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 세리의 교훈

2011.02.13 21:33

윤봉원 조회 수:902 추천:66

눅 18:9-142011021302날자: 2011년 2월 13일 주후
제목: 바리새인과 세리의 교훈
본문: 누가복음 18장 9절∼14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하고 세리는 멀리 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 성경 깨달음을 위해 전력투구(全力投球)하라
사람은 어느 사람이나 아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그 행동한 대로의 사람이 된다. 어릴 때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배우면 공산주의가 된다. 소말리아 해적처럼 해적질하는 것을 자꾸 배우면 남이야 죽든 살든 상관없이 자기들의 욕심 성취만 하면 되는 해적이 된다. 미개국의 사람들이 성장해서도 선진국 사람들처럼 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선진국의 사람들처럼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깨달는 이 깨달음은 깨달은 그대로 자기가 행동하고 그대로 구원이 잘 이루어지든지 못 이루어지든지 결정된다. 그러기에 성경을 보고 깨닫는 것은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투자해서 구원 이룰라는 투자하는 방편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인 것이다.
깨달음은 성경을 보고 이렇다저렇다 해석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성경을 보고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성경을 보고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그것을 깨닫는 것이 그게 깨달음이지 그냥 성경에 이것은 이런 뜻이 있다 하는 그런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그것은 일반이 깨달음이라 하지만, 몰라서 하는 말이지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 성경을 보고 “나는 요렇게 해야 하겠다.” 하는 고것을 깨달은 것이 깨달음이다.
따라서 성경 깨달음은 자기 생명을 바칠 깨달음이기 때문에 그 깨달음을 이렇게 깨달아도 되고 저렇게 깨달아도 되고 아무렇게나 깨달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리는 성경의 정확한 깨달음이 안 되면 안 된다 하는 것을 기억하고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그 사람 구원의 성공과 실패, 죽고 사는 것이 깨달음에 달렸기에 전하는 저에게는 더욱 막중한 책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 주셔야 한다.
2. 본문 요약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9-13)
예수님은 스스로 의롭다고 믿은 바리새인보다 자신을 죄인이하고 여긴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 바리새인들의 기도에는 자기의 잘한 것만 있었다. 또 하나님이 하신 일은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행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했다. 자신의 죄를 비통하게 여기며 회개하는 세리를 멸시했다.
그러나 세리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갈망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했다. 세리의 기도에는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내용만 있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교하여 엎드려 자비를 구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바리새인들처럼 우리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그 순간 우리를 낮추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완전하고 높으시며 하나님만이 다스리시는 나라이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는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기도할 때 우리가 행한 일들을 은근히 자랑하지는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도 헌금이나 금식이나 전도나 성경공부, 성경묵상, 교회 봉사를 내세우고 과시하지는 않는지 철저하게 돌아봐야 한다. 아울러 우리의 기도에도 세리의 통회하는 기도가 회복되어야 한다. 자신이 늘 주님의 표준에 못 미치는 사람인 것을 고백하고 주의 은혜와 자비로서만 삶이 가능하다고 믿고 자기를 낮추고 따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한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다 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의는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는 의가 아니다. 겸손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낮아지고 어린 아이처럼 긍휼을 구하는 의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신다.
3. 자칭 의인에 대한 주님의 교훈
3.1. 세상은 영원을 준비하는 세상
첫째, 세상은 행위 온전, 자체 온전,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 온전을 목표로 하며 준비하는 세상으로 나그네 인생을 살게 해 주셨다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의로운 행위만 나열하여 인정을 받으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2),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땅에서 상을 다 받고 하늘나라에서는 받을 상이 없는 어리석은 행위였던 것이다. 이는 바리새인의 관심이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 세상살이가 영원한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모른 행위이다.
누구든지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살 준비를 하는 것은 다 죽는 일이요 망하는 일이다. 세상에 이런 일 저런 일 우리가 하지만, 믿음 없는 사람들과 다른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일 저런 일 하는 것이 세상 사는 데에 이런 것 저런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다.
우리는 다 같이 한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어도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데에 직접 관련된 일도 있고 간접적으로 관련된 일도 있어서 다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그 일로 하는 것이 믿는 사람의 일이다. 밥을 먹는 것도 영원을 준비하기 위해서 밥을 먹고 자는 것도 그러하고, 그러면 그것이 곧 주를 위함이 된다.
세상을 영원무궁 영광의 나라를 준비하는 세상인 것을 언제든지 잊지 아니하고 그저 밤이나 낮이나 복잡할 때나 한가할 때나 언제든지 무슨 일이든지 영원한 하늘나라의 준비로 하는 일이 아니면 다 사망하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와같은 생각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부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16~20)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다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데에 필요한 일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따라서 우리에게 이 일이 필요하다 인도하시면 그 일을 통해서 하늘나라를 준비하고 저것이 필요하다 하시면 그것을 이용해서 하늘나라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외모로 보기에는 멸망할 사람들이나 구원 이루는 사람들이나 꼭 같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동기와 목적이 다르다. 동기는 주로 말미암아서이다. 목적은 하늘나라의 영원을 준비하는 그 준비를 목적으로 삼아서 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하늘나라를 준비하도록 세상에 하나님이 머물러 있게 하셨다. 그러면 이 시간도 준비, 자는 것도 깨는 것도 직장도 모든 것이 준비가 아니면 다 헛일이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3.2. 준비의 기준은 하나님
둘째, 우리가 준비하면 무엇을 기준해서 준비할 것인가? 어떤 것을 표준해서 준비할 것인가? 우리 준비의 표준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것이다. 거룩을 위해 힘을 쓰면 깨끗해지고 거룩으로 힘써 깨끗을 만들면 온전함에 도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이 틀린 것은 무한과 영원을 기준 해서 자기가 잘 됐나 못 됐나를 따져서 준비가 못된 것을 찾아 철저하게 준비하는 일을 해야 함에도 그들은 준비해 놓은 것만 보고 “나는 이렇습니다.”라고 하니까 희망이 없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티를 보면 자신의 들보를 보라고 말씀하셨건만 바리새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그들은 사람과 사람을 대할 때에 “하나님은 내게 대해서 이렇게 하셨는데 이 사람은 이러하고 나는 이러하다.”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니까 벌써 사람과 자기와 비교하면 자기중심이라 하는 것이 발동되기 때문에 원죄가 발동되기 때문에 그만 무조건 자기가 잘했다고 평가를 하게 된다. 그래서 속담에 말하기를 “똥도 제 똥은 구리지 않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참말이다. 벌써 자기에게 배였고 자기기 때문에 모른다(흑인과 황인종이 각각 자기들의 냄새는 잘 모르나 다른 인종들은 아주 심각하게 느끼는 것과 같다.). 그런고로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면 그 결과는 교만한 사람되고 말고 다른 사람 무시하고 멸시하는 사람 되고 만다.
우기가 준비의 기준을 사람에게 두면 그 사람과 나와 비교할 때에 “그 사람은 내게 이렇게 했는데 나는 그렇게 했다.” 이렇게 기준하면 사람들은 원망 불평 생기고 불만 생기고 나중에는 미움의 사람이 생기고 만다. 우리는 사람과 나와의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내게 이렇게 하셨는데 나는 이 사람에게 이렇게 했다.” 그 사람이 내게 어떠한 사람과 나와의 비교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준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비교를 하니까 아무리 잘했어도 또 잘못한 부분이 더 많고 잘해야 될 부분이 더 많다.
이러니까, 사람을 접촉하고 시비할 때에 하나님을 기준해서 시비하는 사람은 겸손히 자꾸 회개할 게 있고 그 사람과 나와의 ‘나는 네게 이렇게 했는데 너는 내게 이렇게 했다.’ 이렇게 하게 되면 결국은 불만 불평 원망 시비 미움, 마지막에는 들어가면 낙망까지 들어가게 된다. ‘뭐 천인 만인이 다 이런데 나 혼자 이렇게 뭐 있느냐?’ 이래서 사람들이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사람되기 쉽다.
그러기 때문에, 기준을 하나님에게 둬야 한다. “하나님은 내게 이렇게 했는데 나는 이 사람에게 이렇게 했다. 하나님은 내게 이렇게 참으셨는데 나는 이 사람에게 아무리 참고라도 보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이 사람을 관용하고 이 사람에게 소망을 두고 한 번 살려보자 고쳐보자 아무리 힘 썼다 할지라도 주님이 내게 대해서 한 그것을 기준해서 주님은 내게 대해서 이렇게 했는데 나는 이 사람에게 대해서” 할 때에 결국은 그 사람이 자기는 죄인으로 나타나서 주님 앞에 고칠 것이 있는 그런 사람이 되니까 결과적으로 겸손한 사람되고, 결과적으로 앞으로 고쳐야 될 소망을 가진 사람되고, 결과적으로는 용서를 구하는 사람되고, 결과적으로는 주님은 내게 이렇게 했는데 나는 사람에게 대해서 이렇게 했다, 자복하고 감사하는 그 사람이 되고야 만다.
그러기에, 세상은 준비하는 세상이다. 또 준비하는 데 그 기준은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는 이것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세리였다.
3.3. 준비의 법칙은 신구약 성경
셋째, 준비하는 법칙은 하나뿐인데 신구약 성경 계시 말씀은 유일한 법칙이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5~17)
신구약 성경 말씀은 이 세상 서적들과 다릅니다. 철학과 다릅니다. 세상 지식 그 모든 것은 다 철학적이다. 철학은 사람이 자꾸 연구해서 사람에게서 뽑아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철학은 인간의 것이다. 인간 속에는 뭐 들어 있습니까? 성경에 뭐라 했습니까? 마귀. 인간 속에는 마귀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인간의 것이요 마귀의 것이다.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계시(啓示)의 것입니다. 계시(啓示)라 말은 열 계(啓)자 보일 시(示)자, 하나님께서 열어 보여서 ‘아,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열어 보이신 것이라 그 말이다. 하나님께 받아서 우리가 아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우리가 받은 것이다.
이 세상에는 불교와 유교, 이슬람교, 그 외에도 많은 종교가 있다. 그러나 그 종교는 인간이 아무리 파 봤자 죽은 것이 인간이요, 썩은 것이 인간이요, 거짓이 인간이요, 만물보다 거짓된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아무리 거기서 파내면 낼수록 도매금으로 말해서 다 썩음에서 나왔다 죽음에서 나왔다. 다 거짓에서 나왔다. 아멘!! 우리는 확정을 지어야 한다.
따라서 셋째로 우리가 영원한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유일한 도리 법칙이 있으니 그 법칙은 신구약 성경 말씀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영화롭게 기쁘시게 할꼬 하는 데 대해서는 신구약 성경이 유일한 법칙이라고 말했다. 만약 바리새인들이 성경으로 자신들의 상태를 따져 봤다는 바울처럼 죄인 중에 괴수 죄인으로 낮아졌을 것이다.
3.4. 준비의 방편은 회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13-14)
넷째, 우리가 어떤 방편으로 하나님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과 같은 자가 되어 가겠느냐? 우리가 법칙은 신구약 성경인데 신구약 성경을 사용하려면 어떤 방편으로 사용해야 하느냐? 그것은 회개(悔改)이다. 13-14절의 세리의 회개는 우리에게 회개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장 멋지게 보여 주는 본문이다.
회개는 잘못된 것 발견하고 앞으로 요것을 요렇게 하면 바로 되겠다 하는 것 잘할 것 발견하고, 과거에 대해서는 잘못된 것 발견하고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는 바로 잘할 것 발견하고 고치는 것이다. 기독자는 회개로 자꾸 온전을 이루어 갈 수 있다. 이 회개가 없는 사람은 결코 발전이 없다. 이것은 신앙 문제뿐 아니라 운동, 학문, 예술, 각종 기술, 의학, 상업 전 분야에 걸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이다. 오죽 했으면 세상 속담에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겠는가?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은 회개가 없었다. 그러나 세리는 회개를 했다. 그래서 주님이 의롭다고 인정한 것이다. 자신을 낮춤으로 높임을 받을 수 있는 주인공이 되었다.
예를 들어서 회사에서 무슨 제품을 만들 때에도 그 직원이 생산된 제품이 “이것은 잘됐다 잘됐다.” 자꾸 그렇게만 생각하면 그 직원은 쫓아내 버려야 한다. 그런 직원을 둔 회사는 발전이 안 된다.
그러나 또 다른 회사의 직원은 ‘하, 이것은 이면이 잘못됐다.’ 자꾸 잘못된 것 발견하고 더 잘될 것 발견하고 잘못된 것 발견하고 더 잘할 것 발견하고 하면서 고쳐 나가면 그 회사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제품을 만들 때 남에게 유리하고 좋을 것 그것만 자꾸 연구한다. 남 좋을 것만 생각해서 자꾸 그것만 연구해서 남이 좋아하도록 모든 사람에게 실상으로 유익하도록, 평가해 보니까 실상으로 유익이 되고 좋도록 요렇게 하면 그 회사는 필연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나님의 진리가 꼭 이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까지 해 놓은 것 중에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그 잘못된 것을 ‘요렇게 했더라면 잘됐을 터인데’ 고치다 보면 더 잘할 면 발견하게 된다. 또 하나는 해 놓은 것 보니까 ‘요게 모자란다’ 모자라는 것, 구비하지 못했다. 갖추지 못했다. 미비점을 발견하고 ‘요렇게 하면 보충해서 요만하면 충족하게 되겠다.’ 미비점과 보충점을 연구를 하여 보충해 나가면 점점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다.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 이렇게 산 사람이 세리였다. 그래서 세리는 지금도 우리에게 겸손과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은 귀감(歸勘)이 되었다.
4. 영원한 천국을 소망함으로 삶의 기준을 하나님과 성경에 두고 진리를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라.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로 그는 항상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남은 생애를 살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 비교 생각하면 양심에 가책할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우쭐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준을 하나님께 두다 보니까 “나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 해 줄 것을 다 못 해 주고 모든 사람에게 의무와 책임을 못 했다. 왜? 주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 그리고 주님이 모든 사람에게 한 것같이 자기는 모든 사람에게 그와 같이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죽기 전에는 빚진 자로 생각하며 살았다. 또 괴수 죄인으로 살았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
그러다가 마지막에 순교 제물로 바쳐질 때 그때야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준비했다. 됐다 됐다. 생명까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줌으로써 이제 다 됐다 이렇게 하고서 이제 후로는 내 앞에 주님이 면류관 들고 계신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도 영원을 준비하는 나그네 인생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처럼 이 세상만 생각하는 좁은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한다. 그리고 기준은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주님)께 두어야 한다. 그리고 살아가는 법칙은 신구약 성경 법칙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어겨서는 우리 구원 준비는 안 되니까 요것은 성경 말씀대로 맞았나 안 맞았나? 계속해서 구별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성경 말씀을 기준 해서 자꾸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고칠 것은 찾아 고치고 미비한 점은 점점 인내로 구비 하여 주님과 같은 온전한 사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바리새인처럼 죄인으로 평가되는 사람이 아니라 세리처럼 의인으로 인정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살아갈 때에 우리도 주님이 높여 주시는 은혜를 실상적으로 누리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참 제자 되세요.

참조. 86080153; 8608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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