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것은 원한적인 기도뿐

2007.12.30 21:35

윤봉원 조회 수:1127 추천:75

눅 18:6-92007123002날자: 2007년 12월 30일 주후
제목: 할 수 있는 것은 원한적인 기도뿐
본문: 누가복음 18장 6절∼8절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 하나님을 찾아라
1.1. 자기의 나쁜 점을 발견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은 당신을 우리가 찾는 것을 심히 기뻐하십니다. 왜?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사랑할 만한 그런 무엇이 있어서 사랑하시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없을 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없을 때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생각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시게 됐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당신 홀로 계셨는데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당신을 볼 때에 흠과 점과 티와 주름잡힘이 없고 어느 모라도 하나도 마음에 불만스럽거나 또 부족하거나 ‘요것은 좀 고쳐봤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것이 전혀 없어 당신의 모든 속성이나 또 당신의 중심이나 모든 것이 다 온전하고 깨끗하고 발랐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 대단히 나쁜 생각이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아주 나쁜 사랑입니다. 왜 그런가? 우리는 타락해서 본질과 본성이 다 마귀적이요 전부 악성적이요 악습적이기 때문에 실은 자기는 미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도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는 그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미워해야 될 아주 삐뚤어지고 나쁘고 악하고 독하고 더럽고 강팍하고 모두가 다 사욕적이며 모두가 다 이기적이며 아주 나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생 동안 우리는 자기의 좋은 점을 보고 사는 것이 일면 있어야 되지만 자기의 나쁜 점을 보고 살아아 된다, 항상 나쁜 사람으로 아주 못쓸 사람으로 자기는 인식하고 살아야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게 성경입니다.
그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에게 아주 나쁜 점 말이요, ‘요 점을 보니 또 이것은 참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다. 아무리 자기지만 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 요 생각은 용납할 수 없다, 요 정신은 용납할 수 없다, 이 성품은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은 내가 이런 것을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저주받고 대항받을 노릇이지 나만 나를 사랑하지 이것은 다른 사람은 요런 것을 다 좋아하지 안하고 다 싫어할 것이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기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대해서 요구하고 있는 그것을 제가 자각하면 나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 될 터인데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대해서 원망스럽고 덜 좋아하고 그렇게 뭐 찬성하지 안하고 기뻐 아주 환영하는 그럼 점이 되지 못한 그런 점을 자기가 깨닫고 그 점을 자기가 미워하고 ‘요게 우리에게 없으면 좋겠다’ 하는 평생 죄인으로, 나쁜 사람으로, 못쓸 사람으로 그것을 깨닫는 그것만 계속 생각하면서 오늘 치료받고 창조의 근본되신 이로 말미암아 다시 개조를 받을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그저 개조받기를 힘쓰는 이런 사람으로 죽는 날까지 지내야 된다 하는 그것이 성경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있을 자리는 죄인의 자리에 있어야 된다, 항상 주님 앞에 부르짖어서 죽는 날까지 고침을 받아야 될 자이다, 이렇지만 또 시편 기자들을 보면 그러했습니다.
1.2. 성경의 사례들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 앞에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를 감찰해 보시옵소서. 나를 판단해 보시옵소서. 나를 이렇게 평가해 보시옵소서. 내게 흠이 있습니까? 흠이 없습니다. 점이 있습니까? 점이 없습니다. 흠과 점이 없는 온전한 자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그것을 성경을 보고서 처음에는 깨닫기가 좀 어렵고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예수님의 구속을 자기가 입고 난 다음에 깨달을 때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자기를, 처음에는 사람이 나도 어린아이일 때는 제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또 제 본능으로만 움직이지 뭐 아무 비판이나 평가가 없습니다. 그러나 장성해지면 제가 있는 줄 알고 그때부터는 제 사욕이 생겨져 가지고 주관이 생겨지고 이런 것처럼 우리도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됐을 때에는 우리가 모릅니다.
모르지만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자가 차차 자라서 그만 그러다가 자라고 보니까 싸움이 일어납니다. 자기 속에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사람으로 살려고 하고 보니까 옛사람이 분명하게 그전 사람으로 살려고 하고 이래서 그전 사람이 밉기가 짝이 없어서 어쩌든지 밤낮 미워서 ‘이것을 죽여야 되겠다 꺾어야 되겠다’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하나님의 형상을 보니 어떻게 좋고 좋은지,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인간의 비밀을 알았다” 말한 것처럼 자기가 그 묵상 가운데에 들어갔을 때에 그때에 만난 자기, 발견된 자기, 그때의 자기, 그때에 그 자기가 그립습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고 굉장한 죄인인데 “나는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한 일이 있습니다.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 자기를 발견하고야 그렇게 한 것입니다.
2.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기를 발견하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첫째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알고, 다음으로는 주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자기가 어떠한 자인 것을 보고 안 사람은 말하기를 ‘네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이 새사람을 네가 잊어버리고 있다. 네가 지금 잊어버렸다. 너를 잊어버렸다. 너는 이렇게 잘나고, 이렇게 좋고, 이렇게 온전하고, 이렇게 깨끗하고, 이렇게 영영하고, 참 생각 하나도 전부 마땅히 해야 될 생각을, 네 생각은 만물도 다 좋아하고 환영하고 하나님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이 네 생각, 네 성질, 네 마음, 네 소원, 이런 이 너를 참 온전하고 깨끗한 너를  중생된 영을 말이요 너를 네가 잊어버렸다.’
무엇 때문에 잊어버렸느냐? 세상에 있는 것 이것 저것을 탐해서 잊어버렸다. 네가 어리석다. 그까짓 것을 탐할 게 아니라 온 천하를 다 네것을 만든다 할지라도 너 자기만 못하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었으면 그 사람은 손해갔다. 자기는 온 천하보다 존귀하고 천하에 주인공 될 자다. 존귀하다.
자기를 빼앗겨도 손해다, 빼앗긴다 말은 현실 현실마다 자기는 죽은 것이 죽지 아니할 자로,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자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자로, 혈육의 것이 신령한 자로 이렇게 이게 죽은 것이 살아나서 완전히 바꾸어서 자기를 바꾸어 가질 수 있는 이것이 현실인데 현실에 네가 세상 것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그 바꾸지 못하니 그것이 자기를 세상에게 빼앗겼다 그 말입니다. “자기를 잃은 자 자기를 빼앗긴 자는 천하를 얻고도 소용이 없다” 그렇게 주님이 친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래 가지고서 이 자기로서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대할 때에 그 모든 것을 내가 살려야 되겠고, 구원해야 되겠고, 그것들이 지금 알지 못해서 멸망 가운데 빠지니까 건져야 되겠고 하는 이 사람으로 살아야 되는 것이 실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를 찾는 길이 뭐인고 하니 자기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미워하지 안하면 자기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미워할 자를 미워함으로써 자기 사랑할 수 있는 자기를 사모하기 때문에 자기를 주님을 사모하는 것만큼 자기로 만족하고 자기로 만족한 자기를 발견한 것만큼 미운 자기가 있습니다.
3. 원한적인 기도를 하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참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사랑하고, 좋아하고, 그분을 늘 그저 꿈에라도 그분이 아니면 도무지 만족이 없고 그분이 자꾸 사모돼지고 이런 가운데서 성경대로의 사람이 사모돼지고 성경에 위반되고 하나님에게 정반대되는 이 옛사람 이것을 미워해서 여기에 원한, “원한을 갚아 주지 않겠느냐?” 이 원한이 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이 원한이 없으면 안 됩니다.
미운 자기가 밉고, 밉고, 미워서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서 이것을 다 벗겨 달라고, 여기에서 해방시키고, 원한적으로 옛사람 벗기를, 옛사람 죽여주시기를, 옛사람을 뿌리뽑아 주시기를, 옛사람이 자기에게 용납지 못하도록 해 주시기를 참 원한적으로 원하는 이것이 참 기도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참사람이 이 세상에서 길러야 되는데, 이 길러야 되는데 손의 기능을 기르는 것은 손으로 기릅니다. 육체의 손의 행위를 가지고서 손의 기능을 기르고, 눈의 기능을 기르는 것은 눈의 행위를 가지고 기릅니다. 성경대로 눈에 안 볼 것은 안 보고 볼 것은 보고, 또 들을 것은 듣고 안 들을 것은 안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이 지체가 들어서 범죄케 하면 끊어버리라” 하는 그 말씀의 깊은 뜻은 자기의 심신 기능의 구원은 손은 손을 통해서 손의 기능이 구원되고, 눈은 눈의 기능을 통해서 눈의 기능이 구원되고, 발은 발의 기능을 통해서 발의 기능이 구원되는데, 생전 그 손이 한 번도 하나님 말씀 순종하지 안했고, 그 발이 순종하지 안했고, 그 눈이 순종하지 안해서 아무리 보지 말라 해도 그런 것만 보고 보라 하는 것은 보지 안하면 구원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나기는 나서 우리가 구원을 얻어서 다 하늘나라 가기는 갔지만 이제 갓난 어린아이와 같은 자도 있고, 그저 겨우 걸음발 하는 자도 있고, 제법 커서 무엇을 그 이웃을 돌아다니는 자도 있고, 제법 커서 세계를 돌아다니는 자도 있고, 이래서 우주와 영계를 제 마음대로 횡행할 수 있는 이런 자도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이것을 그분은 연상하고 명상한 것 같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서 낳은 자와 같다” 하는 것은 세상에서 만삭되지 못한 그것을 사모한 것이 아니고 그가 항상 ‘요 면은 내가 지금 아직까지도 난 그대로, 다른 면은 자랐지만 요 손이라는 요 부분적으로 요 면은 지금 만삭되지 못해서 낳은 것과 같은 요런 아직까지 어려서 발달이 없고 요렇게 생명은 있지만 발달 없는 요런 부분이 있다.’ 거기에 포부가 되어 가지고서 그 말을 한 줄 압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옛사람 이것이 원한적으로 우리가 미워서 하나님께 구해야 하나님이 이것을 이루어 줘서 이루어지지 우리가 그것을 하루 스물네 시간이라면 스무 시간은 그것을 사랑하고 네 시간은 그것이 조금 싫은 정도로 이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의 원수인 우리 속의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원한적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힘입어서 옛사람을 뿌리 뽑고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이 길만이 우리의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금생과 내생에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2-30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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