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도 하늘나라 갈 수 있나

2007.10.17 17:23

윤봉원 조회 수:1157 추천:73

눅 19:1-102007101402날자:2007년 10월 14일 주일오후
제목: 부자도 하늘나라 갈 수 있나?
본문:  누가복음 19:1-10
1. 부자가 하늘나라 가기는 불가능한가?
누가복음 18:18-27절 사이의 말씀에서 어떤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답하십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관원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답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결론적으로 이 사건의 핵심을 말씀하시기를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가능하다는 이야기 입니까? 불가능하다는 이야기 입니까? 그러니까 옆에서 듣는 자들이 질문합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예수님의 답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부자가 되어야 합니까?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까? 부자는 진정으로 하늘나라 갈 수 없으니까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까? 또 한 번 생각 해 봅시다. 부자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오전에 예를 들었던 빌게이츠, 손정의, 현대 재벌, 삼성 재벌 정도라야 부자인지? 아니면 그 보다는 못해도 어느 선을 가지면 부자라고 보아야 하는지요?
그러면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삭개오는 부자입니까? 가난한 자입니까? 이 사람의 운명을 어떻게 될까요?
2. 삭개오의 교훈
2.1. 회개의 주도권은 하나님 아버지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 찾는 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 잃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비유, 이 세 개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교훈 중 하나가 잃은 아들을 찾는 비유에서 영접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 회개하고 세례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 회개가 앞서야 합니다. 회개는 죄인이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하는 것인가? 질문을 하게 됩니다. 회개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을까? 회개가 회개 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비유를 잘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세리나 죄인들을 만나실 때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다가오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러 나무 위에 올라갔다. 이 아들이 먼저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회개가 일어나고 있는가? 아닙니다. 회개는 실제로 아버지와의 대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있고, 예수님에게 주도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부른다. 그러니 삭개오가 구체적으로 회개를 합니다. 예수님 자신께 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먼저 달려가서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옷을 입혀 주고, 그것은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그제서야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 15:21) 하고 진정으로 회개를 합니다. 물론 그 앞의 아들이 18절에서도 보면 가 가지고 아버지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입맞춤이 먼저이다. 여기에 의도성이 있습니다. 영접의 주도권은 아버지께 있습니다. 예수님께 있습니다. 회개란 영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이슈입니다. 사죄의 은혜는 죄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이 본문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레위를 부를 때 먼저 예수님께서 사죄를 신청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문제가 된 것입니다. 죄인인 상태에 영접을 하고 그러므로 그가 회개하고 의인이 되게 하는,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는 것이 선교의 목적이다. 이것이 누가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죄인들이 찾아오는 마음도 성령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 합시다. 삭개오를 영접하고 회개하게 하신 분이 누구에게 주도권이 있다고요? 그러면 우리의 회개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입니까? 주님의 은혜로 가능했습니까?
2.2. 배부른 자는 문제가 있다
16장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 비유가 어디서 끝나느냐서부터가 쉬운 이야기는 아닙다. 8절 중반부터 교훈이 시작됩니다. 불의한 청지기를 예수님께서 정말 칭찬 한 것일까요? 하나의 예로 든 것일 뿐일까요? 이것부터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하나의 예로 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불의한 자도 이렇게 할지언정이라는 전제가 달려 있습니다. 윤리적인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초점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의 예로 들려진 케이스뿐이지, 너희들이 이렇게 되라. 이렇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8절에 ...이 사람을 이 세대의 아들들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 세대의 사람들과 빛의 자녀들(제자들)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물질 사용에서도 배울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뭐냐?
불의한 청지기는 문제가 생겼다.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는 상황이다. 빼앗길 상황이다. 그러니까 당장 지혜롭게 생각한 것이 이 자리는 오랫동안 계속 될 수 없으니까 이 지위가 끝날 때를 대비해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물질을 사용해야겠다.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물질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자기의 앞날을 위해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다. 이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떤 종은 있는 대로 한 번 써 보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청지기는 그러지 않았다. 지금 사용할 돈을 그렇게 쓰지 않고, 앞으로 사용할 날들을 위해서 생각해 보자. ‘아하 내가 이 사람들에게 쓰면 그 사람들이 나를 앞으로 환대 할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중요한 모습이고, 자기 현재를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을 했다는 것입니다.
빛의 아들들은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돈이 주어져 있습니다. 현재를 위해서 쓸 수도 있고, 미래를 위해서 쓸 수도 있는데 진정한 지혜자는 미래를 위하여 쓰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미래에 삶을 보증해 줄 하나님의 뜻이 무언인가 그것이 구제라는 것입니다. 나눠 주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지혜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 세상에 속한 자녀들보다 빛의 자녀들이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의 주인이 정말 뭐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인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의 특징은 주인이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청지기와 빛의 자녀 제자들의 청지기 도를 비교 해서 지혜로운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오늘 본문의 부자와 삭개오 이야기가 보충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원리는 평지 설교의 역전의 원리와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누릴 것이냐 미래에 누릴 것이냐? 지금 누리지 않는 자는....아닙니다. 현재가 모두가 아닙니다. 이 문제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두 사람 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요청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눅 16:3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왜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상이 유대인이다. 누가복음 6장에서도 이미 언급했던 것입니다. 가난함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가난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가난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25절이 초점을 이루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 16:25)
6장 20절부터 26절까지의 원리를 거의 문자적으로 주제가 거의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0~26)
특별히 24-25절 너희 부요한 자는 화가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위로를 이미 받았다. 이제 남은 것은 화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자와 나사로의 문제에서 분명히 해 준다. 우리 주변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혼자 배부르고 누리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배가 부르다는 것이 화라는 것입니다. 왜 배고픈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가난한 자가 많이 있는데 나누지 못해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라도 나누는 자와 나누지 못하는 자는 역전될 것입니다. 사복 사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평지설교의 내용들이 여행단락에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역전의 원리 이 땅이 아니라 앞으로 미래를 위해서 최대한 나누는 것이 지혜입니다.
2.3. 회개하면 된다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 비유, 삭개오의 주제는 5장부터 이어져 와서 삭개오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삭개오 이야기의 몇 가지 주제 중에,
삭개오가 세리라는 점, 이것이 문제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항상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문제 제기인데, 뭇 사람이 수군 그렸다. 이것은 유대인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누가는 보는 것입니다.
세리라는 개념 자체가 5장 15장에서 이뤄짐으로 말미암아 중요한 연결 선상에서 이해 할 수 있겠다. 세리는 돈하고 상관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런 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역설적인 원리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 갈 수 없다고 말씀한 진정한 의미를 여기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삭개와 부자 관원 사이의 주제상의 연결성은 둘 다 부자인데 첫 번째 부자는 실패 했고, 두 번째 부자는 성공했다. 첫 번째 부자의 모습을 보면 한 번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부자는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이다. 영생의 문제로 고민한 사람이고, 율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다. 가장 의로운 자의 표상이다. 왜요, 부자는 의롭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율법까지 지켰으니 의인 중에 의인이다 그러나 그가 실패 했다. 그러니 일반적인 원리는 부자란 실패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견해와 유대인의 견해와는 반대이다. 부자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보았다.
축복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반 복음적인 가를 생각 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것을 내 놓지 못하는 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자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가? 예수님은 과장법이다. 바늘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제자들은 질문을 던진다.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으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의, 부 이것입니다. 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물질의 사용에 있어서, 그러면 그런 자가 정말 있습니까? 삭개오가 증명해 준 것입니다. 여리고로 들어간 다음에 끝났는데 그 맹인의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삭개오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재물의 문제에 대해서 몰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이렇게 해야 하고, 여행의 목적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삭개오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돈이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의 사죄의 은혜이다.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눅 19:5-6)
죄인은 자기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것, 내갈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 하 실 수 있는 유일한 조건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때부터 회개는 시작됩니다. 빈손으로부터 회개는 시작됩니다.
그러면 삭개오는 어떤 회개를 했습니까? 이전까지는 세리로서 자기만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만나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누가복음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 가난한 자에게 삭개오도 눈을 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까지의 자신만을 위한 삶의 방향에서 삶의 방향을 가난한 자에게로 돌린 것입니다.
3. 잃어버린 지체에게로 관심의 방향을 돌려라
오늘부터 우리도 나! 나! 내 가족! 우리 교회! 에게만 관심을 돌렸던 부분을 회개 합시다. 내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리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입시다. 잃어버린 지체들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소유를 사용합시다. 이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요, 예수님이 원하는 삶인 것입니다.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0-17 17:2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