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목적은

2009.05.25 21:18

윤봉원 조회 수:905 추천:47

고전 9:19-232009052401

날자: 2009년 5월 24일 주일오전
제목: 내가 사는 목적은?
본문: 고린도전서 9장 19절∼23절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1. 나그네 인생,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도, 여운계 탤런트도, 정치인도, 재벌가도, 운동선수도, 늙은 사람도, 젊은 사람도, 어린이도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나그네 인생이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우리가 돌아갈 순서가 안 되어서 있는 것 뿐이다. 이렇게 살아 있는 우리는 지금 당장 죽는다면 무엇을 남기고 갈까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어떤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를 받게 될까요?
요즘 우리의 관심사는 어디에 몰두하고 있는지 돌아 봅시다. 과연 성경적인가요? 아니면 세상적인가요? 내 중심적인가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살아가야 할지를 성경적으로 정립하도록 합시다. 또 어떤 표준으로 살아가야 할지도 성경적으로 정립하도록 합시다.
2. 바울의 삶
2.1. 모든 사람에게 자유 했다.
바울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처리 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자유롭게 자기의 재량권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사람이 많든지 적든지, 높은 사람이든지 낮은 사람이든지 사람과의 관계하는 데에서 영감과 진리를 양보하지 않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유한다” 그 말은 생명을 빼앗겼으면 빼앗겼지 피와 성령과 진리대로의 사는 자기 생활은 양보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가리켜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바울의 목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 자신은 24-27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어떤 철학적인 견해나 물질적인 유혹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자신에게 철저 했습니다.
2.2.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그 일이 아닌 범위 내에서는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종노릇을 하고, 상대방 좋도록, 상대방에 유익하도록, 상대방을 자기보다도 더 높이고 그를 더 낫게 존중히 여겨서 그렇게 살았다 하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 어겨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양보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또 지배받고 천대받고 어떤 일이라도 그저 그렇게 했다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바울은 인인관계에서 자기가 남의 으뜸 될라고 하지 안 하고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그저 말씀에 위반되지 아니하는 한 다른 사람에게 상전노릇 하지 안 하고 종노릇 하고, 다른 사람의 위에 갈라고 하지 안 하고 다른 사람의 밑에 가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지 안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배를 당하고 이렇게 바울이 살았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이 사니까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업신여기기도 쉽고 아주 무시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참 아주 힘없는 사람, 아주 천한 사람, 아주못난 사람, 비겁한 사람같이 이렇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노릇을 하는 생활을 했다.
2.3. 다른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고전 9:20-22)
바울의 근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로마인이지만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과 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또 율법이 있는 자에게는 자기는 율법에 매여 살지 않지만 자기도 율법 있는 것과 같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바울 자신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필요하다면 자신의 삶을 율법 아래 있는 자의 습관에 맞추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함’을 이유로 유대인의 법을 경멸하며 그들의 예법과 관습에 대해 아무런 존경심도 표하지 않은 채 유대인의 회당에 복음을 전하러 간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들으러 온 사람들을 오히려 불쾌하게 만들 소지가 다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맞추고, 그들의 규정과 제한 사항에 순응함으로써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하는 목적대로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또 율법이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또 약한 자에게는 아주 자기가 약한 자와 같이 그렇게 상대해서 그 사람보다 내가 더 약한 사람으로 돼서 살았습니다. 약한 자들은 양심이 약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의 자유함을 포기한 채 그들의 금지 조항들을 준수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참조. 고전 8장). 그는 자신의 청중의 귀를 사로잡기 위해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어 이 일을 세심하게 실천에 옮겼습니다.
 또 되게 강하고 높은 사람은, 또 높은 사람에게는 또 높은 사람에게 그저 눌릴 만큼 살았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하나님 앞에 죄가 되지 아니하는 한 모든 사람을 따라서 살고 모든 사람에게 맞추어서 이렇게 자기를 비워서 살았다. 이 과정에서 바울은 그곳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교리들을 좀 더 마음에 들도록 전하기 위해 그 교리들을 적당히 양보하지 않았을뿐더러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법이나 자신의 양심에 위배되는 길로 나아간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청중을 얻고자 기꺼이 그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뭐 때문에 그렇게 살았느냐? 바울이 천태만상의 사람, 형형색색의 사람, 별별 기이하고 희희한 종류의 사람, 성격의 사람, 별별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따라서 그런 사람같이 이렇게 내가 잘 융화를 해 가지고 이렇게 산 것은 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20-22).
바울이 천태만상의 행동을 하니까 야만이 보면 ‘바울은 우리 야만과 같은 동무의 사람이다’ 또 아주 흐리멍텅한 사람은 ‘바울은 우리와 같은 유의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다 바울을 자기 친구라고, 자기와 같은 동류의 사람이라고, 자기와 아주 같은 그 수준의 사람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이렇게 하도록 이렇게 사니까 그 사람은 환경 따라서 변하는 생활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은 아무나따나, 아무 뼈대 없고 기준 없이 그렇게 그저 마구잡이로 사는 그런 사람으로 사람들은 인정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와같이 사는 그 생애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 이렇게 저렇게 사는데 그렇게 사는 그 생활 가지고, 무엇을 기준으로 해 가지고, 무엇을 표준해 가지고, 무엇을 자기의 목표로 삼고 살고 있느냐 그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함이라”
복음에 참여한다는 말은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을 복음이라고 여기에 표시했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합격된 것,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이는 완전하다, 이는 영원이다, 이는 불변이다, 이는 영생이다 인정받는 그것이 복음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인정받은 그것이 복음 속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복음은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셋이 합해서 복음인데, 피와 성령과 진리 요 셋에 털끝만큼이라도 배치되지 안 하고 요 셋대로 된 그것만이 복음 안에 들어갑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천하 인간들에게 옳다 인정을 받아도 소용없습니다.
바울이 껍데기에는 모든 사람을 대해서 이렇게도 살고 저렇게도 사니까 그 사람은 뼈도 없는 사람이고, 중심도 없는 사람이고, 절제도 없는 사람이고, 아무런 비판도 없는 사람이고, 평가도 없는 사람으로,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사니까 사람들이 볼 때에 ‘저 사람은 참 우스운, 아무 무슨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 기준도 없는 사람이라.’ 이래 보지만,
바울이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천 사람 만 사람의 그 형편에 따라서 자기가 그와 같은 사람 같이 되어져서 살고 있는 그 생애에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그 표준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복음에 참여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바울과 더불어 모든 신자들은 “복음이 주는 복” 즉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축복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3. 바울처럼 삶의 목표와 표준을 정하여 복음 전도의 주인공이 되라!
하나님께서 바울의 삶의 목표와 기준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울의 삶의 목적과 기준이 우리의 삶의 목적과 기준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제까지는 각종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살았더라도 이제부터는 무엇을 하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나와 접하는 모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정합시다. 나와 이웃 모두가 복음에 참여하는 것으로 확정을 지읍시다.
바울의 선교 전략은 천태만상의 배경과 상황들에 대해 기꺼이 적응하고 순응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을 대할 때는 유대교의 정결법을 따라 음식을 먹었고, 반대로 이방인들을 대할 때는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또 빌립보에 머물 때는 교회의 지원을 받았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지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각각의 환경에 단순히 순응하는 카멜레온 같은 인물이었을까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평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원리들은 카멜레온의 자기 보호 본능을 넘어서는 더 고귀한 목적을 담고 있었습니다. 모든 문화권과 모든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 주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의 목적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우리와 다른 문화와 삶의 방식을 가진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가로막거나 성경의 윤리에 대치되지 않는 한 모든 요소들을 의식적으로 포용하고 순응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목적인 효과적인 복음 사역을 위한 몇 가지 기본적인 원리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다른 사람들과의 공통적인 분야를 찾아라. 둘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식의 태도를 버리라. 셋째,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을 받아준다는 느낌을 갖게 하하. 넷째,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관심사에 민감하라. 다섯째,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해 줄 기회를 포착하라. 이런 원칙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유효합니다. 이 가운데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준 분들이 사용한 원칙은 무엇이었습니까? 앞으로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이나 이웃, 직장 동료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려고 할 때 이런 원칙들 가운데서 우리가 더욱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할 부분들은 무엇인지 찾아서 실천하도록 노력 합시다. 그리하여 올 해는 반드시 우리의 삶의 목적대로 내 이웃 중 한 사람을 전도하는 주인공이 되도록 합시다.
☞ 본문(고린도전서 9:19-23)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심으로 우리의 유일한 주인 되시는 분.
⑵ 우리가 바울과 같은 삶의 목적과 표준을 가져서 다른 사람은 구원하고, 자신도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기대하시는 분.
☞ 내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 성경적인 삶의 목표와 표준을 가지고 살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가치 기준과 목표를 따라서 삶으로 말미암아 세월을 낭비하고, 영원히 후회하고 부끄러운 인생으로 마감되지 않도록 힘써라!!
☞ 나도 바울과 같은 삶의 목적과 표준을 가지고 실천하기를 힘써라!!
* 셀 모임을 하기 전에 미리 나눌 체험담을 준비하여 나눕시다.

{참조. 86082953; Osbone, Lab 고린도전서, pp. 212-14.}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9-05-2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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