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

2011.04.06 20:52

윤봉원 조회 수:905 추천:76

민 15:1-162011040633날자: 2011년 4월 6일 수밤
제목: 소망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
본문: 민수기 15장 1절 - 16절(찬송 353장)
1. 어둠의 긴 터널을 걷고 있는가? 소망의 문을 보라!!
우리는 살다 보면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긴 어둠의 터널을 걷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저 역시 대학생 때 장사를 하다가 약 7년 이상의 긴 터널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너무너무 힘들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그 터널을 통과하고 난 이후의 삶은 그 터널을 통해서 나를 바로 잡자 주셨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 주셨으며,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는 중요한 안내판 역할을 했음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
지금 혹시 흑암, 생지옥과 같은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희망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난 과거를 돌아보게 되었고, 지금까지 저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묵상하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아울러 앞으로는 더욱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을 상상하니 기쁨과 찬송과 소망이 넘친다.
우리는 이 본문을 묵상하기 전에 이전까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본문의 흐름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민수기 11장에서 고기를 먹지 못해 원망 불평이 가득했던 이스라엘에게 메추라기를 넘치도록 주었더니 그것을 욕심스럽게 주어 못았다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기브롯핫다아와’에서 탐욕을 낸 자들을 죽이신 사건을 기록해 주셨다. 12장에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다가 미리암이 문둥병이 걸렸던 사건을 기록해 주셨다. 13-14장에서는 각 지파당 한 명의 대표를 세워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한 후 보고를 하는데 부정적인 보고를 하여 백성을 울렁울렁 거리게 했던 열 정탐꾼을 죽이신 사건을 기록해 주셨다. 이러한 연속적인 불순종과 반역 사건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던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민 14:32-33)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제사의 규정들을 말씀해주심으로써 불순종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음을 보여 주셨다. 어떻게 보면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실패(13-14장)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15장)이다. 광야에서 순종하는 데 실패했지만, 가나안에서 생명을 누릴 길을 열어주시겠다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의 대상은 이방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할렐루야!!
어두운 터널에서 소망의 문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말씀이다.
2. 하나님은?
2.1. 전적 은혜로 구원의 약속을 이루심(1-2)
백성의 불신앙에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4:30)고 맹세하신 하나님은 새로운 세대를 일으켜 그 땅에 들어가게 하신다. 거듭된 불순종과 반역에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게 이행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주권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본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볼 때는 구원 받을 자격과 조건이 전혀 되지 않음을 우리는 지금까지 묵상하면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던져 주시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내가 주어 거하게 할 땅에 들어가서 (민 15:1-2)
이스라엘은 가데스에서 불신했고 호르마에서 패배했지만, 가나안 땅에 자신의 나라를 세울 하나님의 계획만은 변함이 없었다. 광야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들어가는 자들은 어떻게 생명을 누릴 수 있는지 보여주신다. 특히 광야에서는 얻을 수 없고 가나안 땅에서만 얻을 수 있는 농산물을 소제 목록에 포함시킴으로써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이것은 광야의 여정에서 이 백성과 신뢰 속에 교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기대를 담은 명령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완악함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을 이루실 뿐만 아니라, 거기서 그들로 하여금 제사를 드리게 하실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약속에 대해서 온전히 신뢰하도록 도전을 주시고 있다. 우리 주변 상황이 어떻게 혼란스럽고 복잡하더라도 하나님은 신구약 성경에 약속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 믿게 된다. 그 약속의 성취는 우리의 연약함이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과 긍휼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할렐루야!!
이 은혜를 경험한 성경 인물을 우리는 바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전 사울이었을 때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행 9:1-2)
이런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난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당당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우리 또한 이런 은혜를 하나님이 베풀어 주셨기에 지금 살아 있는 것이다. 다 같이 한 번 합시다.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2. 감사의 제사를 원하심(3-12)
2.2.1. 향기롭게(3, 7, 10, 13, 14), 예비하여(5, 6, 8, 12, 13) 드려라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고, 예물을 드리게 하신 것은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받으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모든 것은 2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기초한다. 그 백성은 불신앙, 불평, 반항이 끝나고 이제 은혜 안에서 제물을 드리며 기쁨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고백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이다.
‘여호와께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으로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는 (민 15:3)
‘전제로 포도주 반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화제를 삼을지니라 (민 15:10)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화제, 즉 번제와 희생제를 드릴 때 함께 드려야 하는 소제와 전제를 소개한다. 이스라엘은 세 경우에 화제를 드렸다. 서원을 이행할 때, 자원하여 낙헌제로 드릴 때, 절기에 제사를 드릴 때이다. 이들 제사의 목적은 하나였다. 모든 화제와 전제로 드리는 제물은 “여호와께 향기롭게 하기 위해서” 드렸다.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수립하는 수단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성경묵상, 성경공부를 하며, 삶의 예배를 드리는 목적은 무엇인지를 점검해 보게 하는 말씀이다.
‘그 예물을 드리는 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일에 기름 한 힌의 사분지 일을 섞어 여호와께 소제로 드릴 것이며 (민 15:4)
‘소제’(4)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로서 가난한 사람들도 조금만 정성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었다. ‘십분의 일 에바’는 한 오멜이며 약 2.2리터에 해당한다(출 16:36; 레 5:11; 6:13; 민 5:15). ‘힌’은 약 3.6리터이며 따라서 한 힌의 1/4은 0.9리터 정도가 된다. 소제와 전제의 분량이 제물의 크기에 따라 차이가 난다. 희생제물의 등급에 비례하여 소제와 전제의 양도 많아지고 있다. 또 짐승의 수효가 많아질수록 곁들이는 제물, 즉 곡식과 기름과 포도주의 양도 많아져야 했다(12절).
또 특별한 서원이나 자원제 혹은 절기 제사를 드릴 때, 번제나 화목제에 소제(곡식제사)와 전제(음료제사)를 첨가하도록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궁극적 모습은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속죄와 회개를 나타내는 제사가 하나님을 향기롭게 하며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한다. 우리의 예배에는 무엇이 빠져 있습니까? 예배할 때 내가 받을 은혜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먼저 생각합니까? 내 시간과 물질과 은사와 관계들은 하나님께서는 받으실 만큼 향기롭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감사하는 백성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만난 상황을 볼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활대속의 은혜, 처음 사랑을 기억함으로 가능하다. 아울러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에 약속하신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신실하게 이루어 주실 것을 믿음으로 가능하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긍휼하심을 믿는 것을 본능화함으로 가능하다. 이렇게 믿고 감사하는 사람은 이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즉, 온전한 천국 백성답게 감사와 찬송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1-32)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에 향기롭게 드리는 것과 예비하여 드림이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지금도 하나님에 나아가는 자들은 삶속에서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산 제사(롬 12:1)를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그런데 우리 삶의 제사가 향기롭지 못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상상을 해보라. 예를 들어서 자신을 키워 준 부모에게 선물을 가지고 와서 드릴 때 그 자식이 똥 밟은 기분으로, 온갖 인상을 다 쓰면서 마지 못해 억지로 드리는 자식이 있다고 가정을 해보라. 그 선물을 받는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심정이 어떻겠는가? “고맙다. 그래라도 주님 참으로 고맙다. 아들아!”라고 할 것 같은가? 아니면 “네나 처먹어라!”라고 호통을 치면서 내 팽게 칠 것 같은가? 내가 그런 상황을 만났으면 나는 성화가 덜 되어서 후자의 행동을 취할 것으로 짐작된다.
이제 우리는 매일 말씀대로 사는 향기로운 삶의 예배가 되도록 거룩하게 구별하며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삶의 제사를 잘 드려서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고 복을 내려 주실 때에 풍성하게 누리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3. 타국인들도 배려하시는 하나님(13-16)
‘무릇 본토 소생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에는 이 법대로 할 것이요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너희 중에 대대로 있는 자가 누구든지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에는 너희 하는 대로 그도 그리할 것이라 회중 곧 너희나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한 율례니 너희의 대대로 영원한 율례라 너희의 어떠한 대로 타국인도 여호와 앞에 그러하리라 너희나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한 법도, 한 규례니라 (민 15:13~16)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인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나아가는 일에는 외국인들도 초대하신다. 단순한 초대가 아니라 그들도 이스라엘이 하는 것처럼 여호와 앞에서 그대로 할 수 있는 자비를 베푸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며, 언약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제한이나 차별이 없으신 분이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3:28-29)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여기에 있는 우리는 구약시대에 살았다면 구원의 대상이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얼굴색, 체형부터가 이스라엘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는 것이 누구의 노력인가? 이것은 전적으로 아담 화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사활대속의 공로로 허시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우리까지도 구별 없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자원하며 찬양하며 살아갑시다. 할렐루야!!
이스라엘과 함께 거주하는 외국인에게도 똑같이 화제 드리는 법이 적용되었다. 이제 하나님 나라는 혈통이나 출생지가 아니라 여호와를 향한 순종의 믿음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천하 만국이 복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 목적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2-3)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허시고 새로운 백성을 만드셔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4~18)
우리는 이방인인 우리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드려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다양한 지체들과 두루 교제해야 한다. 다문화 가정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섬기기 위해 우리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에 대해 배려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하나님 아버지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를 배려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사람들을 판단하시는 기준도 지극히 작은 자에게 베푼 선행이다(마 25:31-46 참조). ‘우리’ 안에 머물고 있는 타국인들, 약자와 소외된 자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 세워지고,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할 일을 찾아 실천하도록 합시다.
3. 이방인인 나에게까지 계속해서 은혜 베풀어 주실 것를 믿고 소망 가운데 나아가라!!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어둠의 긴 터널을 통과하여 희망의 빛을 이미 주신 하나님, 앞으로 주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를 온전히 믿도록 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노력이 아닌 전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초점을 맞추는 매일의 삶이 되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지못해서, 억지로, 세상 근심 걱정을 혼자 다진 찡그린 자세로 살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향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 우리 삶이 주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도록 은총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며 소망 가운데 매일 매 순간을 살아가도록 힘써야 한다. 날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거룩한 삶의 제사를 드리기 힘써라.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사용하기로 작정하고 그가 원하시는 대로 감사함으로, 예비하여 드리는 삶을 충성스럽게 살다 가도록 하라. 그리하여 약속의 복을 부어 주시고 그 복을 금생내생에 온전히 누리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4-06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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