하는 것, 의뢰하는 것. ‘나는 이것은 내가 잘나서 내 힘으로 했다. 내 지혜와 총명으로 했다. 내 열심으로 했다. 내 명철로 했다. 내 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했다. 머리 싸짜매고 대학에 공부한 이 지식으로 했다. 나는 선천적으로 유별히 특수한 그런 은혜를 입었다. 후천적으로 모든 것이 조건 좋아서 수양 잘했다.’ 어쨌든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분 한 분이 줬습니다. 그분 한 분이 없는 가운데서 만드셨고 그분 한 분이 모든 것을 운영하시고 주권하십니다.

 

이래서, 의뢰하는 것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있는 것은 ‘주님 한 분이 나에게 주신 것이니 필요 있어서 주셨다. 어데다가 쓰라고 주셨을까? 이분이 나에게 한 분이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나에게 주셨다.’ 주셨으면 그 다음에는 이분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주셨으니까 감사하고, 그 다음에는 ‘이것은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는데?’ 내가 좀 더 생각해서, 소용 없는 것 없고, 감사하고, 그 다음에는 ‘이것을 내가 어떻게 활용을 해야 하나님이 나에게 모처럼 선물을 주셨는데 이 선물을 바로 이용해 가지고 그 선물의 효력을 내가 보고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기쁘게 만족케 할까? 어떻게 활용할까?’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라면 이것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그분에게 나 혼자 하고 말까 그분에 같이 나눠 할까?’

 

여러분들, 어떤 부자든지 그 부자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은 가난한 모든 자의 몫을 그에게 줘서 그가 혼자 담당해 가지고는 나눠 주기 때문에 저는 나눠 줌으로 제 본분을 감당하는 것이지 제것 가지고 주는 것 아닌 것입니다. 안 하면 도적질이 되고야 맙니다. 제것으로 주는줄 알면 교만해지고야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이게 맡기신 그분의 목적이 있고 소원이 계시니까 거기에 응하지 못하면 큰일 났다.’ 하는 그자는 필연적으로 겸손해지는 것이고 진실해지는 것이고 자기는 모든 행위가 삼가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 우리들이 이 의뢰하는 것 이 하나님 외에,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되는데,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받았다. 모든 것을 나에게 주셨다.’ 하는 것이 하나님 의뢰하는 것이요, 하나님 외에 ‘그렇지만 나는 이 직장이 들어서, 내 배경에 어떤 권력가가 들어서, 내 명철이 들어서, 내 노력이 들어서, 내 열심이 들어서,’ 하나님 한 분을 의뢰하지 안하고 다른 것을 의뢰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주가 만군이 됐고 만군이 계약 가지고 지금 달라 듭니다. 계약 가지고 판단할라고 달라듭니다.

 

이러니까, 주님 한 분만을 의뢰하지 안하고 무슨 양식을 의뢰하든지, 물을 의뢰하든지, 무슨 법률가를 의뢰하든지, 전쟁에 용사를 의뢰하든지, 무슨 예술가를 의뢰하든지, 복술가를 의뢰하든지, 요술가를 의뢰하든지, 배짱 있는 자를 의뢰하든지, 도둑놈을 의뢰하든지 뭘 의뢰하든지 어떤 것을 의뢰하고 의지하든지 주님 외에 의뢰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행동이라 하는 요것을 단정 지우십시오. 주님 외에 어떤 것이든지 의뢰하는 것은 요것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원수가 되는 이 무서운 자멸을 취하는 행동입니다. 이라니까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9절에.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요것을 우리가 알아서,

 

3) 의뢰의 대상

 

그러면 주님 외에 내가 의뢰하는 것이 뭐인가? 이것은 불택자와 택자가 다릅니다. 불택자는 죽는 날까지 고생도 없고 죽음도 평안하게 죽고 소득은 생각보다 넘치고 모든 것이 풍부하다 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을 분깃으로 줬기 때문에 제 맘대로, 죄에 대해서 너무 죄가 지나쳐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제재하지만 제 마음대로 죄짓고 마음대로 삽니다. 성도들이 그거 보고 ‘왜 저런 사람은 저런데 우리는 이런가?’ 해 가지고 탄식을 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하나님의 성결의 약속이 이거 적응되지 않는다.’ 이래 가지고 불만 불평 품다가 성소에 들어갈 때야, 그분이 참으로 영계에 들어가서 신령한 눈이 환하게 열려 가지고 금생과 내세를 일관해 가지고, 막힌 장벽이 없이 금생과 내세에 이제와 영원 장래를 일관되는, 일통되는 이 눈이 열리고 보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는 그 시간까지 반성하고 돌아오고 한번 머물 것도 없이 쭉 미끄러져 가지고 그만 풍덩 해 가지고 멸망받도록 그들에게 했다.’ 그보다도 더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자기가 깨닫고 ‘만일 그것을 깨닫지 못했으면 하나님의 아들들의 구원 이룰 시대를 다 이와같이 지금 오해할 뻔 했다, 속을 뻔 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3. 하나님 외에 의뢰하던 것을 회개하라

 

1) 회개치 않으면 교만해 진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 의뢰하는 것, 의뢰하는 것은 그분 외에 뭐에게 ‘어데서 어데서 받았다.’ 그에게 받아서 그분을 든든히 의지하고 있는 것을 의뢰라 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요 죄를 어쩌든지 회개해야 됩니다. ‘내가 뭐 지식이 이만큼 있고, 이만큼 활동이 있고, 젊고 기운이 있고, 구변 있고 이러니까,’ ‘네가 무엇이냐? 네 젊음을 의뢰하는구나, 네 지식을 의뢰하는구나, 우리 동지자들, 동지를 의뢰하는구나.’ 요것이 자멸 행위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의뢰하지 마십시오.

 

요거 우리가 회개를 해서 요거 하나 고치면 다른 것을 의뢰함으로 그것도 망하고 자기에게 망해지는 그 모든 결과를 필연적으로, 필연적으로 망하는 것 있고, 의뢰하고 의지함으로 필연적으로 망하는 것을 그 밑에 말해 놨고, 이제 필연적으로 망하는 것 외에 하나님이 능력으로 멸망시키는 것을 그 밑에 말해 놨어. 필연적으로 자멸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교만해집니다. 교만해집니다. 하나님 의뢰하지 안하고 다른 것에서 받았다. ‘내가 그래도 뭐 어째 머리 싸매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내가 이런 현실을 누리고 있지. 내가 건강하기 때문에 어떻게 됐지’ 그런 것을 다 하나님 외 다른 것을 의뢰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뢰하는 자에게 첫째 보응으로 오는 것이 무엇인가? 보응으로 오는 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입니다. 하나님에게 받은 것 아니고 피조물에게 받았고 이랬기 때문에 피조물에게는 겸손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야 교만할 수밖에 더 있습니까? 그 사람이 교만해집니다. 그 결과로 필연성으로 교만해지고,

 

2) 조직과 질서가 문란해 진다

 

그라고 난 다음에 그 밑에 보니까 모든 조직과 질서가 문란해집니다. 조직과 질서가 문란해집니다. 그분에게, 그분이 주고 받으니까 그분 비위 거끌리면 안 된다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 그분이 알지 못하심이 없고 그분이 모든 것 능치 못하심이 없고 그분이 정확하고 무오하고 완전하고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 비위를 맞출라면 거룩해야 되겠고, 그분 비위를 맞출라면 공의로워야 되겠고, 그분 비위를 맞출라면 깨끗해야 되겠고, 그분 비위를 맞추려면, 쉽게 말해서 죄를 범하지 안해야 될 거고 거짓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겼다는 요거 하나에서 모든 일이 해결 됩니다.

 

겸손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조심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자기 성결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다른 사람을 학대하지 안하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두려움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것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모든 질서와 조직과 모든 것들이 다 상하 대소 이것들이 질서 정연하게 되어지는 것이, 그분에게 모든 것이 달린 줄 알기 때문에 그분만 바라보고 그분을 자꾸 바라보니까 그분이 그런 분이니 그분 비위 맞추고 그분 생각하다 보니까 모든 것이 되어집니다.

 

그분을 무시하고 자기 지식으로, 자기 힘으로, 어떤 인간 힘으로 무엇이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 쳐놓고 교만하지 안하는 자 없고, 타락하지 안하는 자 없고, 그는 월권하지 안하는 자 없고, 남용하지 안하는 자 없고, 사치하지 안하는 자 없고, 자기 욕심대로 날뛰지 안하는 자 없습니다. 이것이 스스로 지은 죄값으로써 본능적으로 이것은 필연적으로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실 때에는 나중에 “자기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이러니까 요새는 하도 세상이 얄궂어서 아랫도리 하체가 드러난다 하니까 이거 뭐 아주 자기 몸 자랑할라고 뭐 코리아인가 뭐인가 막 모두 발가벗고 자꾸 이래 가지고, 하는데 그거 모양으로 그런 건 줄 알아도 그게 아니고 가룰 것이 없어서, 하체를 가룰 것이 없어, 부끄러운 줄 알지만 가룰 것이 없다 그 말입니다.

 

4. 하나님만 의뢰 하자

 

우리 주님 외에 딴것은 의뢰하지 맙시다. 의뢰하면 자체적으로 자동적으로 자연적으로 필연적으로 망하게 돼 있는 것이 첫째로 교만해지고, 하나님 모르니까 장관 배경으로 부자된 사람이라도 장관 하나만 비위 맞추면 되는 것이지, 장관이 도덕가입니까? 완전자입니까? 장관 저만 좋게 하면 되는 것이지 모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이런 것이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소? 자연히 그 사람이 교만해질 수밖에 없고, 그 사람이 월권할 수밖에 없고, 방탕할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 멸시하고 천대하고 압제할 수밖에 없고, 남용할 수밖에 없고, 사치할 수밖에 없고, 그라니까 음란하고 더러워질 수밖에 없고 이거 필연성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뢰하지 안함으로 말미암아 오는 모든 결과의 소생입니다. 거게서 나오는 생산품이오.

 

그라고 하나님께서 이제 치셔 놓으니까 아랫도리를 벌거벗고 다닌다. 벌거벗고 다닌다. 입을 것이 있어야 안 벗지.

 

요한계시록 18장에도 말하지 안했습니까? 신부와 신랑들이 그 결혼의 첫사랑에서 사랑하는 것도 당신의 혜택이 있어야 되지 당신이 내몰라라 하면 비참해집니다. 비참해져. 비참해지지 안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야 하나님 멀리 해도, 하나님이 안 도와 줘도 나는 살 수 있다.’ 하는 자가 있으면 손 한번 들어 봐요.

 

이래서, 나중에는 나머지기는 전쟁으로 다 쓸어서 없애 죽이기 때문에 요 간단하게 실례를 하나 들어 가지고 말하기를 여자 일곱이 들어서, 남자가 있어야지? 다 죽어 버렸으니까. 그저 혼자 저거는 옛날은 시집 못 갔다 하면 그것은 참 천물이고 수치기 때문에 한 남자에게 일곱 여자가, 일곱 여자면 일곱만 아니라 그거 하나님의 만수를 말한 것이니까 몇이 와 가지고 이름만, “내 떡 내 옷 입을 터이니까 그저 이름만 내 남편이라는 그 이름만 갈아 줘서 수치를 면케 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것도 얼마나 비참합니까?

 

이래서, 어쨌든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안하고 다른 것을 의뢰하면 비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망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닫고 요 시간에 요것을 고칩시다. 이제는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것,

 

의뢰가 뭐입니까? 내게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이 주셔서 내게 있는 거. 내가 앞으로도 가질 것은 그분이 주셔서 가질 것. 요것이 의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밉상스럽게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씩 고칩시다. 고쳐서 이제부터는 이 거짓말같아도 고쳐봐요. 고쳐보면 무엇이 나와요? 고쳐보면 경험이 나옵니다. 고쳐보면 자기 하는 일에 ‘과연 하나님이 같이 하신다. 이거야 하나님이 같이 하셨지, 같이 안한게 아니다.’ 하나님이 같이 하는 것이 보여집니다. 그 다음에는 체험 나와요. 자기 몸에 증거가 있습니다. 이거 고쳐봐야 합니다. 그러면 고치면 자연히 겸손한 사람 되어지고, 조심하는 사람 되어지고,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사람 되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기를 힘쓰는 사람 되어지고, 하나님께 남을 위해서 구하는 사람 되어지고 점점 깨끗한 사람 되어집니다. 하나님 축복으로 넘치게 되어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귀하게 할 때에 누가 천하게 만들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자가 안 되면 자기 행동으로 스스로 자멸을 취하게 되고 하나님이 그를 멸하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안하고 무엇으로 말미암았다고, 어떤 것으로든지 무엇으로 말미암았다고 이렇게 하면 과연 그러면 방종해지겠나 교만해지겠나? 그라면 더러워지겠나? 월권하고 남용하고 이 사치스럽게 그렇게 점점 자체가 부패해지겠느냐? 그분 한 분이 줬다는 이 사실을 깨달으면 정말로 그거 하나 가지고 모든 것이 점점 옳아지고 온전해지고 깨끗해지겠느냐? 요거 회개합시다. 지금 전부 이래 가지고 다른 것을 의뢰하는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우상이요 다른 말로 하면 우상인데 하나님은 우상을 멸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회개 안 하고 그라면은 좋은 날은 없습니다. 골만 빠지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그분을 의뢰하고 의지하고 이렇게 살면 헛된 정력을 부릴 수가 없습니다. 그분을 의뢰하니까 그분이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못해. 또 그분이 하라는 거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모든 사람이 절제되어지지, 행동이 절제되어지지, 욕심이 절제되어지지, 모든 것이 사욕이 절제되어지지, 인간 모든 관계가 절제되어지지 모든 것이 절제되어지는데 모든 마지막에 나머지기는 온전이라 완전이라 축복이라 하나님의 기쁨이라 이것밖에는 다른 것은 될 도리가 없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1989년 5월 9일 화요일 오전집회 요약}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4-11-0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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