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쓰라린 고통

2008.10.24 22:37

윤봉원 조회 수:1140 추천:39

삼하 20:1-132008101533날자:2008년 10월 15일 수밤
제목: 다윗의 쓰라린 고통
본문: 사무엘하 20장 1절 - 13절
1. 고통이 왜 올까?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서 공부도, 일도, 결혼도, 자식 뒷바라지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행복도 하나님께서 주시기도 하지만 고통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고통을 주실까요?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19)
하나님을 버리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상적인 삶을 회복하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2. 다윗이 겪은 고통들
2.1. 세바의 반역
 1,2절 세바는 유다 지파와 이스라엘 지파들이 예루살렘 환궁 문제로 서로 갈등을 빚고 있는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내전을 일으켰습니다. 지파 간의 분란을 이용해 왕권을 쟁취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할 때 사탄은 항상 분쟁을 야기하고 갈등을 증폭시킵니다. 나는 공동체의 분열을 꾀하고 있지 는 않습니까? 공동체가 하나 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합니까?
2.2. 결혼 제도에 있어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거역의 혹독한 대가 지불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결과들은 그 범한 자에게 이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다윗은 그의 성읍과 궁전으로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이중적인 범죄로 인하여 자신이 어려움에 직면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부다처제는 결흔 제도에 관한 하나님의 의도를 침해한 것이다.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삼상 1:2)
엘가나는 두 아내를 거느렸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을 위한 배우자로서 한 아내만을 창조하심으로써 일부다처제나 중혼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셨다. 우리 주님께서도 바리새인들에게 이혼법을 설명하시면서 그 문제에 대하여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마 19:5). 사도의 가르침도 그  율법을 되풀이 하고 있다.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 7:2).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 5:33)
이 결혼 제도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위배한 것은 악한 사람들에게서 기원하였다. 라멕은 두 아내를 취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창 4:19). 그리고 그의 말들은 그가 살인자였음을 말해 준다. 최초의 살인자의 후손인 그는 동일한 살인의 길을 걸었다. 셋의 아들들은 그의 본보기로를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인류를 재설립했다는 영예를 얻었다. 노아와 그의 세 아들들은 각각 한 아내를 데리고 방주로 들어갔다(창 7:13). 그러나 라멕의 죄는 점점 더 보편화되어 관습이 되었으며 그보다 더 훌륭한 많은 사람들도 물듦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속되게 더럽혔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엘가나는 선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이러한 점에서 살인자가 걸은 최초의 금지된 길을 따라갔다.
어두움 속에서 일하는 광부는 그가 일하고 있는 검은 공기에 의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검게 된다. 그 자신이 감지할 수도 없이 작은 검은 입자들이 하나 둘 그의 몸과 의복에 달라붙는다. 결국 그는 그 주변에 있는 모든 검은 것과 더러움에 동화된다. 사회의 관습은 무의식적으로 인간들의 성품과 습관에 색을 입힌다. 그들의 양심 그 자체는 그들이 호흡하는 도덕적 분위기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생각과 행위에 의해서 채색되게 되며, 종종 사악한 관습과 죄에 동조하게 된다. 그들은 도덕적 어두움 가운데서 살기 때문에 그 죄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부다처나 중혼을 행하였던 족장들의 죄가 바로 그러한 것이었고, 또한 엘가나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특히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왕들의 경우 부분적으로 정치적 요인에 의해서 많은 첩들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않음을 사무엘하 20장 3절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삼하 20:3)
이것은 다윗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 축첩제도의 관습은 다윗의 이상에서 멀리 떠나 있는 것이었으며, 이교민족들의 관습에 가까운 것이었고, 어떤 경우에든 여자들에게는 곤경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윗의 큰 범죄는 그의 후궁의 여인들에게 일반적으로 그러한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차려지는 형벌보다 훨씬 큰 형벌을 부과하였다. 그들은 동양의 여인들로서 그들이 압살롬에 의해서 욕을 당한 것은 우리 시대 우리 민족의 여인들이 그와같은 상황에서 욕을 당한 것보다는 덜 민감한 것이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인들이었고, 따라서 그들이 고유한 성적 본능이나 욕망을 완전히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합당한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윗의 범행의 결과들은 그들에게 대단히 무겁게 부과되었으며, 생의 마지막까지 그것을 감수해야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어떤 사람도 독자적으로 살 수 없다는 확실성은 금지된 길로 가서는 안된다는 강렬한 동기가 되어야만 한다.
2.3. 요압의 아마사 살인 목격
다윗이 타락한 후에 그 고통의 잔에 있어서 가장 쓰라린 요소들 가운데 하나는 그의 주변에 있는 자들이 그의 악행은 너무도 충실하게 모방한 것을 보는 일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내릴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었을 것이다. 암논은 그의 간음을 그대로 모방하였고 압살롬은 그의 살인의 행위를 모방하였으나, 그 자신이 결백하였다면 내릴 수 있는 형벌을 다윗은 내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치명적인 죄의 씨앗으로부터 마지막 수확을 거둬들이게 되기를 내심 희망하고 있을 무렵에 그는 그의 행위가 요압에 의해서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재현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지도자는 그에게 장애가 되는 자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제거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주의력이 부족한 그의 신복이 동일한 행동노선에서 머뭇거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실제로 요압은 앞서 그 길을 알고 있었다(3:27). 그러나 그는 다윗이 동일한 길로 갔기 때문에 더욱 대담하였다.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아브넬의 피에 대해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때 요압에게 비겁하게 범죄를 하도록 명령하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하면서 아마사의 죽음에 관하여 침묵한다. 이때에 그의 입을 봉해놓은 것은 확실히 이러한 피흘림에서 느꼈던 죄의식이었을 것이며, 이로 인하여 그는 그 이후로 요압이 사용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조치들을 침묵으로 묵인할 수밖에 없게 되며, 그의 아들이 악한 일을 행하는 것도 내버려 둘 수밖에 없게 된다.
다윗은 세바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이제까지 자신을 위해 일해 온 요압 대신 압살롬의 편에 섰던 아마사를 기용했습니다. 이는 한 나라의 위기 상황을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대처한 감정적 처사였으며, 또한 아마사가 유다군을 지휘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행한 비현실적인 명령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인사 조치로 또 다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7-13). 요압은 아마사가 다윗의 신임을 받자 질투하여 그를 죽였습니다. 전국이 세바의 난으로 어지러운 상황에서 정적 제거라는 개인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한 악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사는 길은 쓰라린 고통의 열매를 가져 온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전에 자기 생각을 따라 삶으로 자타의 구원의 손해를 끼치는 삶을 살지 맙시다.
{참조. 매일성경 전집 2권, p. 207; 베이커 성경주석 사무엘상하, pp. 40-41)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10-24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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