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았으나 죽은 교회

2007.10.02 22:36

윤봉원 조회 수:1491 추천:21

계 3:1-620070930날자: 2007년 9월 30일 주일오전
제목: 살았으나 죽은 교회
본문: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사데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 나의 신앙생활의 건강 상태는?
2. 사데 교회의 특징
2.1. 책망만 받은 교회
 사데는 소아시아에 있는 여러 도시 가운데서 교통이 가장 발달했던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소아시아에서 로마로 가는 길은 다섯 갈래 있었는데, 그 다섯 개의 길이 모두 사데를 통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교통의 요충지인 사데는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서 그 주민들은 큰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는 언덕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외세의 침입을 별로 받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사데교회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외부 세력에 의한 핍박(우상숭배)이나 이단(이세벨,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이 들어 와서 교회를 어지럽혔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 교회는 비교적 평탄하고 안정 된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였음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데교회에 보낸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를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이 전혀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나 버가모교회 그리고 두아디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주님께서 칭찬을 잊지 않았지만 사데교회에 대해서만은 칭찬의 말씀이 없이 바로 책망만을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2.2. 안일과 나태에 빠진 교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데교회를 향해서 뭐라고 책망하셨습니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1c). 예수 그리스도는 그 교회를 향하여 죽은 교회라고 했습니다. 서머나교회는 영적으로 살아 있는 교회였습니다. 버가모교회는 세상과 타협해 나가기는 했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기만 한다면 회복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두아디라교회는 중병에 걸려 있지만 대수술을 하면 회복이 가능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사데교회의 경우엔 단순히 중병에 걸린 정도가 아니라 중병을 앓다가 죽어 버린 교회, 영적 생명력을 상실해 버린 교회입니다. 어떤 비상 처방이 없으면 이 교회는 살아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왜 그 교회를 보고 '죽은 교회'라고 하는 극단적인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 교회는 부유하고 풍요로워서 모자랄 것이 없는 도시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와 성도들마저도 안일과 나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외부의 박해도 없고 이단의 침입도 없었기 때문에 성도들이 영적인 싸움을 하거나, 엎드려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간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회를 지배하던 쾌락과 사치와 안일의 풍조가 교회에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외부적인 침입이 없고, 박해도 없고, 이단의 거짓 가르침도 없고, 이렇게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으니 기도할 필요성도, 하나님께 간절히 매어 달려야 할 동기도 없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사데교회의 생명력을 시들게 만들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상황과 흡사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IMF라는 경제적인 큰 시련을 겪기는 했지만 요즘은 과거와 비교해 볼 때 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엄청난 부와 쾌락과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세계 어느 선진국과 비교해도 우리들이 누리는 경제적인 풍요는 뒤지지 않습니다. 최근 10-20년 사이에 이뤄진 이런 급작스런 풍요와 경제적인 발전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 자세를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일상생활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의 스타일도 많이 바뀌어졌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로 인하여 아쉬운 것이 없어지면서 우리 성도들의 마음에도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점차 없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는 그다지 마음이 간절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밤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젠 그 소리가 끊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교회들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깨어 있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들입니까?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교회, 정치적으로 핍박받는 교회, 이단의 거짓 교훈으로 인하여 시달리는 교회들 가운데는 일시적으로는 견디기 힘든 고난을 겪지만 결국은 그것은 통해서 생명력을 회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한 비전과 목표를 설정해 놓고 나아가고 있는 교회들은 살아있습니다. 그 외에도 어떤 중대한 과제를 앞에 두고 있는 교회들도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무런 문제없는 교회, 예배당이나 교육관을 건축도 할 필요가 없는 교회, 선교사를 파송할 계획도 없고, 어떤 새로운 꿈과 비전이 없는 교회, 현상 유지와 현실적인 상황에 만족해 있는 교회는 대부분 영적으로 쇠퇴해지거나 안일과 나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교회에 시련과 새로운 도전을 주시기도 하고, 어려운 문제를 안겨 주시기도 합니다.
 교회의 생명력을 잠식하고 성도들의 영성을 크게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나태와 안일과 현실 안주입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교회에서 평소 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를 잘 섬기던 권사님 한 분이 수개월 동안 기도회에 참석도 않고 구역장 봉사도 하시지 않기에 전화를 드렸더니 '목사님, 이젠 편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안일에 빠지면 교회도 개인의 영혼도 시들게 됩니다. 편하게 예수 믿으려고 해 보십시오 육신적으로는 편하고 영적으로는 시들어 죽게 됩니다. 우리 성도 개개인이 영적으로 깨어나야 하고, 가정이 하나님 앞에서 긴장해야 하고 교회가 영적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영적인 안일과나 태와 현실 안주의 자세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꿈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3. 살았으나 죽은 교회
어떤 교회는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지만, 어떤 교회는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교회도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모진 박해 속에서도 죽지 않는 교회가 있고, 공산당의 숙청에도 죽지 않고 싱싱하게 살아있는 지하 교회가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사데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평판, 명성)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사데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죽어 있었습니까?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많이 모였습니다. 찬송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찬송을 많이 부르는 교회였습니다. 활동이 없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지역 사회에 대한 봉사 활동도 많이 하는 교회였습니다. 외형적으로 그 교회는 좋은 교회라는 평판을 가졌을 것입니다. 다른 교회들은 사데교회의 활기와 재정적인 능력과 사회적 기여도를 부러워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잘 들어 보십시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는 달랐습니다. 사데교회는 분명 살았다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교회였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살아 있는 것 같았고, 영성이 있는 것 같았고, 활력이 있는 것 같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보실 때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이 보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보시는 기준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겉모습을 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은 결과를 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동기와 자세를 보십니다. 사람은 육신적인 것을 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인 것을 보십니다. 아무리 활동을 많이 하고,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이고, 아무리 재정 규모가 튼튼하면 무엇합니까? 영성을 잃어버리고 목적과 비전이 없는 교회는 죽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많은 프로그램과 다양한 활동과 사회적 봉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중심에 영성을 잃어버리고 기도를 잃어버리고 성별됨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생활에서 아무런 구별됨이 없는 성도는 살았으나 죽은 성도입니다. 말만 하고 헌신이 없으면 살았으나 죽은 성도입니다. 믿음만 강조하고 행함이 없으면 살았으나 죽은 성도입니다. 기도의 형식은 갖추고 있지만 기도의 능력이 없으면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적 사망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는 이미 죽었으면서도 외형적으로는 죽은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2.4. 소수의 깨어있는 성도
사데교회는 이처럼 생명의 불꽃이 거의 다 꺼져 가는 죽은 교회였지만 그속에도 희망의 작은 불빛이 엿보입니다. 4절을 보면,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옷)을 입고 나와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바른 신앙을 지키는 소수의 사람들이 그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소수의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남겨 놓으시고 그들을 통해서 교회의 영적 각성을 일으켰습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가리켜서 그루터기라고 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 우상숭배 정책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 신앙을 잃어버린 것 같은 그 시대에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자 7천명이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권위와 잘못된 교리로 인하여 영적 진리가 다 죽어버린 중세에도 소수의 복음적인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16세기 북 아일랜드 얼스터의 어느 시골 교회는 영적으로 완전히 침체하여 소망의 빛이라곤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에는 연로하고 병약한 제임스 글렌디닝(James Glendinning)이라는 목사님이 시무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성경을 율법적으로만 해석하고 복음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습니다. 그 교회는 마치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는 중환자와 같이 생명력을 소생할 것 같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이름 없는 5-6명의 성도들이 ‘이 교회를 살려 주세요 교회에 부흥을 주시옵소서’라고 5년이 넘도록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옷을 더럽히지 않고 영적 순결을 지킨 소수의 무리였습니다. 놀랍게도 그 기도는 응답되어 1625년 그 교회를 중심으로 '6마일 강변의 부흥'(6 mile water revival)이라고 하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영적 부흥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이 대부흥운동은 그 교회만을 살린 것이 아니라 북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와 나아가 잉글랜드와 미국으로까지 번진 근대 부흥운동의 효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3. 죽은 교회와 성도의 특징
3.1. 숨을 쉬지 않는다
그러면 죽은 교회와 죽은 성도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죽은 사람은 몇 가지 뚜렷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죽은 사람은 숨을 쉬지 못합니다. 죽은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숨을 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똑 같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교회, 영적으로 죽은 성도의 가장 큰 특징은 영적 호흡이 중단되어 있습니다. 기도가 영적 호흡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아는 영적 상식입니다. 다른 면에서는 활발하지만 기도가 활발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죽었거나 죽어 가는 중에 있는 교회입니다. 기도가 중단된 성도도 영적으로 이미 죽었거나 죽어 가는 성도 입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금요일 밤 기도회나 새벽기도회가 있는지, 없는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봐서는 그 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알 수 없습니다. 어느 교회든지 주일 예배는 다 생동감이 있고 활기가 넘쳐 보입니다. 그것으로는 영적 실상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영적 생명력은 언제 드러납니까? 금요일 밤 기도회와 새벽기도회에서 드러납니다. 기도회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기도하는 체질이 된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 입니까? 죽어 있는 교회입니까?
 영성이 살면 가정도 살고 회사도 살고 영육이 다 살게 됩니다. 기도는 거리나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성과 사모하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 정말 영적으로 살아있는지 죽어가고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도생활을 점검해 보시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2. 음식을 먹지 않는다
죽은 사람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죽은 사람은 먹을 필요도 없고 먹고 싶지도 않고 먹을 수도 없습니다. 중환자들의 특징은 식욕이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죽은 사람이 음식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한 주간 동안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섭취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싶지도 않고 그것이 기다려지지도 않습니다. 말씀을 섭취하지 않아도 아무런 배고픔도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경을 읽지 않고, 성경을 배우지 않고, 말씀 Tape 재독을 하지 않아도 영적 허기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지금 영적으로 중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3.3. 재생산이 일어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생산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교회와 성도들은 영적 재생산을 할 수 없습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선교사와 평신도 헌신자들이 계속해서 배출되고 생산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시든 교회는 이런 영적 생산 활동이 저조합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성숙한 성도는 영적 생산을 계속합니다. 그런 성도들을 쉬지 않고 전도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 분은 새로 입교한 어린 성도를 잘 양육하고 돌봅니다. 어린 영혼을 돌보고 영적인 자녀를 낳는 사역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힘들고 피곤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성도들은 이런 사역을 마다합니다. 지금 우리는 누군가를 전도하기 위해서 생명을 잉태하고 있습니까? 어린 성도들을 돌보기 위해서 관심을 쏟고 있습니까? 자신을 돌아보면 나의 영적 생명력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데교회는 처음부터 죽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어느 한 순간에 죽은 교회로 변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데교회는 자신이 영적으로 죽어 가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몸이 아프거나 병들면 그것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병은 중병에 걸리더라도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은 정말 위험한 것입니다. 영적 질병이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서서히 우리의 영적 생명력을 잠식해 옵니다. 나도 모르게 기도회에 나가기가 싫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부담되고 힘듭니다. 말씀이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영적인 봉사가 부담스럽고 귀찮게 느껴집니다. 이처럼 서서히 영적인 부담을 느끼다가 나중에 가서는 부담조차 느끼지 않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전도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말씀을 대하지 않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서 영성은 서서히 시들고 죽어 가는 것입니다.
닭이 20일간 달걀을 품에 품고 있으면 병아리가 깨어납니다. 그러나 20일간 품고 있어도 병아리가 나오지 않고 썩은 물만 나오는 달걀도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없는 달걀, 무정란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고 신앙의 훈련을 하면 신앙이 자라고 삶에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변화가 없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겉모습은 다 똑 같지만 무정란과 같은 성도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나의 지금 모습은 어떠합니까? 육신적으로는 살았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가 아닙니까? 겉모습은 성도요 직분자이지만 내 속에 성령의 능력과 경건의 능력이 상실되어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예배를 드리는 것 같지만 그 예배를 통하여 내 인격과 삶이 변화되지 못한 채 형식과 안일과 나태에 빠져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소수의 깨어있는 성도들이 있는지를 살피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 죽은 것 같은 사데교회 속에도 싱싱한 영적 생명력을 지니고 있던 소수의 성도들이 있음을 보셨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죽어가는 교회의 영적 소생을 위해 기도로 헌신하는 소수의 성도들을 찾고 계십니다. 식스마일 워터 라바이벌의 주역이 되었던 그 무명의 여성도들처럼 교회의 영적 각성과 대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우리 교회에 생명의 불꽃이 힘 있게 타오르게 되기를 위해서 마음을 모으십시다. 우리 교회에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도록 성령님의 임재를 간구하십시다.
{참조. 프로 에클레시아 신학회 2003년 봄, 오창윤 목사의 ‘살았으나 죽은 교회’}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0-02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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