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은혜의 하나님

2004.11.29 06:13

윤봉원 조회 수:1395 추천:107

벧전 5:102004112801

날자: 2004년 11월 28일 주일 오전

 

제목: 모든 은혜의 하나님

 

본문: 베드로전서 5장 10절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1. 모든 은혜의 하나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베드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베드로전서 5:1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신앙 생활을 하시면서 이런 저런 환경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것 같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대하시는 모습을 보니 때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은혜는 커녕 너무 하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하는 의문을 가져 보신 적은 없는지요?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내가 잘못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 하고 있었던 부분을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롭고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죄를 심판하시며 자녀들을 징계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베드로에게 어떻게 베풀어 주셨는지를 살펴 봄으로 우리도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 자신 있게 고백 할 수 있는 은혜를 받도록 합시다.

 

2. 베드로의 인격

 

1) 변화 받기 전의 베드로

 

① 고기 잡은 사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밤 이전에도 “그르친”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예수님과의 동행에 첫발을 내딛기 전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호숫가에서 가르치고 계신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이 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위에 올라 거기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누가복음 5: 4-6).

 

여러분은 베드로의 반응에서 의심과 회의 그리고 내키지 않는 듯한 태도를 느낄 수 있습니까? 사실상 그는 “선생님, 선생님은 우리가 밤새도록 고기만 잡았다는 것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말씀대로 한 번 해보기는 하겠습니다”라고 비아냥 그리는 투로 말한 것입니다. 그들의 관계의 출발이 어색하고도 묘하게 시작이 된 것입니다.

 

② 물 위를 걷다가 빠짐

 

그리고 또 한 사건은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물 위를 걷다가 그만 물 속으로 빠져 들면서 살려 달라고 외친 사건이 있었습니다(마태복음 14:29-30). 경쟁심이 많았던 나머지 제자들은 아마도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갈 때 놀라면서 그러나 시기심을 가지고 유심히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24절에 보면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라고 말씀하신대로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도 자기들 중에 누가 가장 큰지 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놀라움은 베드로가 물 속으로 빠져 들기 시작하자 틀림없이 비웃음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는 망신을 당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베드로에게 그 얘기를 하며 놀려 댔을 것입니다.

 

③ 사탄아 물러 가라

 

또 한번은 마태복음 16장 13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으로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은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질문에 베드로는 “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4~19)라고 엄청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언을 하시자 베드로는 나름대로의 충성심으로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2)만류하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태복음 16: 23)라고 예수님의 호된 책망을 받고 창피를 당했습니다.

 

④ 과잉경호

 

다시 한번은 요한복음 18장 1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으로 예수께서 기드론 시내 저편 동산에서 잡히시던 밤에 예수님을 팔아 먹은 가룟 유다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이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와서 죽이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주님을 지킨다고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 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요 18:10) 성급하게 검을 휘둘렀다가 또 예수님으로부터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 18:11)라고 꾸중을 들었습니다.

 

⑤ 세 번 부인함

 

그리고 우리가 많이 들어서 익히 알고 있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태복음 26: 35)라고 단호하게 말한 직후에 일어났습니다. 틀림없이 주님을 부인한 데 따른 베드로의 쓰라린 아픔은 자신이 교만하고 어리석게 장담했던 것을 상기할 때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마태복음 26:69-75).

 

2) 변화된 베드로

 

① 오순절날 설교자로 세움

 

베드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오늘날까지도 그는 교만하고 충동적이고 의기양양한 사람, 덤벙거리다 궁지에 빠져 들기를 잘 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약속하신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을 때 오순절날 설교자로 누구를 선택하셨습니까? 누가 첫 설교를 하여 3,000명을 구원하는 특권을 누렸습니까? 그것은 바로 베드로, 아무것도 제대로 말하거나 행하지 못하는 것 같던 베드로였습니다(사도행전 2:14-41).

 

②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염

 

역사가 시작된 지 4000년이 넘도록 열리지 않았던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넓은 문을 처음으로 여실 때 누구를 사용하셨습니까? 바로 고넬료의 집에 간 베드로였습니다(사도행전 10:34-44).

 

③ 형세를 바꾼 베드로

 

예루살렘 회의에서, 새롭게 믿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행 15:1)라고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리새파 출신 그리스도인들에 대항하여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 15:7~11)라고 형세를 일변시키는 결정적인 발언을 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베드로였습니다(사도행전 15:6-11).

 

3) 또 다시 실패의 과거로 돌아간 베드로

 

이제 베드로의 실패나 실수 그리고 결점은 모두 옛날 이야기가 된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후 베드로는 다시 실패를 맛봅니다.

 

안디옥에서 그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신용을 떨어뜨리는 외식적인 행동을 하였고, 이로 인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게바{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의 새 이름}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 2:11~14)라고 사도 바울에게 책망을 들었습니다(갈라디아서 2: 11-14).

 

3. 모든 은혜의 하나님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사람, 그러나 이제는 결코 잘못을 행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이 또다시 엎드러졌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신약성경 중 두 책의 기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하나님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베드로전서 5:10)이라고 언급한 것이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의 마지막 권면이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베드로후서 3:18)인 것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베드로는 바울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라고 설명했던 것을 개인적으로 경험했습니다. “더욱 넘쳤나니”라는 표현에는 죄의 결과와 은혜의 결과 사이의 확연한 대조가 생생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 주석가인 렌스키와 존 머리는 로마서 5:20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묘사하기 위해 “넘쳐 흐르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로마서 5:20은 “그러나 죄가 풍부한 곳에 은혜가 넘쳐 흘렀나니”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물 한 컵에 검은 잉크를 몇 방울 떨어뜨리면 물 전체가 검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컵을 수도 꼭지 아래 가져가 물을 최대한도로 틀면 금새 모든 검은색은 사라지고 컵에는 맑은 물만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물에 대한 잉크의 영향은 커서 그것을 검게 물들였습니다. 그러나 수도 꼭지에서 나온 물은 “넘쳐 흐릅니다.” 그것은 너무나 풍부하게 그리고 큰 힘으로 흘러 잉크의 모든 영향을 다 치워 버렸습니다.

 

베드로가 바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의 실패와 죄는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가 아무리 많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것은 넘쳐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의 죄에도 불구하고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 죄와 상관없이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식으로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나 선행을 보지 않으시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보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며 그가 어떤 실패를 했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를 살펴보았는데, 여기서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대부분 베드로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성공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비치고 있든 우리 마음은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면에서 베드로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해 왔으며 영적으로 너무 많이 엎드러졌었습니다. 베드로와 똑같이 우리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우리에게 축복하시고 우리를 사용하시되 우리의 공적에 따라서가 아니라 사무엘 스톰즈가 말했듯이 “그분의 한없는 선하심과 절대주권적인 목적에 따라” 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4. 은혜 위에 은혜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며,” 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기록했습니다(요한복음 1:14, 16).

 

은혜 위에 은혜는 해변에 부딪히는 바다 물결과 유사합니다. 한 물결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또 다른 물결이 밀려옵니다. 물결은 동이 나지 않는 공급처로부터 끊임 없이 밀려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러합니다. 주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며, 우리는 결코 동이 나지 않는 그분의 충만함으로부터 한 축복 다음에 또 다른 축복을 받는 것 입니다.

 

우리는 단지 은혜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다는 사실에 유의하십시오. 월리엄 헨드릭슨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의 의미는 믿는 자들은 은혜의 장소에서 끊임없이 은혜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과분한 호의의 표현은 하나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또 다른 것이 도달합니다. 그래서 은혜 위에 은혜인 것입니다.

 

단순히 은혜라는 말보다는 은혜 위에 은혜, 즉 은혜의 끊임 없는 공급이라는 개념이 그의 충만한 데서라는 말과 더 잘 조화를 이룹니다. 그의 충만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무한한 공급 혹은 저장은 한량없이 흘러나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

 

5.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주인공이 됩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한하게 공급해 주시는 은혜를 왜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요한복음 10:10) 경험하기보다는 그토록 자주 영적 빈곤 가운데 살고 있을까요?

 

{일본이 욘사마(배용준) 한류 열풍의 근원은 “허”한 인본 여인들의 마음을 대표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에게는 해당되고 어떤 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요인들도 있지만, 우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두 가지 요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스크루지 영감 같은 분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피땀 흘려 일하기를 요구하면서도 빈약한 보수를 주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무 과장해서 표현했다고 할지 모르나 내가 믿기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왜 정확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존 뉴턴의 찬송가들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오, 내 영혼아, 구할 것을 준비하라, 예수님은 기도에 응답하기를 즐기시네, 기도하라고 그대에게 친히 말씀하신 주님, 거절하지 않으시네.

 

그대는 왕에게 나아오네, 거대한 요청을 가지고 나아오네, 그분의 은쳬와 능력은 너무 커서 아무리 많이 구해도 너무 많이 구한 것은 아니네!”

 

이 말을 진정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 가운데 얼마가 예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기를 즐기신다고 진정으로 믿을까요?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너무 커서 우리가 아무리 구해도 너무 많이 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을까요?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마지못해 기도에 응답하시며 그분의 은혜와 능력은 우리의 큰 요청들은 고사하고 우리의 기본적인 필요들을 채우기에도 충분치 못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사탄의 최초의 유혹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후하심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창세기 3:1-5). 그리고 사탄이 욥에게 사악한 공격을 가한 것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의심을 품어 그분을 저주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욥기 1:6-11). 사탄은 오늘날도 그 전략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주기를 꺼려 하시는 분이라는 생각은 사탄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하려면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거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으며,” (에베소서 1:3)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빌립보서 4:19). 이 두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 즉 영적인 필요와 일반적인 필요 모두를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타락 전뿐만 아니라 타락 후에도 아담과 하와에게 은혜로우셨던 하나님, 포로로 잡혀가 있던 유대 민족에게 선을 행하기를 즐거워하셨던 하나님, 베드로에게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셨던 하나님이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은혜롭고 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성품의 일부이며, 그분은 변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실로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그 포도원 주인과 같아서, 끊임없이 삶이라는 시장터에 찾아오셔서 “하루 노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자신의 포도원으로 들여보내시고 그들의 수고에 걸맞지 않게 과분한 노임을 지불해 주십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은혜를 더 경험하지 못하는 더 큰 이유는,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활”을 해야 하며,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공짜는 없다”는 원리-우리 사회에서는 사실임 -가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자활해야 한다는 이 잘못된 생각은 틀린 견해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우리 마음속의 비뚤어진 성향-교만-에 기인합니다.

 

유명한 신학자인 R.C.스프롤은 이렇게 쌨습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심 때문에 은혜를 의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은혜는 다른 사람들 즉 구걸하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복지 체계에 의해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자활하기를 원하며 우리 죄에 대해 보상을 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천국에 갈 만해서 그곳에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비록 스프롤 박사는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제에 대해 쓰고 있지만 그가 설명하고 있는 교만 내지 자존심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도 있습니다. 우리든 자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활하겠다고 교묘히 고집을 부립니다. 스프롤 박사가 말했듯이, “은혜는 다른 사람들 즉 구걸하는 사람들이나 위한 것이며,” 우리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활하지 않았다는 것,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겸손해지거나 때로는 창피스러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1시간만 일한 그 일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더위와 싸우며 11시간이나 일한 사람들과 자기들이 동일한 노임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어떻게 느졌을까요? 자기들이 받은 후한 선물에 대해 감사했을까요, 아니면 자신들의 삯에 합당한 수고를 하지 않았다고 최책감을 느꼈을까요? 그들이 흔히 우리가 그러하듯이 행위 중심의 철학을 지니고 있었다면 죄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포도원 주인의 은혜로움과 후함을 경험은 했으나 이를 즐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우리가 깨닫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를 삶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우리는 은혜가 아니라 공적에 의해 살고자 애쓰기 때문에 그분의 은혜를 즐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에 의해 하나님의 축복을 취득하려고 하다가 우리는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가 넘쳐 흐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리 브릿지즈의 “넘치는 은혜 변화된 삶”에서 일부분 인용}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4-11-29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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