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사니

2011.04.17 21:25

윤봉원 조회 수:880 추천:70

눅 13:22-302011041701

날자: 2011년 4월 15일 금밤
제목: 왜 그렇게 사니?

본문:누가복음 13장 22절∼30절
1. 차일피일(此日彼日) 미루고 있지는 않나?
우리는 사활대속의 은혜와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 주 부활절을 앞두고 우리 자신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도록 하자.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늘 해야 할 일, 지금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는 선수가 아닌가? 진단해 본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하루하루를 마쳐야 하는 우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도를 얼마나 많이 미루는가? 하루 세끼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서,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지만, 영의 양식을 먹는 성경묵상을 얼마나 많이 미루는가? 이 외에도 전도, 헌신 봉사, 나눔과 섬김, 등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께 매사를 기도로 간구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는 그 말씀을 따라 즉시 온전히 순종해야 하는 우리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명령과 뜻을 얼마나 많이 미루며 살아왔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과연 우리가 이렇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을 때 그 기회를 미뤄도 되는지 미루면 안되는지를 살펴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전 3: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고전 7:23)
2. 구원의 문인 예수님의 명령과 선언
2.1. 좁은 문(진리, 영감, 예수님의 피공로)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22-24a)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눅 13:22~24)
예수님께서 각 성과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 예수님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질문을 했다. 그때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라고 대답하셨다.
마태복음 7장에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을 크고 그 길이 넓어서 찾는 사람이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해서 찾는 사람이 적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믿을 때 좁게라 말은 그것은 그 아무나따나 까다롭게 믿는다 하는 그런 말이 아니다. 좁다는 말은 가령 여기에 공 두 개 있다고 했을 때 공과 공 사이에 제일 가까운 것은 몇 군데 있겠습니까? 하나이다. 그것을 말한다. 거기서 넓으면 넓은 것만큼 가까운 것이 아니다. 가까운 것은 꼭 하나뿐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점과 점 사이에 가까운 것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라. 옳은 거는 하나지 둘이 아니라. 그 하나의 옳은 것을 찾아가라 하는 그 말이다.
좁은 길로 가라 말은 그 사이비한 것 중에도 자꾸 가리고 가려서 하나만 되는 옳은 것 그것을 찾아가라 하는 그것을 가리켜 좁은 문으로 말한 것이다. 이것을 좀 더 넓혀 말하면 성경 말씀인 진리, 영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말하는 것이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일 5:8)
그래서 우리는 어쩌든지 보다 좁은 문으로, 보다 좁은 문으로, 자꾸 문에서 자꾸 점점 좁은 문으로 좁은 문으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써야 한다. 더 진리 안으로, 더 영감 안으로, 더 사활대속 안으로 들어가려고 힘써야 한다.
이것도 진리는 진리나 그 진리보다도 더 깊은 진리로 더 바른 진리 안으로, 또 영감 안으로, 그것도 영감은 영감이지요. 영감 그 영감보다 더 강한 영감, 더 뜨거운 영감으로. 예수님 대속의 피공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2.2. 신앙에는 기회가 한정적이다(24b-26)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눅 13:24~26)
예수님은 다음으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가는 자가 많으리라’라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이 말은 힘쓰지 않고 그저 설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게 좋다.' 해서 들어가기만 구하는 그런 사람 가지고는 안 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또,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은 그 밑에 보면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문 닫기 전에, 기회가 오기 전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야 하지 기회 놓치면 안 되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2)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는 구원의 기회를 주셔서 하루를 살았다. 그런데 오늘 하루도 주님이 기대하시는 대로 구원의 기회를 영생의 구원으로 이룬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명심할 것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라고 말씀하신 말씀이다. 그 말은 이 힘쓰지 않는 자는, 그 기회 안에 힘쓰지 않는 자는 들어가지 못하고 또 벌써 기회가 지나가 버리면 안 된다는 단호한 선포의 말씀이다.
죽는 날까지 언제든지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있다. 자기가 회개할 기회도 있고, 성화구원을 이룰 기회가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니고 한정되어 있다는 선포이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12:15-17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2:15~17)
착각은 자유이지만 구원에 대한 착각은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면 한 그것은 영원한 후회와 탄식거리로 남기 때문이다. 기회 있으니까, 우리의 강팍한 마음으로 '뭐 회개는 아무 때 해도 되지' 하지만, 본인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회개의 그 시기가 있다. 그 시기 안에서만 그렇지 시기를 지나가 버리면 하나님을 욕을 보일 대로 보이고 걍퍅할 대로 강팍했고 대적할 대로 대적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버려 버립니다. 그 시기 놓치면 안 돼요. 그러기 때문에 교만과 강팍은 자멸하는 행위이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문 안에서 저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는 그가 누굽니까? 내나 예수님 당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당신이 기회가 지나가고 문을 닫은 다음에는 다시 그 사람에게 대해서 냉정하다는 것이다. 주님이 얼마든지 긍휼을 베푸시지만 기회를 놓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냉정하기가 짝이 없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에 성전 밖마당이니,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로 말해 놓고 밖마당은 다시 취급하지 말아라 말씀하셨다. 갈대 같은 자로서 측량하되 성전 밖마당을 측량하지 말아라 하는 것은 벌써 그것은 그 문을 닫았다는 말이다. 알겠습니까?
이걸 언제든지 뭐 죽을 때까지 당신의 긍휼이 꼭 같다 그래 생각지 마라. 당신이 우리에게 이래 개인마다 이래 권고하는 게 있는데 그 강팍을 부리고, 자꾸 그때는 영감이 오고 이래야 하겠다 저래야 하겠다 그렇게 하는데 그 강팍을 부려서 기회를 놓쳐 놓으면 다시는 주님을 만날 기회를 못 만난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눅 13:25)
주님은 냉정한 분이다! 냉정한다. 주님을 언제든지 '그분은 아무래도 참는 분이다 그분은 아무래도 용서하는 분이다' 이렇게 생각지 마라. 그분은 굉장히 까다로운 분이다. 아주 까다로운 인격을 원만한 인격을 교제하면은 그분의 모양을 볼 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인격이 신앙 인격이 위대할수록, 또 이 세상 또 인격이 위대할수록, 얼마든지 용서하는 것 같고 뭘 들어도 감당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 복수성은 굉장한다. 사람이 위대해 갈수록이 복수성이 크다.
복수성은 하나님이 제일 복수성이 강하시다. 그러기 때문에 성자들은 복수성이 강하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자기와 안 되는 대립이 됐으면 생명을 아끼지 안하고 그저 뿍뿍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 신앙가들이다.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이제 그 말한다. ‘우리는 주 앞에서’ 그러니까 주님이 문을 닫고 안 열어 주니까 주님 앞에 친하니까 말할 것 아닙니까?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주님에게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이 말은 주님과 같이 생활했다 말이다. 주님과 같이 생활했다 그 말이다. 먹고 자고 같이 생활했다 그 말이다. 만만하게 생활했다.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저 여게 가르치고 저게 가르치고 뭐 자리를 가리지 안하고서 자꾸 이렇게 가르치고 자꾸 말하고 이렇게 많이 말해 줬다 말이다.
장소를 가리지 안하고 그저 늘 주님이 계속해서 말씀해 주지 않습니까? 만나면 천국에 대한 말씀을 가르치고 이 말씀 저 말씀 자꾸 이렇게 가르치고 하니까 귀 넘어 듣고 없이 봤지만 요렇게 냉정해진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지 안했습니까?” 너거가 “주님하고 같이 생활하지 안했습니까? 생활도 같이 했고 또 우리가 길에서고 들에서고 항상 가르치지 안했습니까?” 그렇게 하리니 말이다.
‘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예수님이 가르친 것은 이제 이 좁은 길에 들어서라고, 좁은 길에 들어서라고 말씀하신 건인데 좁은 길이 아니고 전부 다른 엉뚱한 길에 가서 세상 생활하다가 이렇게 주님의 교훈을 다 만홀히 여기고 다 업신여기고 이래 왔으니까 너거들이 오는 그 자리는 나는 내가 모르는 자리요,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좁은 길에 들어서 걸어갈 때에 주님과 상관있지 좁은 길을 떠난 자는 주님과는 상관이 없다.
2.3. 행악하는 자는 다 심판을 받는다(27-28)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27)
행악(行惡)은 일반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악이라 하는 그게 아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모든 피조물 중심은 다 악이다. 민족 중심, 인류 중심, 국가 중심, 뭐 문화 중심, 과학 중심 무엇이든지 하나님 당신 중심이 아닌 것은 전부 악이다.
이래서, '행악하는 자들아' 이 말은 전부 구속하신 주님 중심이 아닌 그 모든 중심을 가진 그것은 당신에게는 상관이 없다 그 말이다. 요것으로 심판한다. 그러기 때문에 악은 다 심판을 받는다.
그러기에, 자기가 악으로 선교사 한다. 악으로 선교사 노릇도 하고 악을 가지고 부흥사, 목회 성공, 악으로 순생도 하고 악을 가지고 순교도 한다. 악을 가지고 순교도 한다.
순직자들이 세상에 많고 순족자들이 많고 순국자들이 많다. 그 사람들 다 죽음을 내놓은 것은 무엇으로 내놨습니까? 하나님 중심 가지고 내놨습니까? 악 가지고 내놨습니까?
문제는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문제이다. 하나님 중심인 사람이 실수해도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신부가 아무리 다른 것 뭐 돈을 잘못 썼다. 뭐 재를 저질렀다 해도 그것은 남편이 책임질라 하니까 힘만 들었지 그렇다고 버리지는 말라 했다. 음행한 연고 외에는 버리지 마라. 이혼하면 안 된다.
그말이 무슨 말입니까? 당신을 주로 모시고 당신 중심으로, 당신 중심 당신 위주로 당신에게 피동으로 이렇게 사는 그것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담당하지만, 당신을 버리고 악을 그라면,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 이거 있는 거는 하나님이 용납 안 한다. 안 하기 때문에 기본구원은 있지만 안 된다, 그것은. 건설구원은 다 헛일이오.
그래서,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에서 우리가 아무리 배워도 이것을 공을 들여서, 생각해서 쓰면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고 조심하고 자기가 참 구원 이루는 사람이고 이것을 업신여기는 자는 그자는 벌써 하나님 앞에 버려서 화인을 맞아 놓으면 헛일이다. 화인도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은 아무리 양심 쓸라 해야 양심 못 씁니다. 양심대로 하지 못한다.
이러니까, 우리는 기회는 언제든지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기회가 언제든지 있다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28)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이들은 예수를 잘 믿은 사람들이다. 믿음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 이 사람이 지금 어두운 바깥에 쫓겨나 가지고서 거게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 이들은 믿음으로 온전히 살지 않아서 지옥 간 자들이라고 하면 다음의 말씀과 배치가 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
따라서 창세전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택함 받은 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천국은 간다. 그런데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는 자들은 어디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일까? 시편 기자는 여기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 1:5-6)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는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자기 논리로 호소했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눅 13:26)
이것을 오늘날 상황으로 적용해보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진광교회에 다녔는데요? 나도 기도 했는데요? 나도 희생 봉사를 했는데요? 나도 반사 했는데요? 나도 건축헌금했는데요? 나도 주일을 열심히 지켰는데요?”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할 것은 이렇게 하는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선으로 했느냐? 자기 중심 피조물 위주인 악으로 했느냐? 의 문제이다.
사활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하늘나라가 가기는 가지만 구원의 기회를 다 허랑방탕하게 보내고 허비한 자들, 악한 행실로 산 자들은 의인의 회중, 영광스런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는 영원한 불쌍하고 부끄러운 자들이 된다는 말씀의 선포이다.
2.4. 믿은 순서가 아니라 순종과 충성의 순서로 결정된다.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눅 13:29-30)
이 말씀은 나그네 인생동안 구원을 이룬 결과에 대한 말씀이다. 이 땅에서는 먼저 예수 믿은 사람이 전반적으로 뒤에 믿은 사람들보다 인정과 대우를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가 있을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눅 13:30)
어떤 마음의 상태로, 어떤 순종과 충성의 상태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함을 지적하신 말씀이다.
3. 기회를 놓치지 말고 마음, 목숨, 힘, 뜻 다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우리는 주님의 피에 팔린 주의 종들이다. 우리의 삶의 이유와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성스럽게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든지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너 왜 그렇게 사니?”라고 질문하신다면 우리는 “아버지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만난 현실에서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뜻인 진리, 영감, 피공로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서 사는 삶에 우리의 마음, 힘, 뜻, 목숨 다 해야 한다. 기회가 계속 있는 것이 아니라 한정적이기 때문에 시간과 기회를 낭비할 여가가 없다. 일생을 열심히 살고 난 이후에 구원의 문(의인에 회중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갈미 있는 자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심판대 앞에서는 믿음의 순서가 아니라 순종과 충성의 순서가 중시됨을 명심하고 이제부터라도 마음, 목숨, 뜻, 힘 다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힘써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토록 해와 같이 별과 같이 빛나는 영광스런 주인공이 되기를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주인공되세요.
참조: 88031478.
셀모임 나눔제목
☞ 본문(눅 13:22-30)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 좁은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을 못 얻을 수 있다고 선포하심.
※ 구원의 기회를 무한정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한정적으로 주시는 분
※ 나중된 자로서 먼저되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될 자도 있다고 하심.
☞ 내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 모든 현실에서 진리, 영감, 피공로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는 자가 되라.
☞ 구원의 기회를 이런 저런 핑게로 차일피일 미루지 마라.
☞ 예수 믿는 순서가 아니라 얼마나 열정적으로 순종과 충성을 했느냐가 관건임을 명심하고 마음, 힘, 뜻, 목숨 다해서 충성하라.
* 셀 모임 하기 전에 미리 나눌 체험담을 준비하여 나눕시다.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