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본주의와 인본주의

2007.01.30 23:38

윤봉원 조회 수:1292 추천:284

창 13:1-132007012801

날자: 2007년 1월 28일 주일오전
제목: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본문: 창세기 13장 1절 - 13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창 13:1~13)
1. 나의 선택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항상 갈등과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갈등과 선택은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 우리의 사업의 장, 심지어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장에서도 갈등과 선택은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의 전기에 보면 ‘어떤 날 어떤 젊은 형제가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생활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저에게 완벽한 교회를 하나 소개해 주십시오. A perfect church 완벽한 교회를 소개해 주십시오.’ 그때 목사님이 웃으시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형제가 만약 그런 완벽한 교회를 찾거든 나에게 꼭 일러주시오. 나도 그 교회의 멤버가 될 것이요. 그러나 당신은 만약 그런 교회를 찾거든 당신은 절대로 그 교회의 멤버가 되지 마십시오.’ ‘그래서 왜요?’ 그러니까 ‘당신이 끼면 그날부터 그 교회의 완전은 깨질 테니까 말이예요.’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서 살아가는 우리 세상은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죄성이나 부패성의 필연적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의 장에 있어서 그러므로 갈등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갈등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갈등이 올 때 어떻게 우리가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인도하는 주인이 하나님과 마귀, 이 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한적인 자유이지만 마귀도 하나님께 권세를 받아서 세상 전체를 동원하여 우리 믿는 성도들을 자기의 밥으로 삼으려고 쉬지 않고 우는 사자처럼 날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구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성령님의 인도와 성경 말씀을 따라서 구별하며 살아가는 신본주의의 길과 시간이 아닐 때는 100% 마귀와 그의 졸개들의 영향을 받으며 인본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주의는 선택의 시작과 행동과정, 결과는 정 반대가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본문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2. 본문 주해
가. 축복을 받게 된 과정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는 말씀에 즉시 순종해서 떠나서 벧엘까지 이르렀습니다. 벧엘에 가 가지고 장막을 치고 있다가 너무 흉년이 들어 살기가 어려워서 그만 그곳을 떠나서 애굽쪽으로 슬슬 내려갔습니다. 애굽까지 가 가지고 애굽에 가서 큰 봉변을 당하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이 처음에 머물라고 하신 벧엘로 다시 돌아 올라오는 그간에 하나님이 축복을 하셔서 아브라함의 재산도 많아졌고 또 육축도 많아졌고 동행하는 조카 롯도 육축과 재물이 많아졌습니다.
나. 두 집안 간에 시비의 시작
살 면적은 한정되어 있고 두 집에 재산과 또 식구와 육축이 많이 되니까 두 집이 그 한 자리에 살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비좁아서 살지를 못할 만큼 됐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롯은 그런 사이가 아니지만 밑에 목자들이 서로 시비를 해 가지고서 두 집 목자들이 시비를 해서 그 시비로 인해서 차차 아브라함과 롯에게까지 올라와서 시비하게 됐습니다. 목축하기에 알맞은 곳은 한 군데뿐이고 한 군데는 목축하기에 안됐는데 그런 시비가 나서 벌써 장기간 그렇게 분요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응답 받고 내 놓은 선택의 말씀 8, 9절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다. 두 선택과 두 결과
본문에는 다 기록이 안 되어 있습니다만 아브라함은 가족들과 종들의 의견을 듣기보다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는 신본주의의 길을 선택하여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맡김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롯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축복을 찾는 신본주의의 길을 걷기 않고 식구들과 눈에 보이는 조건들을 생각하여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선택의 결과는 서로 갈려지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오셔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참 기뻐하셔서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 13:14~17)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떠나셨습니다. 그 뒤에 하나님이 축복하시니까, 가나안의 “자산에도 푸른 초장이 있다”(이사야 49장) 그렇게 말씀하셨고, 자기 가정 재산을 지키는 사람이 삼백열여덟 명이나 되는 큰 부자가 되었고, 네 나라가 연맹한 나라를 격퇴할 만한 그런 실력을 가졌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아주 아브라함에게 순종해서 아주 성녀가 됐습니다. 그 아들 이삭은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이 인류 중에 셋 의인을 말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러니까 식구들도 전부 다 성자들이 됐습니다.
그 반대로 롯은 어찌 됐던가? 롯은 그렇게 비옥하고 초장 좋은 소돔 들로 갔지만 목축이 안 돼서 나중에는 소 한 마리 양 한 마리 한 마리도 없이 전부 망했습니다. 가족들과 심지어 사위들에게도 말이 먹히지 않는 무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19:14). 그 부인은 유황불비에 맞아 가지고 소금기둥이 되었고,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로 강제로 겨우 살아남은 롯은 두 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잠자고 있는 동안에 부끄러운 짓을 하여 모압과 암몬 조상이 되었습니다. 롯은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벧후 2:8). 의인이라도 다른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 자기 마음이 상하는 것은 저주이지 축복은 아닙니다. 롯은 비참하게 그렇게 망하게 됐습니다.
3.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
가. 하나님의 뜻이냐 사람들의 뜻이냐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진 선택의 신앙 노선을 알 수 있습니다. 갈등과 분쟁의 현실에서 첫째 롯은 하나님이냐 자기들이냐 하는 이 둘을 두고 비중을 따질 때에  하나님을 취하지 안하고 그 현실에서 하나님도 참 놓기는 싫고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기는 싫지만 하나님이냐 자기들이냐 하는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하나님보다 자기들을 생각하는 그것이 앞섰습니다.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앞세워서 하나님은 내어놓고 선택해서 간 걸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냐 식구들의 눈치를 보느냐 이 상황에서 하나님을 더 좋게 하는 길을 택하고 사람들을 돌보지 안하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우리도 오늘 어떤 현실을 당하든지 현실(장사, 공부, 사업, 농사, 주부, 운동, 심지어 노는 일)마다 반드시 요 둘이 대두됩니다. 안 되는 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사와 가족들과 같은 사람들의 의사를 중해 여기느냐 하는 문제는 계속 대두 될 때에 아브라함의 길을 걸을 수도 있고, 롯의 선택의 길을 걸을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천국에서 승리의 시온산에 함께 설 자 144,000은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4-5)고 말씀하셨습니다.
나. 조건이냐 하나님의 축복이냐
우리의 현실의 조건 좋은 조건과 하나님의 축복과 비교할 때에 조건 좋은 것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택한 것이 아브라함의 택한 걸음이요 하나님의 축복보다 현재 보기 좋은 ‘조건 좋은 것이 제일이지’ 하고서 택한 것이 롯이 택한 것입니다. 현재 물질에 모든 현상의 조건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보다 더 낫게 여겨서 하나님의 축복이 없어도 조건 좋은 것을 택해 간 롯은 완전히 전멸했습니다. 인간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인간 의사를 따르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롯은 완전히 인간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조건을 바라 보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며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으로 따라 간 아브라함은 대 성공을 했던 것입니다.
4. 신본주의의 길을 걸으라
우리 현실에서도 하나님보다 사람을 귀중히 여기면 아예 인간 실패를 완전히 할 것을 우리가 각오해야 됩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귀중히 여기는 현실로 지나가면 그 사람은 인간 성공합니다. 인간의 의사들보다 하나님의 사와 비교해서 하나님 의사를 높여서 하나님 의사를 따르고 눈물 흘리면서 인간 의사를 부득이 해서 버린 사람들은 그 인간 다 차지합니다, 다 돌아옵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기 위해서 하나님 축복 바라볼라 하니까 다 세상 일 실패되는,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실패되는 모든 것은 다 몇 천 배 몇백 배로 해서 다 돌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보다 현재 그것을 아까와서 그것을 귀중히 여겨서 하나님의 축복이야 있든지 없든지 하고서 축복을 무시하고 현실에 존재한 이 현존을 귀중히 여겨 취급한 사람마다 그 결과로서 실패하지 안한 한 사람도 없습니다.
롯이 소돔 들 가 가지고서 적어도 아마 몇해 동안 몇십 년 동안은 살이 번들번들하게 짐승이 찌고 일시에 잘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말이 중요한데 롯을 결말이 너무나 형편 없는 불쌍한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롯과 같은 인본주의의 길을 버리고, 아브라함과 같은 신본주의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됩시다. 축복의 조상, 성공의 조상이 됩시다.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 2:23)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1-31 22:1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