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28-24:53 연구-세미나 발제안

2007.10.17 17:28

윤봉원 조회 수:2010 추천:72

눅 19:28-24:5320071015

 


누가복음 19:28-24:53 연구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MPhil 전공 2학년

윤 봉 원

<제목 차례>

주제: 누가복음 19:28-24:53 연구                                                 3

서론                                                                            3

본론                                                                            3

1. 예수에 대한 심문                                                              3

   1.1. 산헤드린(공회)에서의 심문(눅 22:66-71)                                   3

   1.2. 빌라도의 심문(눅 23:1-5)                                                 5

   1.3. 헤롯의 심문(눅 23:6-12)                                                  6

2. 승천 이야기에 대한 누가복음의 기술과 사도행전의 기술 비교                     8

결론                                                                           10

참고 서적 목록                                                                 11

 

 

 

누가복음 19:28-24:53 연구

서론

누가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의 여행에서 누가의 핵심 관심사인 가난한자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눅 9:51-19:27). 예수는 예루살렘 입성(19:28-44)하여 공생애 말기를 보내게 된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자신을 왕으로 드러낸다(19:35-38). 성전을 정화시키고 자신의 성전에 대한 권한을 보여 준다(19:45-48).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해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고 이에 대한 예수의 반응을 그리고 있다(20:1-40. 그런 와중에서도 예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교훈을 가르쳐 주었다(20:41-21:4). 누가복음 19:47절에서 시작된 성전강화는 성전파괴와 인자의 오심(눅 21:5-38)에서 절정부를 형성한다.1) 최후의 만찬(22:1-38)이 있은 후 예수는 유다의 배신과 유대인 지도자들에 의하여 체포를 당하게 된다(22:47-54). 그리고 산헤드린의 심문(22:66-71), 빌라도의 심문(23:1-5), 헤롯의 심문(23:6-12), 빌라도의 판결(23:13-25)을 받게 된다.2) 그 후로 예수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였다(23:26-47). 예수는 성경대로 죽은 지 삼 일만에 부활하였다. 예수는 자신이 육체로 부활한 것을 입증하였다. 예수는 마지막 위임 명령을 한 후 베다니에서 승천하였다(23:48-24:53). 본 연구에서는 이 가운데서 심문과 부활, 승천에 국한하여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먼저 연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을 기록한 누가의 목적을 찾아보고, 그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얻고자 한다.

본론

1. 예수에 대한 심문

1.1. 산헤드린(공회)에서의 심문3)(눅 22:66-71)

유대인들이 예수를 심문한 데 대한 복음서의 설명들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아내기란 어렵다. 누가에 의하면 예수는 먼저 안나스라는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간다(참조. 눅 22:54; 요 18:13-14; 19-23). 그런 다음 아침이 되어 베드로의 부인(否認)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 다음에 예수는 산헤드린에 끌려가서 그의 역할에 대한 간략한 심문을 받는다.4) 이 장면은 아이러니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도가 그 목적을 거부하는 세력에 의해서 성취되기 때문이다.5) 산헤드린(sune,drion)6)은 밤에 모이는 것이 불법이었으므로 날이 샐 때 만났다(눅 22:66).7) 산헤드린은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즉 그가 진정 자신을 메시아로 나타내었는지의 여부를 알고자 했다.8) 산헤드린 앞에서의 심문은 ‘만일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눅 22:67)는 명령으로 시작되었다. 메시아9)라는 칭호는 수난설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눅 23:2, 35, 39; 24:26; 46). 예수가 자칭 메시아라는 죄목(罪目)으로 빌라도에게 보내졌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심문 때 메시아성의 문제가 등장했을 공산이 크다. 예수 자신은 그 칭호를 회피10)했지만 그의 행위와 가르침은 그것이 예수가 주장한 역할이었다는 혐의를 받기에 충분했다. 산헤드린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는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눅 22:67-68)라고 답한다. 이와같이 예수는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는 거부방식으로 대답한다(참조. 눅 20:4-8).11)

예수는 종교지도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대답하는 대신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12)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눅 22:69)고 예언한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후에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으실 메시아로서의 권위를 확증한다(참조. 눅 22:67d-69; 시 110:1; 행 2:33; 5:31; 엡 1:20; 골 3:1; 히 1:3; 8:1; 10:12; 12:2; 벧전 3:22).13) 누가에 있어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 됨이 단순히 메시아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만 간주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14)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의 예언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눅 22:69). 그래서 그들은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Su. ou=n ei= o` ui`o.j tou/ qeou)(눅 22:70b)라고 질문하였다.15) 이 명칭을 그들의 입에 붙임으로써,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거짓 메시아로 정죄했음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와 종교지도자들 간의 대화 가운데는 인자에 대한 예언을 통해서 그리스도(=메시아)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에 이르는 논리적인 발전이 나타나고 있다.16)

만일 네가 그리스도여든…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러한 발전적인 도식 가운데서 누가는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하고 있다.17)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에 예수는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Umei/j le,gete o[ti evgw, eivmi)(눅 22:70d)고 답한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너희가 말했다”라는 의미이다.18)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산헤드린은 그들이 볼 때 예수는 신성모독죄에 해당하는 ‘증거’(marturi,a )를 다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이 ‘증거’는 재판관 앞에서 행하는 증언을 가리킨다.19)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로마 당국으로 넘길 준비를 하였다(눅 22:71).20)

1.2. 빌라도의 심문(눅 23:1-5)21)

산헤드린은 예수를 로마 당국에 넘기기로 의견을 모았다(눅 23:1). 유대 총독 빌라도(참조. 눅 3:1; 13:1) 앞에 도착하자 유대 당국자들은 그를 사실과 다르게 고소하였다. 첫째, ‘우리 백성을 미혹했다’(눅 23:1)는 것이다. ‘미혹하다’(diastre,fonta)는 종교적으로 참된 신앙으로부터 ‘오도하다, 왜곡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22) 여기서는 정치적인 의미로 누가복음 23:5절에서와 같이 ‘백성을 소동 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23) 이것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계획된 전략의 음모일 뿐이다.24) 두 번째 죄목은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한다’(눅 23:1)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었다(참조. 마 22:18-21; 막 12:15-17; 눅 20:19-26). 이것은 독자들에게 그 죄목의 허구성을 지적해 준다.25) 세 번째는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한다’(e`auto.n Cristo.n basile,a ei=nai)(눅 23:1)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산헤드린 앞에서의 답한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왕 그리스도라’고 말한 적이 없음을 잘 포착할 수 있다.26) “그리스도”(Cristo,j)는 이교도들의 귀에는 basileu,j로 설명되어 “그리스도, 곧 한 왕”으로 설명 된다.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 번역하기는 어렵다(참조. 요 6:15).27) 이것은 예수가 자신을 정치적 메시아로 추앙하려는 군중들을 피하였으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자신의 신적 사역에 대해 가르쳐 주었던 행적과는 전혀 관계없는 항목이다. 누가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산헤드린 회원들의 완악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와 대조(對照)되는 예수의 무죄성(無罪性)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성모독죄(예수 자신이 그리스도요, 왕이라 주장하는 것)는 그들에게 마치 예수가 폭동 선동자인 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빌라도는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Su. ei= o` basileu.j tw/n VIoudai,wn)(눅 23:3)라고 물었다. 예수는 ‘네 말이 옳도다’(su, le,geij)28)(눅 23:3)라고 답하였다. 이 답을 들은 빌라도는 “원인, 이유” 또는 “유죄성”을 찾지 못하였다. 누가복음 23:14, 22절에서 그런 확인은 거듭 되풀이된다.29) 따라서 빌라도는 분명히 예수가 아무 죄도 없다고 선포한다(눅 23:4). 이러한 선포에 대한 근거를 누가는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빌라도가 이렇게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은 요한복음 18:33-38절에 서술된 보다 상세한 심문이 전제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종교지도자들31)은 계속해서 ‘저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눅 23:5)라고 하며 예수는 죄가 있다고 주장하였다.32) 문맥상 이 구절은 예수의 영향력이 어떻게 유대지역에 파급되었는지를 표명한다. 동시에 빌라도로 하여금 예수를 헤롯에게 보낼 구실을 찾게 한다.33)

1.3. 헤롯의 심문(눅 23:6-12)

빌라도는 예수가 갈릴리에서 왔다는 사실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와 있던 분봉왕(tetrarce,w, to be a governor of a tetrarchy)34) 헤롯(눅 3:1)에게 보내는 구실로 삼는다(눅 23:6-7).35) 예수는 빌라도에게는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였다(눅 23:3). 그러나 예수는 어떤 이적 행하는 것이나 보려 하는 헤롯에게는 계속 대답을 거부하였다(눅 9:9; 23:8-9). 예수는 복음서 속에서 줄곧 “정직한 질문에 대해서는 언제든 대답해 주지만 편견에 찬 주장들은 무시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구약의 예언을 근거로 창작해 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참조. 사 53:7).36) 예수의 침묵은 고소자들을 달래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려는 예수의 의지를 밝히는 것일 수도 있다.37)  또한 헤롯이 진실을 밝혀내려고 하지 않았음을 예수가 파악했기 때문이다.38) 헤롯은 예수를 희롱하는데 함께 하고, 장난으로 빛난 옷(왕의 옷)을 입힘으로 예수께 대한 그의 실제 감정을 보여 주었다. 예수에게 입힌 ‘빛난 옷’은 색깔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처럼 ‘빛난다’는 표현은 ‘부유함’, ‘왕의 위엄’, 그리고 ‘상승하는 사회의 지위’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가 당하는 조롱을 반어적으로 극대화하는 것이다.39) 헤롯은 이 사건에 대한 아무 판결도 없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눅 23:11).40) 여기에는 조롱하면 조롱 받는 예수를 보면서 헤롯은 예수가 결코 로마가 염려해야 할 “왕”은 아니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무죄성을 두 번째로 공식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눅 23:15). 이러한 누가의 의도는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눅 23:14, 22), 십자가 에 달린 행악자 중 한 사람의 입을 통해서(눅 23:41), 십자가를 지휘했던 백부장의 입을 통해서 거듭 드러나고 있다(눅 23:47).41) 동시에 그것은 세상의 왕들과 통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행 4:25-28) 함께 음모했다고 묘사하는 시편 2:1-2절의 예언의 성취로 인정할 수 있다.42)

헤롯의 심문 이야기는 복음서의 수난설화 중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그래서 내용의 역사성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기도 하다. 역사성 문제와는 별도로 누가의 이 기록은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헤롯 아그립바 앞에서 심문받는 것과 평행을 이룬다. 누가복음에서만 예수가 네 번 심문 받는 것으로 기록한 것은 어쩌면 사도행전과의 평행 때문에 누가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43)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산헤드린 앞에서(눅 22:54-71), 빌라도 총독 앞에서(눅 23:1-5), 헤롯 안티파스 앞에서(눅 23:6-12), 빌라도 총독 앞에서(눅 23:13-25) 심문 받는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산헤드린 앞에서 (행 22:13-25), 벨릭스 총독 앞에서(행 24:1-27), 베스도 총독 앞에서(행 25:1-12), 헤롯 아그립바 앞에서(행 25:13-26:32) 심문 받는다.

2. 승천 이야기에 대한 누가복음의 기술(눅 24:36-53)과 사도행전의 기술(행 1:1-14) 비교

예수의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엠마오로 가는 도중에 예수를 만난 사건이 앞 단락에 기록되어 있다(눅 24:13-35). 이 사건은 예수의 영적인 임재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면 누가복음 24:36절 이하의 이야기는 그것과 균형을 이루면서 부활한 예수의 육적 실체가 강조된다.44) 예수는 유령을 보았으리라(참조. 요 20:19) 생각하고 당황 해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서 그가 정말로 부활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 증거로 제자들에게 그와 그의 상처(눅 24:36-43; 요 20:25-27)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자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들 앞에서 음식(구운 생선 한 토막)을 먹었다(눅 24:36-43).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을 누가가 기록한 것은 부활한 예수의 육체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45)

예수는 메시아에 대한 구약에 기록된 모든 사실을 그의 제자들에게 보였다. 모세의 율법, 선지자들의 글, 시편은 예수 당시의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세 부분이다(눅 24:44).46) 다른 말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구약의 다른 여러 곳으로부터(참조. 신 18:15; 시 2:7; 16:10; 22:14-18; 사 53: 61:1) 자신이 메시아이며 고난을 받아야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보여 주었다(참조. 눅 24:26, 46).47) 성경의 성취는 필연적이다.48)

예수는 부활한 자신의 몸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인 후 그들에게 마지막 위임명령을 한다(눅 24:44-49). 지금까지 메시아에 관한 성경 예언에 강조가 있었다면 이제는 복음이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예언이 강조된다. 제자들은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자들이다.49) 이 위임명령과 예수의 승천 본문(눅 24:50-53)은 실질적으로 복음서의 결론(클라이막스)을 이루면서 동시에 사도행전으로 넘어가기 위한 교량 역할(출발점)을 한다. 이 점은 사도행전 서두에서(행 1:1-11) 누가가 부활한 예수의 위임명령(행 1:4-8)과 예수의 승천 장면(행 1:9-11)을 반복하고 있음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50)

누가복음의 위임 명령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다(눅 24:47). 그리스도교 선교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해서 시작될 것임을 시사(示唆) 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증인”이 될 것이다(눅 24:48).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그의 죽음을 보았고 그의 부활을 증언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그의 증언들로 임명한다.51) 셋째,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힐 때까지 이 성(=예루살렘)에 유할 것이다’(눅 24:49).52) ‘약속’으로 번역된 evpaggeli,a는 흔히 성령과 연결되어 사용된다(참조. 행 1:4).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 이상스럽다. 어휘들은 약속과 성취를 모두 의미한다.53) 

예수의 떠남에 대한 서술은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 1:1-11절의 예수 승천의 서술을 예견케 해 준다.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승천 사건과 다른 사건 서술일 가능성도 있다. 두 이야기가 서로 본문 상 엇갈리기도 하지만 그 둘 다 승천을 지시하고 사도행전 1:2절이 이 이야기를 돌이켜 지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다음에 사도행전 1:4-11절은 보다 자세한 서술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누가는 이런 식으로 예수의 떠남을 누가복음의 절정으로 삼고 사도행전의 시작으로 만든다.54)

따라서 누가복음 24:44-53절은 사도행전 1:1-11절과 평행을 이룬다. 아마도 누가가 예수의 승천 기술을 이렇게 한 것은 복음서의 마지막과 사도행전의 시작을 적절히 연결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본문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55) J.C. Anderson에 따르면 Redundancy(잉여)란 것은 글의 전후 관계, 다양성, 반복에 따라서 고찰될 수 있다고 한다. 일치와 다양성을 설명하는 시각으로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 승천이야기의 비교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와 제자들에 대한 두 평가에서 등장인물들이 동일하다. 둘째, 두 설명에서 이 장면이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마지막 등장이다. 셋째, 두 설명은 땅 끝까지 혹은 모든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의 그의 제자에 대한 부탁을 각각 나누고(공유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에 대한 정확한 구술적 일치가 있다. 이 두 설명을 잘 연결함으로서 화자는 ‘그는 그들로부터 승천했다’라는 말의 모호한 언급을 승천에 대한 불투명한 언급으로 이해한 독자들의 막연한 (소급적) 모방을 강화하고 있다.56)

예수의 승천에 관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다. ① (두 이야기 사이의)연대기적인 차이이다. 누가복음은 부활 주일 밤에 예수의 마지막 승천 날짜에 나타난다.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난 기간 동안 40일 간에 걸쳐 저술된다. 이러한 누가의 기술은 누가가 연대기적 관심이 아니라 상징적인 관심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57) ② 승천의 장소는 약간 다르다(누가복음: 베다니; 사도행전: 감람산). ③ 두 이야기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되돌아 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행한 활동이나 그들의 특별한 행선지는 둘 사이에 서로 다르다. ④ 복음서에는 대화는 없다. ⑤ 손을 들거나 축복에 관한 반복되는 언급은 사도행전에서는 누락되어 있다. ⑥ 사도행전이 하늘로 올라갔다라고 명백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은 그는 그들을 떠났다라고 다소 비밀스런 기록을 하고 있다. ⑦ 사도행전에서 아주 두드러지게 나타난 제자들을 위한 사건을 설명하고 있는 하늘로 부터의 두 메신저와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구름에 대한 언급은 누가복음에서는 빠져있다. 이상과 같은 다양성은 독자들에게 복음서 이야기를 떠나게 하고 교회 이야기로 나아가게 한다. 반복은 사도행전과 복음서 사이의 고리를 재확인 한다.58)

결론

이상의 연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예수)의 말씀은 어떤 모함과 방해 세력이 있어도 반드시 이루어진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구원 완성의 목적을 위해서는 온갖 거짓 증인들과 악한 음모를 꾸미는 자들까지도 이용하여 반드시 성취시켜 나가신다(참조. 롬 8:28). 예수는 진실치 못한 질문이나 주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누가의 승천 이야기에 대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술은 일관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매우 정교하고도 긴밀하게 연관 되어 있다. 이러한 문학적 기법을 사용함으로 누가는 자신의 저술 목적을 극대화 시켜 나가고 있다. 누가는 독자들이 성령 충만한 자가 되어 모든 민족, 모든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의 삶을 충성되게 살아가기를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사전류

BDAG.
Keener. C.S.,「IVP 성경배경주석 신약」,(Bible Background Commentary-New Testament), 정옥배 역, 서울: 한국기독교학생회출판부, 1998.
Williams, D.,「IVP 성경사전」(New Concise Bible Dictionary), 이정석 외 역,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2.

각주

1) 양용의, ‘성전파괴와 인자의 오심’,『그말씀』2003년 12월호, pp. 70-81.
2) J.A. Martin(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21 LUKE, p. 172)은 세 번의 유대 관헌들 앞에서의 심문, 세 번의 로마 관리들 앞에서의 심문(참조. 마 26:57-58)을 지적한다.
3)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p. 478-79)은 ‘산헤드린에서 예수가 유대 지도자들과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며 그들에 의해 죽음으로 내 몰리게 된다. 이 장면을 가리켜 “심문”(the Trial)이라고 부르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공식적인 심판이나 판결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는 요한과 마찬가지로 오직 빌라도 앞에서의 심문만을 유일한 심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본다. 김득중은 산헤드린 앞에서의 심문은 예비적 청문회로 본다.
4) Marshall,「누가복음」, Ⅱ, p. 657.
5) 윤철원, ‘내러티브 비평과 예수 재판의 새로운 읽기’, 김영봉 외,「누가복음 새로 읽기」, p. 193.
6) 산헤드린은 유대 민족들의 공식적인 사법기관이었다. 이 산헤드린은 최종 상고기관이었다. 만일 산헤드린에서 예수를 유죄로 판결하면-번복할 수 없는 것으로-국가가 그를 유죄로 판결한 것이 된다. 산헤드린은 유죄 판결을 내릴 수는 있었으나 그 당시 유대인들을 사형시킬 권한은 없었다. 로마만이 사형언도를 내릴 수 있었다.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 481)은 ‘이 단어는 산헤드린이란 “모임 자체”를 뜻할 수도 있으며 또 그 모임이 모이는 “회의 장소”를 의미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일 것이다.’고 본다.
7)  Morris,「누가복음서 주석」, p. 454. 양용의(「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p. 457)는 ‘3세기 초에 편찬된 랍비들의 구전 율법 규정집인 미쉬나에 따르면 사형 재판은 밤에 열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m.Sanh. 4.1). 만일 이 규정이 예수 당시에도 적용되고 있었다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일부 산헤드린 회들은 정식 산헤드린 재판에서 예수를 사형에 처할 죄목을 발견 해 내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밤샘 심문을 하였고, 새벽이 되자 정식 산헤드린을 열어서 예수의 사형 죄목을 공식적으로 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참조. 마 27:1; 눅 22:66).’고 본다.
8) Marshall,「누가복음」, Ⅱ, p. 661;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 479.
9) Keener(「IVP 성경배경주석 신약」, p. 292)는 ‘“메시아”라는 말은 단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이지만, 대중 사이에는 종종 이스라엘에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킬 다윗 혈통의 왕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눅 20:20-25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예수의 주장을 그들이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해석한다. 곧 그것을 선지자적 혁명가라는 말로 해석한다.’고 본다.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경계하사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명하시고’(눅 9:20-21)
11) Marshall,「누가복음」, Ⅱ, p. 661;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p. 479-80.
12) Morris(「누가복음서 주석」, p. 455)는 예수가 평소 즐겨 쓰든 용어 ‘인자’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메시아직의 토론이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본다.
13) Martin,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21 LUKE, p. 173; 윤철원, ‘내러티브 비평과 예수 재판의 새로운 읽기’, 김영봉 외,「누가복음 새로 읽기」, p. 195.
14) Marshall,「누가복음」, Ⅱ, p. 663.
15)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 480)은 그들이 실제로 이 말을 했을 리는 없다고 본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기독교적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16)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 480; Marshall,「누가복음」, Ⅱ, p. 663; 윤철원, ‘내러티브 비평과 예수 재판의 새로운 읽기’, 김영봉 외,「누가복음 새로 읽기」, p. 194.
17) Nolland, 「누가복음」하, p. 440;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 481. 예수는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다(눅 1:35).
18) Marshall,「누가복음」, Ⅱ, p. 663; Nolland, 「누가복음」하, pp. 440-44;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 482; Morris,「누가복음서 주석」, p. 456.
19) BDAG.
20) Marshall,「누가복음」, Ⅱ, p. 664; Martin,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21 LUKE, p. 173.
21) 빌라도 앞에서 예수가 심문 받은 이야기에 대한 누가의 기록은 마가의 설명과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빌라도 앞에서 심문 받는 이야기가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부인(否認)에 이어 소개 되고 있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 받으면서 자신이 장차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될 것임을 예언하는 이야기 바로 뒤에 나온다. 누가는 이렇게 사건을 다르게 편집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로 고소되었던 산헤드린 앞에서의 심문과 예수가 “왕”으로 고소되었던 빌라도 앞에서의 심문 장면을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2) BDAG.
23)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 488.
24) Morris,「누가복음서 주석」, p. 458; 윤철원, ‘내러티브 비평과 예수 재판의 새로운 읽기’, 김영봉 외,「누가복음 새로 읽기」, p. 198.
1 Marshall,「누가복음」, Ⅱ, p. 666; 윤철원, ‘내러티브 비평과 예수 재판의 새로운 읽기’, 김영봉 외,「누가복음 새로 읽기」, p. 198.
2 윤철원, ‘내러티브 비평과 예수 재판의 새로운 읽기’, 김영봉 외,「누가복음 새로 읽기」, p. 198.
3 Marshall,「누가복음」, Ⅱ, p. 666.
4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 488)은 한글 개역의 ‘네 말이 옳도다’(눅 23:3)로 번역된 말의 원문은 ‘네가 말했다’로 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예수의 이 대답은 아주 애매하다. ‘네가’라는 말이 강조적으로 사용된 점으로 보아, 예수의 대답은 ‘네가 그렇게 말했지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긴 것일 수도 있다(공동번역: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혹은 새번역처럼 ‘네가 말한 대로다’. 혹은 한글 개역처럼 ‘네 말이 옳도다’란 긍정의 대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 488)은 ‘4절에서 빌라도가 예수의 대답을 들은 후에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예수의 대답은 부정의 의미였던 것 같다.’고 본다. Marshall(「누가복음」,Ⅱ, p. 667)은 예수의 대답이 부정인지 아니면 빌라도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본다. 아마도 후자의 경우로 이해하지만 그 사상은 명료하지 않다고 본다. Marshall은 이 지점에서 누가가 마가의 어휘를 따르다 보니까 무엇인가를 빠뜨린 것이 아닌가라고 본다. Nolland(「누가복음」,하, pp. 452-53)는 ‘빌라도의 어법은 철저하게 세속적이다. 빌라도는 고소당한 자 예수로부터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반문을 받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고 본다.
5 Marshall,「누가복음」, Ⅱ, p. 667.
6 Marshall,「누가복음」, Ⅱ, p. 665.
7 한글 개역에서는 ‘무리들’로 되어 있다. 이것은 원문에서 이인칭 대명사 ‘oi` de.’를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그들은”으로 번역한 새번역과 공동번역이 더 잘 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즉 대제사장들을 가리킨다고 Marshall은 본다.
8 Martin,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21 LUKE, p. 174;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p. 488-89.
9 Marshall,「누가복음」, Ⅱ, p. 668; Morris,「누가복음서 주석」, p. 459.
10 BDAG. Williams(「IVP 성경사전」, p. 213)은 ‘본래 이 칭호는 어떤 지역을 사분(四分)하여 통치하는 사람에게 붙여진다. 고전적 헬라어에 사용되었으며 로마가 동방 지역의 지도자들에게 수여한 관직명이다. 이 단어의 동사는 눅 3:1에서와 같이 여러 사람에게 사용되었지만 명사는 오직 헤롯 안디바에게만 사용되었다.
11 Morris,「누가복음서 주석」, p. 459. Marshall(「누가복음」, Ⅱ, p. 670)은 만약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면 그는 헤롯의 정치 영역 아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헤롯에게 보낸 점을 지적한다. ‘보내니’(눅 23:7)로 번역된  avnape,mpw는 “상급기관으로 보내다. 상부로 이송하다”의 전문용어이다(참조. 행 25:21). 그러나 헤롯은 상부권력이 아니었다. 헤롯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보냈다는 눅 23:11절에도 같은 동사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말은 전문 용어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 진행순서 자체는 범죄가 일어난 현지에서 재판하는 것이 아니고 관할구역에서 죄인을 다루는 후대의 관습을 반영한 것 같지는 않다고 본다. 빌라도는 이 문제에 관하여 유대인의 견해를 알고 싶어 한 것 같다(눅 23:15). 아니면 단순히 그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난제의 해결책을 강구했는지도 모른다. 윤철원( ‘내러티브 비평과 예수 재판의 새로운 읽기’, 김영봉 외,「누가복음 새로 읽기」, pp. 200-01)도 Marshall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를 한다.
12 Marshall,「누가복음」, Ⅱ, p. 671. 윤철원( ‘내러티브 비평과 예수 재판의 새로운 읽기’, 김영봉 외,「누가복음 새로 읽기」, p. 202)과 Nolland(누가복음) 하, pp. 461-462)는 예수의 침묵은 이사야 53:7의 성취로 볼 수 있다고 본다.
13 Nolland,「누가복음」,하, p. 462.
14 Thompson,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2), 268.; 윤철원, ‘내러티브 비평과 예수 재판의 새로운 읽기’, 김영봉 외,「누가복음 새로 읽기」, p. 202에서 재인용.
15 윤철원, ‘내러티브 비평과 예수 재판의 새로운 읽기’, 김영봉 외,「누가복음 새로 읽기」, p. 202; Morris,「누가복음서 주석」, p. 460.
16 Marshall,「누가복음」, Ⅱ, pp. 668-69; Martin,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21 LUKE, p. 174.
17 Marshall,「누가복음」, Ⅱ, pp. 669-73; Nolland,「누가복음」,하, p. 464;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 492; 윤철원, ‘내러티브 비평과 예수 재판의 새로운 읽기’, 김영봉 외,「누가복음 새로 읽기」, p. 205.
18 Marshall,「누가복음」, Ⅱ, p. 669.
19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p. 490-91.
20 Marshall,「누가복음」, Ⅱ, p. 737; Powell,「누가복음 신학」, 103.
21 Nolland,「누가복음」,하, p. 613;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p. 552-54; Marshall,「누가복음」, Ⅱ, pp. 737-42; Morris,「누가복음서 주석」, pp. 488-89; Keener,「IVP 성경배경주석 신약」, p. 298; Martin,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21 LUKE, p. 180.
22 그러나 더 흔히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로 구약성경이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말한다(참조. 눅 24:27).
23 Martin,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21 LUKE, p. 180.
24 Marshall,「누가복음」, Ⅱ, p. 744; Geldenhuys,「누가복음」하, p. 329.
25 Marshall,「누가복음」, Ⅱ, p. 742; Nolland,「누가복음」,하, p. 623.
26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p. 557-58; Parson, The Departure of Jesus in Luke-Acts, pp. 189-93; Martin,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21 LUKE, p. 180; Powell,「누가복음 신학」, 104.
27 Marshall,「누가복음」, Ⅱ, p. 746; Morris,「누가복음서 주석」, pp. 490-91.
28 Keener(「IVP 성경배경주석 신약」, p. 298)는 ‘성령은 특히 예언하는 능력,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말하는 능력과 연관 되어 있었다.’고 본다.
29 Marshall,「누가복음」, Ⅱ, p. 747.
30 Marshall,「누가복음」, Ⅱ, p. 748; 임승필,「루가 복음서」, p. 248.
31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p. 558; Marshall,「누가복음」, Ⅱ, p. 747; Parson, The Departure of Jesus in Luke-Acts, pp. 192-99. 누가는 누가복음․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문학적 기법인 Redundancy을 사용하였다. Redundancy의 사용은 Tannehill에 따르면 다음의 몇 가지 기능(작용)을 가지고 있다. ① 그것은 (잉여는) 이야기가 오래 지속되는 동안 사실(정보)을 잊어버리는 것을 막아준다. ② 그것은 강조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③ 그것은 설득력 있는 효과를 지니기도 한다. ④ 등장인물들의 진행을 준비해준다. ⑤ 그것은 독서가 진행됨으로 도달되는 (얻게 되는) 기대를 확인시켜준다. ⑥ 그것은 주목 받는 방식변화를 가능케 한다. ⑦ 그것은 이야기 속에서 일관성을 제공 한다. ⑧ 그것은 독서 과정 속에서 등장인물들이나 사건들 사이에 상호작용을 부추긴다.
32 Parson, The Departure of Jesus in Luke-Acts, pp. 192-93.
33 Nolland,「누가복음」,하, p. 636.
34 Parson, The Departure of Jesus in Luke-Acts, pp. 193-9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의 다양성에 대해서는 별첨 번역 파일을 참고하라.

참고 서적 목록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Ⅱ,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양용의, ‘성전파괴와 인자의 오심’, 『그 말씀』 2003년 12월호.
윤철원, ‘내러티브 비평과 예수 재판의 새로운 읽기’, 김영봉 외,「누가복음 새로 읽기」, 서울: 한들출판사, 2006.
임승필,「루가 복음서」, 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
Geldenhuys, N.,「누가복음」,하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The Gospel of LUKE, VOL.2, Chapter 12 to 24), 서울: 생명의말씀사, 1985.
Marshall, I.H.,「누가복음」,Ⅱ (The Gospel of Luke: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강요섭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4.
Martin, J.A.,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LUKE, 이명준 역, 서울: 두란노, 1989.
Nolland, J.,「누가복음」,하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35C Luke 18:35-24:53),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2005.
Morris, L.,「누가복음서 주석」(The Gospel According to ST. LUKE), 이정석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0.
Parson, M.C., The Departture of Jesus in Luke-Acts. The Ascension Narrative in Context, JSNTS, 21; Sheffield Academic Press, 1987.
Powell, M.A.,「누가복음 신학」(What Are the Saying About Luke?), 배용덕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White, R.G.O.,「누가신학 연구」(Luke's Case for Christianity), 김경진 역, 서울: 한국로고스 연구원, 1995.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0-22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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