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요한의 변화된 삶의 계기

2010.06.23 16:41

윤봉원 조회 수:1259 추천:51

계 1:9-202010062333날자: 2010년 6월 23일 수밤
제목: 사도 요한의 변화된 생애
본문:요한계시록 1장 9절∼20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1. 나는 왜 이렇게 변화가 잘 안될까?
저는 찬송가 505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을 좋아한다.
‘1절)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를 닮기 원함이라 예수의 형상 나 입기 위해 세상의 보화 아끼쟎네 예수를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속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2절) 무한한 사랑 풍성한 긍휼 슬픈 자 위로하시는 주 길 잃은 죄인 부르는 예수 그 형상 닮게 하옵소서 예수를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속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3절) 겸손하시고 거룩한 예수 원수의 멸시 참으시사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은 구주를 닮게 하옵소서 예수를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속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왜냐하면, 재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옛사람의 습관이 잘 고쳐 지지 않는 것을 볼 때마다 괴롭다. 또한, 목회자로서 예수 믿은지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변화가 잘되지 않고 제자리 걸음 내지는 뒷걸음치는 성도를 볼 때마다 기도가 나온다.
저만 그런지 저와 동감을 하는지? 궁금하군요!
짧은 나그네 한 토막 인생을 통해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활대속의 공로로 구원해 주시고, 지금까지 우리를 무한한 사랑과 긍휼로 인도하시고 양육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참 제자로 변화 성장되기를 원하신다. 그럼에도,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와 뜻에 어긋나는 나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볼 때마다 기도와 간구가 나온다. 그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까 많이 고민도 해 보고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고민과 문제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2. 사도 요한의 생애
2.1. 하나님 나라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말씀대로 살고, 예수님이 구주되신 것을 말로 전하고, 예수님을 어떻게 믿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이런 증거 생활을 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라는 말은 사도 요한이나 우리나 별 차이 없는 꼭 같은 사람이라 하는 것을 나타내서 “나는 너희 형제요” 이렇게 말한 것이다.
예수님이 땅 위에서 환난 당하신 것이 뭣 때문에 당하셨느냐? 자신을 이 당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세상에서 환난을 당했다.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니 빛으로 사실라고 하니까 환난이 됐다. 세상은 순전히 마귀화되고 하나님의 교회까지 다 마귀화되어 있는 세상에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니까 말씀도 그들에게 거리낌이 되고 모든 생활도 거리낌이 되고 행동도 다 거리낌이 됐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마찰의 연속이었다.
이래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는 말은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로 또 하나님의 나라 준비로 이렇게 살려고 했다.
“참음에 동참한 자라”는 것은 예수님이 참고 견디신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도 참았다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예수님이 생애 하심같이 사도 요한이 세상에서 핍박당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구주라는 증거할 뿐 아니라 자기 생활로 예수님을 나타내는 생활을 했고, 또 입으로 예수님의 이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교회에 배척당해서 밧모라는 그 섬으로 귀양을 갔다. 요한은 밧모라는 그 섬으로 귀양을 가서 거게서 지금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
2.2. 이전까지 받지 못했던 영감(靈感)을 받았다.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주의 날’이라 말은 오늘날 주일을 말한다. 주의 날이라 말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주님의 날이라는 말이다. 이 주일날은 주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그 역사를 하는 날이다. 구주의 날이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하시는 날이라는 의미이다.
이 주일은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일요일날 새벽까지 그 고난을 당하셨고 또 그다음에 삼 일이 되는 그 일요일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그러면 이 주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그 모든 대속의 공로와 예수님의 부활하심의 대속의 공로 이 두 대속의 공로가 일치되어서 하나 되는 그 역사를 일으키는 날이 주일날이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되신 이 구주의 구원 은혜를 주시는 날이다.
그런데 안식교에서는 그들은 안식일이라 하는 껍데기만 보고 이 주의 날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께서 사활로 그 구원 역사가 일치되어서 폭발되는 이 은혜 역사를 주시는 주의 날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이 주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성경 깨닫는 것은 전부 비성경적으로 깨닫고 살아가고 있다.
주의 날는 하나님 당신의 모든 사활의 대속의 은혜를 베푸시기로 정한 날이다. 이 주의 날을 지키지 않는 그 사람은 예수님이 구주가 되신 이 구주의 은혜를 그들은 받을 수가 없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 아주 우리에게 참 경고해 주시는 말씀이 있다.
사도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도 예수님에 대한 깨달음아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 남랄랐던 것처럼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 요한을 박해해서 잡아서 가마에다가 기름을 붓고서 기름을 팔팔 끓는 그 기름 가마 속에다가 그를 잡아넣었다. 죽이려고 그를 잡아넣었는데 거게서 죽지 않고, 아무 데도 상하지 않고 나왔다고 한다.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내 뒤에서” 성령의 감동이 사도 요한 앞에서 들린 것이 아니라 뒤에서 났다. 이것은 주일을 당하기 전에 사도 요한이 성신의 감화에 충만함을 받은 사람이지만, 이 주일을 닥치기 전에 성령의 은혜를 받았던 것과는 반대되는 은혜와 새 영감(靈感)을 받은 것을 여기에서 나타낸다.
자기 앞에서 나는 소리라면 이제까지 알고 있던 그 소리에 조금 더 명확하든지 권위 있는 소리든지 이럴 터인데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소리라.” 성령의 감동으로 큰 소리가 나는데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주님이 뒤에서 말씀하셔서 몸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그다음에 본 것이 일곱 금촛대가 보였다. 이것은 20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말하고 그 교회를 보았다.
그분이 일생동안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수고했는데 밧모섬에서 성령의 감동이 되었을 때 그의 눈이 열리고 음성을 듣고서 하나님의 교회를 봤는데 그날 본 하나님의 교회는 평생 보지 못한 교회를 봤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들어가기 전에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 성령 생활을 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에 주일날을 당해서 그가 영감(靈感)을 받았다. 그 영감(靈感)은 이제까지 받지 못한 자기의 정반대의 영감(靈感)이었다. 자기가 이제까지 경험하고 체험한 영감(靈感)이 아니고 그 경험하고 체험한 영감(靈感)의 정반대인 평생 처음 받는 그런 영감(靈感)을 받았다.
2.3. 예수님의 참모습을 보았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그러면 자기가 이제까지 교회는 귀한 것이라. 인간이 교회로 말미암아서 구원 얻는다고 그렇게 믿고 왔고 영감(靈感)으로 받아왔지만 교회가 이 세상에 금촛대라. 세상에 빛은 교회밖에 없고 교회만이 깨끗한 것이 없고 교회만이 영원한 것이 없는 것인 것을 봤던 것이다. 이제 교회관이 아주 달라져 버렸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교회관이 아주 달라졌고 그 교회 사이에 “인자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인자 같은 이는 예수님을 말한다. 인자(人子)라 말은 아주 사람 중에는 제일 말자, 제일 천물, 제일 가난하고 무능한 것, 아주 제일, 제일 천한 사람을 가리켜서 구약에 인자라고 계속 강조했다.
신약에서 이 인자는 예수님을 대부분 가리켰다. 왜냐하면, 그는 근본 부요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든 부요를 내놓으심으로 하나도 가지지 못했다. 그 부요를 다 내놓음으로써 가난해지고 무능해지고 천물이 되셨고, 아무리 사람들이 조롱과 멸치 천대를 해도 예수님께서는 아야 소리도 한마디 하지를 않았다. 그는 자기 자유로 이래 언행심사 하는 것은 하나도 하지 못하는 인간 중에 제일 자유 없는 사람이요, 제일 약한 사람이요, 제일 천한 사람이요, 제일 천대와 모욕을 받은 사람된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인자가 되신 것이다.
밧모섬에 가기 전에 사도 요한이 성신의 감동을 받아서 주님이 자기 위해서 낮아지시고 천해지시고 그렇게 고난당하신 것을 알았지만 밧모섬에 가서 성신의 음성을 듣고 난 다음에 이제는 교회관도 새로와졌고 예수관도 새로와졌다는 것을 교훈해 주는 것이다.
“인자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예수님께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은 것은 구약에서 대제사장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었던 것을 연상케 함으로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심을 보인 것이다. 이것은 요한이 지금까지 예수님은 대제사장이라는 말도 증거 했지만, 주일날 만나서 그가 대제사장이신 것을 자기가 영감(靈感) 받아서 새로 봤다는 것을 가리킨다.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연단한 빛난 주석같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연단 받으시고 고난받으심과 그분에게 속한 것은 전부가 다 성결 성결하다는 것을 상징해 주는 것이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지금 장중에 잡으시고 계시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2.4. 점점 참 자신의 모습을 발견(發見)하고 엎드러진 요한
“별이 있고 그 입에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추는 것 같더라” 지금까지 사도 요한은 주를 위해서 일생동안 충성했기 때문에 참 주님에게 대해서 흡족한 충성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 영감(靈感) 받아서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것을 깨닫고 보니 도무지 낯을 들 수 없게 너무 부끄럽고 너무 미안스러워서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같이 부시더라” 주님의 얼굴이 부셔서 잘 보지 못한 것을 말한다.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아래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요한은 이제까지는 자신이 예수님과 제일 가까운 줄 알고 예수님의 품 안에 기대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이렇게 제일 만만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가 밧모섬에 가서 주일날 다시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니까 기가 막혀서 놀랐다. 기가 막혀서 놀라고 그만 기절해서 그 앞에 엎드러져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
“그가 오른손으로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내가 산 자라 그전에 죽었었노라” 네가 지금 나를 지금 보고 놀라서 기절하지만 네가 나한테 품에 앉기고 기대고 이렇게 만만하게 지낸 그때 내가 내나 지금 내다. 네 눈이 어두워서 그때는 나를 못 보기 때문에 만만해졌지만 이제 지금 네가 보니까 또 그만 별스러운 주님으로 너와 거리 먼 줄로 알고 이렇게 두려워하나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때도 내나 내가 그때도 지금 내요 또 네가 앞으로 차차 충만함을 받을수록 너와 나와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과 네가 죽도록 충성하고도 마음에 그 충성하고 이만하면 주님을 사랑하지 안했느냐 기쁘게 하지 안했느냐 한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양심에 가책이 되었던지 마치 해가 힘있게 비추니까 눈이 부셔서, 주님의 얼굴을 부셔서 볼 수 없는 그 정도를 말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은 주님과 가까운 것을 알고 이렇지만 하늘나라 갈수록 점점 주님과 거리 먼 것을 깨닫게 하고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인 것을 점점 깨닫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우리도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성령의 감동이 온 것만큼, 감화를 받은 것만큼 주님은 크게 보이고 자기는 작게 보이고 주님이 하시는 일이 환하게 보이니까 자기가 자랑하고 한 교만한 그런 것이 아주 수치스러운 그런 일이라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은혜를 받아 누리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2.4.1. 바울의 경우
바울은 자신의 생애관이 다음과 같았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말만 찰찰 꾸며서 아름다운 말 좋은 말 사람들에게 이 수사나 꾸며서 이와같이 내가 전하지 안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약한 것과 두려워하는 것과 떠는 것밖에는 본 것이 없을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 앞에서 사니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저 사도 바울이 저거 병신이가 등신이가 못났나 저렇큼 간도 작으나?”라고 보였을 것이다. 큰소리도 한 번도 못하고 꽥 소리도 못하고, 마치 그 쥐가 고양이 앞에서 꼼짝 못하는 것처럼 주님 앞에서 꼼짝 못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가 말하고 전도함이 말로만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지 않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러니까 이 바울은 전할 때에 어쩌든지 말을 아름답게 꾸며서 사람들에게 설복이나 정복이나 이해시려는 데 욕망을 두지 않고 어쩌든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옳게 바르게 전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이 설교에 동행해서 당신의 능력이 나타나서 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하려는 그것을 바울은 주장을 했던 것이다.
3. 요한처럼 영감(靈感) 받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라!!
사도 요한은 영감(靈感) 받고 보니까 예수님도, 교회도, 예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행하신 것도, 자기가 주님에게 대해서 말한 것도 전부 기가 막혀서 죽을 일이라. 그러니까 그만 죽은 자와 같이 돼 버렸다. 모든 것을 정평 정가 할 수 있는 눈(영안)이 열렸다.
그래서 그는 주님과의 관계를 바로 할 수 있었다. 그랬을 때 주님이 그에게 오른손을 얹고 다음과 같이 위로 해 주셨다.
“내가 너 처음에 만나서 네가 나한테 그렇게 아주 뭐 만만스럽게 네 동무처럼 여긴 그때 내나 지금 내나 한가지다. 네가 그때는 내게 대해서 그렇게 버릇없이 만만스럽게 이래 해도 내가 너를 사랑하고 이랬는데 그때 너와 지금 너는 많이 차이가 있어서 많이 그래도 나에 대해서 겸손하고 제법 체면이 있고 도리를 지키고 그런데 내가 너를 지금 어떻게 하겠느냐? 이러니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면서 위로를 했었다.
요한은 이 위로를 받고 자신의 영안이 열렸고,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하여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고,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게 되었다.
우리 또한 이전까지의 삶과는 다른 차원을 삶을 살아가려면 영감을 받아야 한다. 사도 요한처럼 영감 받아 우리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이유와 근거와 목적되시는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남은 생애를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이런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인공 되세요.
참조: 87060810.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0-06-23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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