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2009.06.28 21:12

윤봉원 조회 수:1377 추천:56

출 20:172009062802

날자: 2009년 6월 28일 주후
제목: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본문: 출애굽기 20장 17절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참조. 신 5:21)
1. 내가 가장 욕망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은 무엇을 가장 욕망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 가지지 않은 것 중에 다른 사람들이 가진 물건 중에서 가장 욕망하는 것은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요? 고급 자동차, 고급 학용품, 가방, 신발, 아파트, 멋진 장비, 옆집의 아저씨, 옆집의 아내, 옆집의 강아지 등 수많은 것들을 갖고 싶어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내 수중에 넣지 않고는 잠을 못 자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치 아니하는 욕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꼭 있어야 만족할 것 같고, 내 손에 없어서 잠이 안와서 어떻게 하면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한다면 그 사람의 행복과 만족이 없겠지요? 우리 육신의 아버지보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이 주시지 않을 때는 우리가 아직 받을 자격이 안되었거나, 있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에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그러면 위와 같은 욕망이 생길 때 우리는 어떻게 정의를 하고 행동을 해야 할까요? 본문을 통해서 길을 찾아 봅시다.
2. 탐내지 말라
2.1. 하나님이 주신 것 외에 마음에 욕망을 품지 마라!
제10계명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탐하다’의 원어적 의미는 “몹시 바라다, 갈망하다, 탐내다, 기뻐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너는 네 이웃의 집과 아내...등등에 대하여 욕망을 가지지 마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을 품으면, 우리는 그 욕망하는 것을 가지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이 본능적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을 품는 것은 이미 기회가 오자마자 실천에 옮기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행동의 이면에 있는 욕망과 마음에 세워진 계획을 이행하기 원하시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2.2. 탐심은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
이웃의 소유물이나 또 남의 이웃의 아내나 남편이나 짐승이나 물질이나 뭐 어떤 것이든지 그런 것을 탐내는 것 욕심내는 것 그것을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그런 욕심내는 그것이 탐심이요 또 그것을 보고서 저는 가지지 못했으니까 나는 못 가졌는데 그 사람은 가졌으니까 참 행복이다, 참 행복되십시오 이라면 좋을 터인데 제가 가지지 못하니까 시기한다 말이오.
“저 사람들은 있는데 나는 없다.” 이래서 용심을 부려서, 그 사람들 내게 없는 좋은 것이 있는 것을 깨졌으면 좋겠다, 뿌서졌으면 좋겠다, 극단으로 말하면 말이지. 저는 없는 집에 다른 사람은 좋은 집에 살고 하면 그놈의 집에 불탔으면 좋겠다, 부잣집에 불탔다 하면은 가난한 사람들은 좋아서 그 안 됐네 하면서도 속으로 웃고 좋아하고 속웃음이 나오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이 다, 그런 죄악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열째 계명을 지키지 안한 데서 나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축복할 권리, 또 감사할 권리,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이 있든지, 좋은 부부를 가졌다든지 좋은 가족들을 가졌다든지 좋은 무슨 재산을 가졌다든지 기업을 가졌다든지 좋은 명예나 권세나 지위를 가졌다든지 이랬을 때에 나는 거게 대해서 할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의무가 뭐이냐? 그럴 때에 내것과 같이 좋아하고 기뻐하는 그것이 첫째 계명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남의 행복을 기뻐하고 축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아끼지 안하고 줍니다. 왜? 주면 실수하지 안할 것이기 때문에 줍니다.
이래서, 우리가 이 탐내는 것에서 시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시기죄는 다른 사람들의 좋은 것 잘하는 것 보고 그걸 보고서 죄짓는 게 그게 시기죄요. 인류의 둘째 죄가 시기죄인데 가인이 아벨이 제사드리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고 받았으면 아, 좋다 하고서 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렸으니까 참 고맙다 이렇게 감사하고 찬성하고 좋아야 될 터인데 뭣 때문에 시기해 가지고서 그와같이 자손 대대가 멸망받는 저주를 받게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시기죄는 옳고 좋은 것 보고 욕심내다 보니까 마귀란 놈이 그것을 정반대로 변동되게 해서 욕심이 변해서 시기가 되도록 이래 해 버립니다. 시기가 되면은 시기에는 거게는 살인이 따릅니다. 에덴동산 아담 하와가 범죄한 그 원죄 범죄로 죽었습니다. 이러니까 시기죄는 그 독이 굉장히 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봐도 저 죄가 저것은 탐심에서 나왔나 그게 탐심이 벌써 성장돼서 시기가 돼서 나왔나! 그것을 과정을 잘 분석해서 그 악의, 독의 도수를 자기가 측량해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실패 봅니다.
이래서, 이 탐내는 것은 다른 이의 것을 탐내, 다른 이의 것을 자기가 가지지 못하면 욕심나고, 또 가지지 못하게 되면 시기 나오고, 거게서 불만 나오고, 불평 나오고, “하나님이 왜 저런 사람에게 주고 나는 왜 예수 믿어도 이런가?” 원망 나오고 시비 나오고 거게서 낙망 나오고 비관 나오고 오만 죄악이 거게서 막 다 쏟아져 나옵니다.
2.3. 탐심의 사례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아라. “저 사람들 회사에 일하는 일군 조거 우리에게 왔으면 좋겠다. 그 기술자 우리에게 데리고 와 가지고서 그 기술자 우리가 썼으면 좋겠다. 저 사람들 그 장사가 잘 되는데 그 장사하는 그 장소 우리가 차지했으면 좋겠다. 저 사람들 사업을 해 가지고 돈을 벌었는데 그 사업 내가 가로챘으면 좋겠다.” 이것이 열째 계명 아닙니까? 이웃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아내나 소나 나귀나 무릇 이웃 것을 탐내는 것, 이웃 것을 탐내는 그것이 열째 계명을 범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째 계명을 줄줄 자기가 외우고 있지만 자기 집에 있는 기술자가 없는데 다른 집에 기술자가 있으면은 “저 기술자를 어떻게 해야 우리가 빼 올꼬?” 해서 기술자를 빼 옵니다. 그러면, 아무리 계명은 이웃에 있는, 다른 집에 있는 기술자 네가 빼오지 마라 이래도 제게 필요하면 그만 다른 집에 있는 기술자를 빼 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웃 것을 탐내는 사람입니다. 알겠습니까? 이웃 것을 탐내는 사람이지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니라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또 다른 사람이 지금 하는 직업 그것을 어떻게 하면 지금 내가 가로 취해 볼꼬 해서 그만 무슨 일 좀 하다가는 겨우 알만하면 탁 배신해 버리고 제가 와서 딱 돌아서 가지고 그와 같은 사업체를 딱 시작하는 그것이 다 이웃 것을 탐내는 것이라 말이오. 그런 입장만 되면 그만 열째 계명 다 때려 치워 버리고 이제 내 버리고 그만 탐하는 고 사람이 됩니다.
일본서는 그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아주 사업 도덕이 분명합니다. 이래서 아무리 그 집에 가서 기술을 많이 배웠다 할지라도 제가 나와서 그와 같은 것을 차리면 그만 그 전체에 조합에서 유명한 명물이 돼서 조거는 그런 자이기 때문에 완전히 동결을 시켜서 앉아 죽도록 똑 동결시키고 아무도 거래 안 합니다. 그만 딱 버려 버린답니다. 그만 그 사회에서는 매장이 딱 돼 버립니다. 이라기 때문에 그런 짓 안 한다고 합니다.
2.4. 탐심에 대한 회개.
탐내지 말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에 무엇이든지 내게 오는 것이면 암만 원치 아니하는 것이 와도 내게 필요해서 주님이 주는 것인 줄 알고 달게 받고, 또 내가 아무리 원하는 것이라도 안 오면 내게 와서 해가 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이 안 주시는 줄 알고 물질에 대해서는 주님에게만 받으라 했습니다. 주님이 보관하라는 것만 보관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받은 것을 네 이웃에게 나눠 주라 하셨는데 나눠 주는 것도 주님이 주라는 것만 주어야 합니다. 또 내가 쓰는 것도 주님이 쓰라는 것만 써야 물질을 바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자기가 자연스레 신앙 생활할 때에 자기에게 오지 안하는 것을 탐하는 것은 다 탐심이오. 남의 집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아도 남의 형편 사정을 원해서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도 그것도 십계명을 범하는 탐심입니다. 우리는 이런 죄를 하나라도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런고로 고요히 생각을 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닌 무엇을 이웃의 것을 탐하는, 부러워하는 그런 것이 뭐가 있는가?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 경험으로 보면 꽉 찼습니다. 처음 믿을 때 꽉 차도 믿음으로 돌아서니까 다 버렸지요. 버려도 결단코 깨끗해지지는 않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과거에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웃 것을 탐냈습니다. 욕심을 부렸습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이미 다 고쳐 버린 것이지만 하나씩 그것을 들먹여서 주 앞에 고할 때에 우리는 시원해집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해 보면 알 것이오. 그것을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 위의 죄는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3. 좋으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받은 것으로 감사와 만족함으로 살아라.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것을 탐을 내지 말라는 이 말은 내 형편보다도 다른 사람의 형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생각을 이제부터 우리는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셔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전지 전능하신 분인데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주시려면 얼마든지 좋은 것 줄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왜 이럴까?” 하는 슬픈 일을 만난 것도 자기는 몰라도 제 삼자가 볼 때는 “아, 그 사람 슬픔을 당해야 되겠다.” 또 그 사람이 “나는 팔자가 왜 이럴꼬?” 이래도 “너는 배 좀 고파야 되겠다.” 우리 인간이 봐도 환한데 하나님 볼 때 더욱 그렇기 때문에 그래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현실은 자기에게 제일 적당하고 유리한 현실을 줬기 때문에 그 현실을 불만 불평하지 말고 그 현실에서 자기가 회개함으로써 헤어날라고 애를 써야 됩니다. 어떤 현실도 자기가 필요 있게 이용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라고 애를 써야 하지 현실을 원망해 봤자 자신만 지옥을 만들고 고통만 만들지 유익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의 처지와 형편을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망령입니다. 그게 망령이오. 자기가 그란다고 해 가지고 뭐 자살해도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요동합니까? 안 됩니다.
탐심은 자기가 하나님이 주신 분수와 정도를 넘어서 월권하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저주와 징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안해야 됩니다. 이웃의 모든 사람을, 이웃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이웃 사람을 탐내지 안해야 됩니다. 이웃의 남편이나 아내나 이것을 탐내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도적질 할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죄가 됩니다. 또 이웃의 남종이나 여종이나 이런 것은 물질 관계인데 이것도 안 됩니다. 어떤 물건이나 모든 사업이나 이런 것도 탐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적당하게 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현실을 만족하고 자기 현실이, 자기 형편과 현실, 자기 처지, 자기 정도 이것이 천하에서 자기에게는 그것이 제일 좋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이 사실을 깨닫고 좋은 건 줄을 알고 기다리면 좋은 결과가 맺어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남의 것을 남의 입장과 처지를 부러워하는 것이 그게 다 죄입니다. 자기 입장 처지 형편을 만족할 것이오. 자기가 죄를 지었으면 죄지은 나에게는 이 현실이 족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거게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다시 부활되고 소생될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더 많은 채워 주실 것이고 채워 주실 때 누릴 수 있는 실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공 되세요.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06-28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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