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고 치료하신 예수님

2010.01.24 17:50

윤봉원 조회 수:1244 추천:66

마 9:18-2621010012402

날자: 2010년 1월 24일 주후
제목: 살리고 치료하신 예수님
본문: 마태복음 9장 18절 -26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1. 나의 고민과 문제 해결책은?
우리는 살아가면서 각종 문제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신체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가정의 문제, 경제의 문제, 사회의 문제, 이웃과의 문제, 교회의 문제, 회사의 문제, 학교의 문제 등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다양한 문제를 만났을 때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습니까? 사람에게 상당하고, 부탁해 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내 힘으로 안되면 좀 더 힘센 사람들을 동원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울어도 보았을 것입니다. 포기와 좌절에 빠져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원망 불평을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기다려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방법들로 우리의 문제와 고민을 해결하려고 했을 때 해결이 잘 되었습니까? 어떻습니까?
그러면 성경에서는 이런 문제 해결책이 누구에 있다고 말씀하시는지? 또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상적인 방법인가 하는 것을 본문에서 알아보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2. 예수님은
2.1. 회당장의 믿음을 보시고 딸을 살리셨다.
본문에 직원으로 번역된 ‘a[rcwn’(아르콘)은 “통치자”, “군주”의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직원은 “지도자”(표준새번역)나 “회당장”(공동번역)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흐름을 볼 때 한 “회당장”으로 보는 것을 좋을 것 같습니다(참조. 막 5:22-43; 눅 8:41).
회당장은 자신의 딸이 방금 죽었으니 예수님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마 9:18)라고 간구(懇求)를 하였습니다. 이 회당장의 부탁을 받은 예수님은 그의 부탁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 회당장의 집에 찾아가서 아이가 죽었다고 크게 울고 통곡하는 의식으로 피리를 불고 훤화(qorubevw, 소란, 소동을 일으키다.)하는 것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그 집에 초상이 났을 때 이런 애도의식이 없는 것은 극단적인 수치와 무례였던 것이 당시의 상식적인 풍속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어떤 사람들(보통은 여인들)은 곡하는 것으로 직업을 삼은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주인을 위해서 곡을 해 주고 대가를 받고 살아가는 자들이 있었답니다.
그러면 이 회당장의 집에 울고 통곡하는 소리가 있었다는 것은 그 가족에 대한 주변 이웃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가정이었음을 우리는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하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보내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렘 9:17-18)
예수님은 이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처럼 울고 통곡하며 위로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가 한 말씀은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상당히 번민스럽게 하였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은 것과 자는 것은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분별도 못하시는가?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그 소녀가 혼수상태에 빠진 것으로 착각한 것일까? 예수님은 혼수상태에 빠진 소녀를 깨어나게 한 것일까? 이것은 단지 가정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것을 분별 못 하시는 분입니까? 예수님은 창조주시오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신데 모를 리 없습니다. 가족들과 많은 조문객이 왔음이 틀림없는 것을 보면 죽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 소녀는 실제로 죽었고, 죽은 소녀를 살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은 소녀를 잔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요한복음 11:11-14에서도 죽은 나사로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라고 한 말씀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 병의 최종 결과는 죽음이 아니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9:24의 말씀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면 안됩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무리들의 반응을 마태는 ‘저들이 (면전에서) 비웃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그들이 예수님을 우습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속 비웃음으로 예수님에게 모욕을 주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회당장의 딸을 살리실 이유가 어디가 있어 보입니까? 그것은 18절 회당장의 부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회당장은 그에게 절하면서 말하였습니다. 마태는 회당장이 예수님께 절하였다고 분명히 기록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의 진정한 권위(權威)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2:2; 8:2). 이러한 마태의 관심은 회당장이 예수님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마 9:18)라고 한 것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말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이 회당장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딸에게 손만 얹어도 자신의 딸이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신의 믿음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회당장의 믿음은 어떻게 보면 무모하기도 하고, 미신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의 방식을 못 벗어나는 유대인들과 달리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진보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은 믿음이라도 그가 가진 믿음은 “예수님의 손에 닿기만 하면 그에게 구원이 임할 것이다. 기적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확신에 찬 믿음이었습니다.
이러한 회당장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당시의 다른 치유자들처럼 주문을 외우지도 않으셨고, 주술적인 말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단지 소녀의 침상 곁에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았습니다.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은 것은 그때 당시의 품위 있는 회당장과 제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시신을 만지는 것은 부정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는 율법 조항보다 불쌍히 여김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죽은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치유가 완전했던 것처럼 이 소녀 역시 완전히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받은 것입니다.
2.2. 혈루증 여인에게 일석이조(一石二鳥) 선물을 주셨다.
본문에는 열두 해를 혈루증(하혈병)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님의 겉옷(옷단 술)을 만져서 나은 사건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여인에게 무엇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통한 치유의 체험을 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여인이 하혈로 말미암아 고생하며 살아가는 것을 예수님을 통하여 해결 받게 된 원인, 근거를 22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마 9:22)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 주는 것은 이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확신의 믿음이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녀가 깨끗함을 받은 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그 행위로 말미암음이냐? 아니면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나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답을 마태는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22)라고 기록해 준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치유 기적과 예수님의 말씀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해 줍니다. 아울러 말씀의 권위를 더욱 돋보이게 해 줍니다. 이러한 말씀의 권위가 역사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이 여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혈루증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그녀의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 8:8-9)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 9:2)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 9:29)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8)
그녀는 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구원까지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 시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얹어 죽은 딸을 살려 달라는 그 아버지의 간청대로 딸을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낫겠다는 혈루증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대로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는 성별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신분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가 보신 것은 믿음만 보셨습니다.
율법은 시신을 만지거나 혈루증을 앓는 여인과 접촉하면 부정해진다고 했습니다(참조. 레 15:19-33; 민 19:11-22).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자들과 기꺼이 접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에게 부정한 것이 닿았다고 해서 그가 결코 부정해지지 않습니다. 그가 죄인들과 어울리신다고 해서 죄인처럼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완성자로 오셔서 그들의 믿음에 화답하여 그의 사랑과 능력으로 율법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 전인적인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특별히 강조된 것을 “네 믿음이 너의 혈루증을 낫게 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3. 주님께 절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라!!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은 은혜의 때요 구원과 해방의 때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때에 본문의 두 사건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도 주님께 대한 분명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 되기를 원하심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회당장의 딸을 살리신 것도, 혈루증 여인을 깨끗하게 치료시켜 주시고 천국 백성 삼아 주신 것도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으로, 만지심으로 그들에게 치유의 역사를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시간부터 주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것을 확정(確定)지읍시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시든지, 만져주시든지 그의 긍휼의 역사를 온전히 믿읍시다. 그리고 그분께 나갑시다. 회당장처럼 절하며 주님의 권위, 권능, 사랑, 자비하심을 의뢰하며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우리 주변에 누가 방해하고 비웃더라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 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 밖에 없음을 확정짓고 포기하지 말고 나아갑시다. 그러면 반드시 우리에게도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역사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풍성하게 드러내시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인공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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