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구원 4 가지

2008.03.27 06:20

윤봉원 조회 수:1074 추천:58

히 2:1-42003032302날자: 2003년 3월 23일 주후
제목: 큰 구원 4 가지
본문: 히브리서 2장 1절∼4절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1. 사람이 가치로 삼을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창세기 5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은 나면 자라고 자라면 시집가고 장가가고 또 시집 장가 가면 자녀 낳고 자녀 낳고 살다가는 죽는 것이 인생이라 하는 것을 기록해 주셨습니다. 거기에 두 인물, 한 인물은 구백육십구 세를 살다가 죽었습니다. 특수한 한 인물은 하나님으로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아 기르다가 다시는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승천했습니다. 이 에녹은 초대 교회에 곧 원시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계시요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계시입니다.
사람은 가치를 잘나고 못난 것을 가치로도 삼고 또 잘 자라고 못 자라는 것도 사람의 가치로 삼고 또 결혼을 자기 마음에 만족한 결혼을 잘하고 못한 것을 사람들의 가치로 삼고 또 삼십일 년만 더 살면 천 년을 사는 구백육십구 세나 장수한 것을 가치로 삼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5장에 인생을 기록한 그 인생을 볼 때에 거기는 선천 후천의 잘나고 못난 것 그것도 제일되는 가치는 아니고 또 결혼을 잘하여 아주 행복스러운 부부되는 그것도 제일 가치는 안 되고 많은 자손을 낳고 풍부한 경제로 사는 것도 사람의 제일 가치는 안 되고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도 사람의 가치는 아니요 다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것만이 사람의 가치라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히브리서를 기록한 저자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참된 신학이나 올바른 교리를 제공하는데 있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저자의 목적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격려하는데 있었다. 그렇지 않고 방심한다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이나 다른 영향들로 인한 압력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선원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지 않는다면 배는 표류하여 안전한 항구를 떠나 하구로 떠내려갈 수 있다. 배가 표류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 역시 그리스도를 떠나 흘러 떠내려 갈 수 있다. 이 말씀은 독자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더욱 간절히 삼갈 것을 권고 한다. 삼갈 대상은 ‘모든 들은 것’이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진리에 대해 변덕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우리가 주식이나 스포츠 결과에 신경을 쓰는 것만큼 기독교 진리에 집중하고 있는가?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언제 표류를 할까요?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 ‘태만하거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스스로 만족할 때, 이전에는 분명하게 거부하였던 죄악에 다시 빠져 들 때, 도덕적 기준을 타협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불순종할 때,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소홀히 하여 소극적인 그리스도인이 될 때’라고 볼 수 있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2절) 과거 천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도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전 인류가 홍수 심판에서 전멸될 때도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주신 그 계시 그대로 실행이 됐습니다. 또 선악과 먹으면 죽으리라 하는 그 말씀도 그대로 실행이 되고 보응이 됐습니다.
거게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한 것으로 그렇게 기록돼 있는데 여게는 ‘천사들을 통하여’라는 이 말씀, 천사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라 하는 말씀이 혹 그런 말씀이 아니라고 그렇게 잘못 깨닫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요 하나님이 나타나서 대면하고 보면 온전치 못한 인생은 전멸이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으로, 하나님 아버지로, 하나님으로 이렇게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이 신비적으로 천사를 통해서 나타나신 것이지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신 것 아닙니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도 가감 없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고 실천했다 하는 그 말은 구약에 모든 구약 성경 말씀을 다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 가지고 말씀한 것같이 그렇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비한 이치로 천사를 통해서 나타나신 모든 말씀입니다.
스데반은 마지막 설교에서 그를 대적하는 군중을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은’(행 7:53)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견고하게 되었다(구속력이 있다)고, 다시 말해서 율법이 유효하며 순종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실지로 하나님을 믿고 그의 교훈을 순종하는 자들은 그의 축복을 받는 반면, 반역하는 자들은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음을 발견하였다(레 26장).
그 말씀도 범한 자는 ‘공변된 보응을 다 받았거든 하물며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는 것은 천사들을 통하여 주신 말씀도 지키고 안 지키고에 따라서 약속대로 정당한 보응을 필연적으로 받았거든, 하물며 ‘주로 말씀하신바요’  즉 주님을 통하여 주신 말씀(구원의 소식: 복음)과 그의 사활의 대속의 공로를 등한히 여긴 데 대한 정당하고 공평되고 상당한 보응은 필연적으로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훨씬 더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기독자도 이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산 모든 행위가 영원히 형벌 받고 고통 받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자라도 이 구원을 등한히 여긴 것에 대한 대가는 영원무궁토록 마음과 뼈와 모든 지식과 생각을 다 녹히는 그 고통이 있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한 그 일은 평생 베드로의 마음속에 가장 아픈 것으로서 그는 벗어나지 못할 그런 큰 고통을 당한 것이 하늘나라의 한 조각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도 보면 요한은 성자라고 할 수 있는 요한이었지만 밧모섬에서 주일날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그는 평소에 주님을 상대한 모든 생애가 너무 기막히고 원통하고 두려워서 그 앞에서 기절되어 죽은 자같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주님이 위로를 주셨습니다.
하늘나라는 무조건 좋고 기쁘기만 한 나라가 아니고 이 큰 구원에 대해서 등한히 여긴 것 그것을 영원히, 누가 말할까만 원통하고 마음 아프고 기막히고 참 후회되는 그것이 영원한 그에게 한없는 행복을 가졌지만 행복 속에 행복된 자가 누리는 고통이요 성자들이 곧 누리는 고통이요 예수님의 대속을 받은 성도들이 누리는 고통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형벌은 없습니다. 형벌은 없는 곳이나 그 원통스러운 그 보응이 있게 됩니다.
3. 큰 구원
3.1. 영생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큰 구원이 무엇인가 네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주님의 희생과 역사로써 영생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인재명이라’ 사람은 죽고 난 다음에 이름을 둔다 이렇게들 말하지만 죽으면 그만입니다. 뭐 제 뒤에 죽은 뒤에 아무 찬양을 하고 어떤 존칭을 받는다 할지라도 후대 사람들에게 후대 사람들이 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지 본인은 그것으로서 죽으면 끝나 버렸습니다. 안 믿는 사람이 죽으면 세상에 어떻게 했다 할지라도 그만 그것은 끝나 버렸습니다. 뭐 천하 사람이 그 사람을 찬양을 한다고 해도 본인은 벌써 생명이 끝났으면 끝났습니다. 그 지위가 끝났으면 끝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택자들은 이 세상 어떤 불행스러운 그 불행이라도 죽은 다음의 그 모든 것보다는 무한한 행복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제일 불행스러운 처지에 살고 있어도 죽은 모든 사람들보다 행복된 행복이다 그렇게 평가합니다.
이런데, 우리에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 영생을 줬습니다. 이 영생은 금생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너머 무궁세계 영원무궁토록 죽지 않는 영생하는 생명입니다. 생명은 해할 자가 없어야 생명이 되지 해할 자가 있는 그 생명은 생명이 아니라 위험 속에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 그 생명이 끊어질지 모릅니다. 영생이라 하는 것은 영원토록 해할 자가, 침노할 자가 없다는 그 생명이기 때문에 이런 모든 것에 다 해를 완전히 방지하고 존재할 수 있는 그 능력을 갖춰야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에게는 영생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체의 몸, 썩을 고깃덩어리는 아무리 단속해 봤자 결단코 위생 주의가 생명을 연장시키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저 있는 동안에 조금 약하고 강하게 지낼 것뿐이지 생명을 연장시키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십세기의 이 과학에게 하나님께서 그 생명의 주권을 맡기지를 안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선악과 먹으면 죽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모든 인간들은 다 꼼짝 못 하고 그 율법에 복종해서 다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깃덩어리는 아무리 배우고 배워서 알뜰히 해 봤자 송장됩니다. 절대 죽습니다! 못 삽니다. 절대 죽습니다. 또 일 초도 덜 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는데 왜 이 영생은 등한이 여깁니까? 거짓말입니까? 그러면 거짓말로 영생한다 합니까? 아니오. 늙지도 쇠하지도 변하지도 낡아지지도 아니하고 영생합니다. 이 영생은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우리에게 주셔서 이미 우리가 영생을 받고 있고 받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하고 이 생명이면 영생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약한 이 영생을 만일 거짓말 했으면 하나님은 가장 큰 심판을 받아서 유황불 구렁텅이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영생은 거짓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죽는 것은 이것을 갈아입습니다. 형체는 꼭 요 형체대로 갑니다. 얼굴도 틀리지 않습니다. 형체는 가는데 내가 땅위에서 내 정력을 가지고 내 정력을 기울여서 어학을 했으면 어학 기능이 됐고 과학을 했으면 과학 기능이 됐고 했는데 하늘나라는 과학 기능이고 만물 기능이고 예술 기능이고, 어떤 육체의 어떤 기능이고 하는 그런 기능은 하나도 못 갑니다.
하늘나라는 다만 예수님의 사죄 칭의, 사죄의 기능, 칭의의 기능, 화친의 기능, 성령의 기능, 진리의 기능 이 기능만이 하늘나라 갑니다. 남은 기능은 못 갑니다. 제가 온 천하를 거머쥐고 마음대로 했다 할지라도 그자에게 진리대로 행한 기능이 하나도 없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있을 기능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생’ ‘영생’ 미친 사람 같아도 어쩌든지 우리가 말로 표시는 안 해도 영생 영생 영생 영생 하면서 죽는 날까지 영생도 계속 노래를 부르면서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 이렇게 부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줬습니다.
3.2.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실력
둘째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우리의 실력을 갖추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실력으로 우리를 양육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니? 그분의 모형이라 말입니다. 그분이 전지니까 나는 전지의 모형이요 전능의 모형이요 완전의 모형이요 사랑의 모형이요 거룩의 모형이요 성결의 모형이요 그분의 모형이입니다. 하나님같이 나를 주님이 양육해 주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양육이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이 어찌 생겼노? 하나님과 같은 나를, 하나님이 이 면은 어찌 생겼노 저 면은 어찌 생겼노?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연구할 때에 하나님의 형상과 같은 우리 하나님의 모형 우리를 만드신다 했으니까 이 구원이 어떤 구원인가 하는 것을 차차 차차 알아질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 놓으면 날 때부터 계획하고 죽을 때까지 마귀에게서 나온 마귀 지식! 마귀 대갈빼기에서 나온 마귀 지식! 썩을 거! 죽을 거! 요것만 가뜩 채우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거짓말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은 하나도 머리에 안 넣어 놨으니까 그것이 송장덩어리지 뭐입니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이 구원을 생각해 봤습니까? 이 구원은 우리가 업신여겼습니다. 업신여긴 자의 그 결과가 어떠하겠느뇨?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뭘 피할란지? 성경 보면 알 것입니다. 피하기 어렵다 말이지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것은 우리는 우주를 일 초 동안에 억억만 바퀴도 더 돌 수 있는 것으로 부활합니다. 조만간에 부활합니다!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구원을 주셨는데 우리를 부르신 것은 창조자의 형상대로의 구원을 주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조주 그분과 꼭 같은 형상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보다 더 실력 있는 게 어디에 있습니까? 이보다 더 큰 실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을 생각해 봤습니까? 이것이 등한히 한 죄입니다.
3.3.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
셋째로는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위치를 우리에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유일로 받는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를 만들어 주신 것을 에베소 1장에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그 설명을 뭐 다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무슨 조금 부자라서 그저 재산이나 몇 억 가지고 있는 그 부자의 아들만 돼도 배짱을 내면서, 이 전 세계로 말하면 손바닥만큼도 못한 남한에 정권 잡은 자의 양아들이라고 해도 영광이라고 해 가지고 뻘뻘 떨고 하는데 하나님이 큽니까 온 세상에 제일 큰 나라 대통령이 큽니까? 제일 부자가 큽니까? 누가 큽니까? 하나님이 큽니까 하나님이 부자입니까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큰 부자가 있습니까? 더 큰 권력가가 있습니까? 더 큰 존영자가 있습니까? 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만들어 주셨는데 이 구원은 등한히 여깁니까? 왜 등한히 여깁니까?
하나님 아버지 아들을 우리 만들어 줬습니다. ‘아, 나는 이런 배경이 있다.’ 한국과 세계 인간의 배경을 다 가져도 그까짓 것 하나님의 아버지의 아들의 가진 배경에 억억만 분의 일도 안 됩니다. 그까짓 건 다 멸망입니다. 멸망의 배경입니다. 우리 배경은 멸망의 배경이 아닙니다. 대주재 주권자 완전자 그분이 우리 배경입니다.
3.4. 영원한 자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의 위치를 우리에게 이루어 주셨고 영원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영원한 자유.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보면 영원한 자유 주셨습니다. 유황불 구렁텅이도 자유입니다.
내가 말 들어 보니까 뭐 이 세상에 조금 강대국이라고 미국 시민권이 있으면 그 사람들은 공산국가에도 자유로 이렇게 다 출입을 할 수 있다. 모든 인간들이 단속하고 단속해서 자기 마음에 아무것도 못 들어오구로 하지만 아닙니다. 이 자유를 가진 자는 인간들의 마음 속에 자유로 다녀요. 마음대로. 제까짓 게 들어오라 하든지 말든지 자유로 다닙니다. 모든 인간들의 그 심리와 정신 속에 자유로 활동하고 모든 피조물 속에 자유로 활동하고 하나님 안에도 자유로 활동해. 이런 자유를 주셨습니다.
4.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 죄를 회개하자
주님은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죽기까지 하시고 또 피조물의 형상을 입으시고 하셔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영생 주셨습니다. 영생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이십니다. 영생을 주신 주님이오. 하나님의 형상의 실력을 주신 주님이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의 지위를 주신 주님이오. 모든 존재에게 영원무궁토록 자유를 주신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용서의 주님이시면서 엄격한 소멸하는 불의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또 믿어야 합니다. 이 네 가지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 이 죄를 회개를 합시다. 그리고 성령의 증거, 즉 영감에 순종하는 자가 됩시다!
{1988년 9월 25일 주일오전}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3-2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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