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감사 생활

2008.11.10 20:26

윤봉원 조회 수:1132 추천:54

시 136:12008110901

날자: 2008년 11월 9일 주전
제목: 올바른 감사 생활
본문: 시편 136편 1절∼26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 왜 감사해야 하는가?
우리가 만난 환경에서 하나님은 범사에 감사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환경을 돌아보면 그렇게 감사할 거리가 많은 것 같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감사할 요소보다는 원망 불평, 짜증 낼 일이 더 많아 보이지 않나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만 하라고 하실까요? 그것은 감사의 동기를 바로 알고 보면 그렇게 감사만 하고 살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만 하며 살 수 있는 자들이 됩시다.
1절로부터 9절까지는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한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10절로부터 16절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해서 인도하신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17절로부터 20절까지는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대적을 다 하나님께서 제재하신 데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땅위에 우리가 보기에 놀랄만한 모든 강한 각양의 세력들이 있는데 그 모든 세력이 우리를 대항한다고 해 가지고서 해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있음으로 우리 구원되는 것도 많습니다. 그것이 있음으로 우리 구원되는 것도 있고 또 세상에 강한 세력이 있음으로 우리 구원을 방해하는 것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구원을 방해하는 것도 있고 우리 구원에 이용을 당하는 것들도 있는데 우리 구원에 방해되는 그런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낱낱이 다 제거해 주심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21절부터 26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땅위의 소유와 또 무궁세계의 소유의 그 기업을 주신 것에 대해서 말씀을 기록했고 또 마지막에는 우리에게는 식물을 주신 데 대해서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136편에 있는 말씀은 늘 계속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감사하라’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감사하라는 것은 어데서 그것이 나오는고 하니 하나님이 자기에게 은혜 베푸신 그 은혜를 알고 또 그 은혜를 자기가 느끼고, 알고 느끼고 또 자기가 인정하고 또 자기가 실행을 하고 또 자기가 그 실행에 따라서 자기 자체와 모든 자기의 그 환경과 배경들이 자꾸 변해져 나가는 것을 자기가 깨닫고 느낄 때에 필연적으로 감사가 나옵니다.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 자체와 우리와의 관계된 그런 종류,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서 빼내서 구원하신 그런 모든 종류들의 은혜, 또 우리의 구원의 그 환경을 조절해서 우리 구원에 방해가 되는 그 모든 세력들을 다 제재하고 제거하신 데 대한 모든 은혜들, 우리가 그 영육의 기업을 하나님이 주셔서 가지고 받은 그런 모든 종류들과 또 영육의 양식을 주어 가지고서 먹게 하는 그런 종류들의 그런 은혜를 자기가 제일 처음에는 아주 약한 것 미약한 것을 알았을 것이고, 또 그 다음에는 조금 더 크게 강하게 넓게 그렇게 알았을 것이고 또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믿어지는 그 믿음을 자기가 받아서 겪었을 것이고 또 거기에 자기가 받아서 가지게 되는 그 가져 본 그 체험과 경험이 있었을 때에 거기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2. 올바른 감사 생활
2.1. 하나님을 바로 알고 상대하라
우리는 하나님이 감사하라 했으니까 무조건 감사해야 된다 해 가지고서 그저 감사하는 것을 하나님이 아주 역겨워 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모든 속 깊이 우리가 느끼는 마음보다 그 깊이 우리의 전체를 완전히 다 아시는 분이시며 또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전부에 모르시는 것이 없고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자기가 자기를 안다고 해도 그 한계가 있지 다 알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우리를 없는 가운데서 만드셨고 또 만드신 그것을 사람들이 뭐 이런 뭐, 어떤 사람은 그 사람에 대해서 심리면으로 연구를 하고 또 육체면으로 연구를 하고 그의 정신면으로 연구를 하고 그렇게 다 전공을 해서 연구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끝까지 남김없이 다 연구해서 안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전공한다고 해도 그 전공으로 찾아가는 인간의 지능으로써는 하나님이 만드셔서 사람이 되어 있는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사람들이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 측량 못할 그 넓고 깊은 그 범위를 가졌고 또 고상한 질들을 가진 그런 것을 하나님은 다 당신이 계획하셔서 당신이 만드셨습니다. 무슨 식물이나 어떤 동물이나 무슨 어떤 균 종류라도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거기에 대한 완전 지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 지식을 가진 것보다도 사람이 완전 이 지식할 수 없는 그 모든 존재들을 당신이 없는 가운데서 다 만들어 내신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아는 범위는 완전히 다 알고 계십니다. 또 그분이 움직이지 안하는 것은 그만 죽어 버립니다. 많은 생물들이 있고 또 사람들은 무생물이라고 말하지만 무생물도 하나님이 거게서 역사하지 안하시면 그것은 그만 파멸되고 맙니다. 또 생물들도 당신이 역사하시지 안하시면 그 생물의 생명은 끝나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지식적으로 심히 광대하시고 무한히 인간을 탁월해서 완전을 다 아시고 완전을 아시는 것보다도 완전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신데 이분이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인간이 상상도 못할 만큼 구비하게 세밀하게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조그마한 식물 하나도 그것을 지금은 거기에 대한 세포들이 있어서 사람이 참 거기에 대한 전공가가 아니라면 상상도 못할 만한 그런 오묘가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을 깨닫고 있는데 그런 것을 창조하셨고 그런 것을 다 계획하신 분이시요 또 그런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관리하시는 분이시며 또 그것들에 대한 세포 하나도 당신이 손을 떼고 당신과 관계가 끊어지면 그때부터는 다 그 조성된 것들이 근본으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벌은 다 같은 동봉 종자지만 사료를 잘 먹이면 왕봉도 되고, 동봉도 되고 이렇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하나님이 나기 전에 만드신 것이 각각 다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맡겼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그 후로도 하나님이 거게다가 재료를 들여서 관리하는 데도 차이가 있고 또 재료를 투자하는 데도 차이가 있어서 이렇게 사람들은 많이 차이가 있다.
차이가 있는데 그 사람이 감사하는 것이라든지 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이렇게 대우를 하는 것이라든지 또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자기가 연구를 하는 것이라든지 그 그런 모든 면에 있어서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아는 면으로 상대하는 것이나 또 두려워하는 면으로 상대하는 것이나 사랑하는 면으로 상대하는 것이나 의지하고 바라보는 면으로 상대하는 것이나 순종하는 면으로 상대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상대하는 그 각 종류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그 사람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 사람으로서는 그 이상 더 가질 수가 없다. 그 사람으로서는 자기의 전부를 다해서 이는 연구한 것이다. 또 다해서 자기는 기억한 것이다. 또 다해서 이것은 깨달은 것이다. 이 속에 하나도 남김없이 진정 밑절미까지 다 해서 감사한 것이다. 또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런 분이신데 이분 앞에서 외식적으로 껍데기로 이렇게, 그분을 안다는 것이나 그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나 또 그분에게 대해서 무슨 상대하는 어떤 행동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더 할 수 없을 만큼 자기를 다해서 그분을 상대하고 자기를 다해서 그분을 상대하지 않고는 그분을 속이는 것이고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것인 줄을 알고 자기를 다해서 하나님을 상대할 때에 이 진실이 없이 하나님을 상대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대단히 노여워하십니다. 섭섭하게 여기십니다.
또, 자기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자기 속으로는 두려움이 하나도 없으면서 두렵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주 자기만 못하게 자기 수단과 자기의 지능에 이르지 못하는 분으로 알고 그분도 속일 수도 있고 또 그분을 놀릴 수도 있고 그분을 또 이렇게 치켜 올려서 한번 아이들 말로 비행기를 태울 수도 있고 또 그분을 공연히 한번 그렇게 좋아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의 그 진실이 없이 상대하는 그것은 다 하나님께서 크게 모욕을 당하는 것으로 그렇게 하나님이 생각하십니다.
2.2. 마음, 목숨, 힘, 뜻 다하라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 하는 것은 그 몇 가지를 말한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그 종류의 전부를 다 대표해 가지고서 그 몇 가지를 예를 들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많든지 적든지 당신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주신 분이니까 그분이 주신 것을 알고 또 지금도 관리하고 계시니까 관리하는 것을 알고 우리의 존재를 환하게 전부 다 알지 못하심이 없이 완전히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계시는데, 자기의 있는 것을 다 가지고 그분을 상대할 때에 ‘너는 내게 대해서 그 이상 감사할라 해야 그 이상 네가 감사할 자질이 없고 네가 또 두려워할라 해야 두려워 할 자질이 없고 또 충성 할래야 충성할 자질이 없고, 또 이렇게 순종 할래야 순종할 더 이상 자질이 없다. 너는 다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알아서 자기 나름대로는 자기를 다해 가지고서 자기 나름대로는 거짓이 없는 진실된 대우를 그 하나님을 대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하는 그 말씀은 하나님께 대해서 자기가 알 수 있는 데까지 자기가 진실 되게 다해서 알고 또 자기가 안 데까지 자기의 전부를 다해 가지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는 그 사람은 자꾸만 전진되고 향상되고 개량돼서 나아갈 것을 가리켜 말씀했습니다.
또, 이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겼는데 다섯 달란트 가진 사람은 장사하니까 다섯 달란트를 남겨 가지고 열 달란트를 만들었지만 두 달란트 가진 사람은 받기를 두 달란트밖에 안 받았기 때문에 남겨봤자 네 달란트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네 달란트밖에 안 되는데 다섯 달란트 가진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만 해도 다섯 달란트가 되고 이 사람은 남긴 것과 자본과 다 합해서 네 달란트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주인이 그에게 맡기기를 두 달란트 맡겼기 때문에 있는 것을 다 활용해 가지고 만들었지만 두 달란트밖에는 못 만들었고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하나도 안 만들어도 다섯 달란트가 되니까 만들어서 장사해서 네 달란트 만든 사람보다 오히려 자기는 아무것도 힘 안 써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는 오히려 네 달란트 가진 사람을 멸시하고 자기는 하나도 힘쓰지 안했지만 다섯 달란트를 가졌으니까 자기는 오히려 교만하고 그렇게 우월감을 가지고 탁월감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기에 대해서 심사할 때에 다섯 달란트로 열 달란트 만든 사람이나 두 달란트로 네 달란트 만든 사람이나 꼭 같은 칭찬을 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렇게 꼭 같은 그 말했고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마 25:23) 이렇게 대우가 꼭 같았습니다. 그 대접이 꼭 같았습니다. 그 같은 것은 하나는 열 달란트 가졌고 하나는 네 달란트 가졌는데 어떻게 대접이 같은가? 그것은 하나님이 준 것을 다한 것에 근거를 두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자기가 어떤 목회를 한다든지 무슨 평신도의 신앙생활을 하든지 그 사람의 신앙생활의 결과를 보고 따집니다. 결과를 보고 ‘저 사람은 목회를 해서 지금 교인이 몇 천 명이다. 또 저거는 몇백 명이다. 또 몇십 명이다. 저거는 죽자껏 한다고 해 봤자 교인 찍해야 한 사오 명에 지나지 못한 그런 교인을 데리고 있다.’ 그 결과를 보고서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실 때에 그 결과를 보지 안하시고 그 근본을 보십니다. 달란트 맡긴 비유에 심판한 것을 보면 결과를 본다고 하면 열 달란트 가져 왔고 네 달란트 가져 왔으니까 그 사람은 이 사람의 한 배나 대우를 해야 될 터인데 대우가 꼭 같습니다. 왜? 결과는 다르나 근본은 꼭 같습니다. 근본은 같은 것은 받은 대로 다 활용했습니다. 받은 자본이 그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시발, 동기 그것을 가지고 따지고 결과를 가지고 따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적게 줬으니까 적게 준 대로 그대로 충성을 몇 분지 일을 했느냐? 적게 준 대로 다 했느냐? 많이 준 대로 다 했느냐? 많이 받아 가지고서 반 한 사람이, 반을 바쳐 충성한 사람이나 또 적게 받아 가지고서 반을 바쳐 충성한 사람이나 꼭 같은 대우해도 근본이 그렇기 때문에 적게 받아도 다한 사람과 많이 받아도 다하지 안한 사람은 그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가 성공을 했나 안 했나 칭찬을 받을 수 있나 없나 하는 것은 무엇을 가지고서 판단해야 되느냐 하면 결과를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결과로 판단 안 하고 내가 죽도록 충성하라 했으니까 죽도록 충성했나 안 했나 거게서 판단을 해야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에 판단을 바로 한 것이 되지 자기에게 있는 자본이 어떻다는 것 그것은 생각지 아니하고 만들어 놓은 그 결과만 보고서 판단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판단에 대해서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했나 혹 몇 십프로만 했나 백프로를 다했나 그것을 가지고서 판단하는 것이 그것이 진실된 판단이고 나머지기는 껍데기만 보고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를 할 때에 그저 이 하나님께 감사하라더라! 이래 가지고서 그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속에 느낌이 없는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요 또 자기가 알지 못한 감사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 수 있는 대로 알고 또 자기가 깨달아 느낄 수 있는 대로 느껴서 그 진실 되게 자기가 감사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대우하는 것으로 당신이 받지 그렇게 외식적으로 해서 하는 것은 하나님을 놀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놀려주는 것이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요 또 아주 하나님을 꾀우고 속이고 달래고 하는 이 아주 하나님 앞에 대해서 범성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신데 그분에게 대해서 아주 범성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입을 함부로 벌리지 말라,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는 그것이 곧 자기가 성장되고 또 향상되고 점점 개량되어서 좋게 되는 것이라. 자기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 자꾸 그것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잘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개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 물론 신령한 은혜와 이 세상적 은혜가 다른데 그 세상적 은혜는 보면 많이 받은 사람들이 다 그 진실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결과를 보고서 평가하고 동기를 가지고 평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는 것입니다.
이래서, 성경에 부자가 불행스럽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부자는 오히려 너희들을 멸시하고 다 하나님을 멸시해 버리지 않느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고보서에 ‘멸시해 버리지 안했느냐’ 또 ‘부자가 천국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마 19:14)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기에, 하나님은 제일 외식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일곱 번이나 ‘화있을진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전부 외식을 말한 것입니다. 외식을 한 말로 말하면 자기로서 할 수 있는 것을 남겨 두고 하는 것이 다 외식입니다. 알 수 있는 것을 남겨 두고 하는 것이 다 외식입니다. 그러기에 아는 대로 다하고 또 자기가 느끼는 대로 다하고 가진 대로 다하고 이렇게 다하는 것을 하나님이 받으시지 다해서 대접할 분이시지 남겨놓고 찌꺼기로써 대접할 분이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꼭 진실면만 가지고 우리에게 대해서 가치로 삼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큰 데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데 불의한 자는 큰 데도 불의하다. 그러면 지극히 작은 데 불의한 자는 큰 데도 불의하다 그 말은 그 불의적으로, 잘못된 것, 그 사람이 삐뚤어져 나가면 삐뚤어져 나가는 것도 지극히 작은 삐뚤어짐이 이제 지극히 큰 어디까지이든지 삐뚤어지는 걸로 나가고 만다. 또 옳은 것도 지극히 옳은 것이 어디까지이든지 옳은 걸로 나간다. 그러면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해서 옳은 걸로 나갈라 하면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어디까지 큰 데까지라도 다 나가게 된다, 지극히 큰 데까지 가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외식을 하면 외식하는 그게 삐뚤어져 나가는 것인데 외식은 자기 아는 대로 안 하는 것이 외식이요 있는 대로 안 하는 것이 외식이요 자기에게 속과 겉이 다른 것이 외식인 것입니다. 이래서 삐뚤어지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이든지 삐뚤어지게 나간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했는데,
2.3. 깨닫는 만큼 감사하라
여호와께 감사하라 감사하는 이것을, 감사하는 것도 그냥 그저 ‘감사합니다’ 자꾸 감사하라 이랬으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그것이 아무 뜻 없이 자기가 참 느낌 없이 자기가 지식함이 없이 그렇게 감사하는 그것은 자꾸 그 악습이라. 마귀란 놈이 자꾸 그래 습관을 들여서 악습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꾸 자라 가지고 결국에는 사망이 되고야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감사하려면 자기가 조그만큼이라도 깨닫고 느끼고 ‘아, 이것 참 감사하다. 이거 감사하다.’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백원, 천원, 만원, 천 만원, 만일 일억 감사를 했으면 일억 감사한 것을 자기가 느끼고 그만한 가치를 자기가 참 알고 느끼고 이렇게 감사하면 그것도 하나님이 진실한 당신을 대접하는 것으로서 받지만, 또 천 원 하는 이것도 자기는 그것밖에는 깨닫지 못했고 알지 못했으니까 솔직하게 진실되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 천 원보다는 낫다, 천 원 가치는 있다. 이럴 때에 천 원 가치만큼 감사를 하면 그것도 하나님이 받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없는 것을 자기는 없으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도 그것도 거짓부리, 적은 것을 많이 감사하는 것도 거짓부리, 많은 것을 적게 감사하는 것도 거짓부리, 꼭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가 그것을 깨닫고 알고 인정하고 그 가치를 깨닫고 자기를 그만큼 하나님께서 가치 있는 것을 주셨다는 그것을 실상을 알고 실상대로 자기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그 감사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3. 영원히 감사하라
그러면, 그 감사를 원하는데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는 그 말은 네가 감사하면 하나님이 인자를 영원히 베풀어 주신다 하는 그 말이 아니고, 진실되게 감사하는 그 은혜가 그것으로써 끝난 게 아니고 그것이 시간적으로도 영원이요 점점 커지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영원이니까 무한이요, 또 그것은 공간적으로도 무한이요, 그것은 또 본질적으로도 무한이요, 또 본성적으로도 무한이요, 가치적으로도 무한이요, 또 그외에 그 모든 자체의 형체적으로도 무한이라. 그 무한한 것이 각양의 무한한 은혜에 그 싹이 우리에게 와 있는 것이라. 무한한 그 은혜의 싹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치적으로나 권위적으로나 또 그것이 나에게 필요적으로나 효과적으로나 무한하다. 무한함이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천 가지 만 가지 억만 가지 그렇게 무한이라면 종류 수가 그 무한한 것이 내게 다 연결돼 가지고 있습니다. 접선돼 가지고 있습니다. 접선돼 가지고 있는 무한한 것을 다 내가 점령해서 내 것을 만드는 그 비결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 여기에 시편 136편에 말씀인 것입니다.
그 비결은 이제 그것을 네가 감사하라 말은 그것을 네가 알아라. 네가 바로 알아라. 바로 알고 보니까 이것이 자기에게 이 가치가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것을 나에게 주셨다. 그러니까 가치 있는 것을 은혜로 주셨으니까 감사하다. 이것을 또 사용해 보니까 자기에게 효력이 어느 정도 있습니다. 또 효력이 있습니다. 또 효력을 보고 또 연구해 보니까 자꾸 또 효력이 나옵니다. 이렇게 해서 감사에 감사 생활을 평생 계속하여 하나님의 각양의 은혜를 영원토록 누리는 주인공이 되기를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감사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승리하세요.

{참조: 88081270}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11-1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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