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일어나는 기도

2011.03.04 20:24

윤봉원 조회 수:925 추천:80

요 15:5-82011031453날자: 2011년 3월 4일 금밤
제목: 역사가 일어나는 기도
본문: 요한복음 15장 5절 -8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1.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 그러나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우리
우리 인생은 어릴 때는 자신도 부모도 주변 사람들도 앞으로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거의 동일한 고백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없다.”라는 결론이 아닌가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살도 하고, 술과 마약, 그리고 또 다른 다양한 방법들로 자신의 아픔과 고독을 달래고자 노력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목회도 그런 것 같다. 처음 출발할 때는 자신이 엄청난 위대한 목회자가 될 것으로 짐작하여 열심히 하다가 가면 갈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점점 겸곤해 지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면 말해 보라.
그렇다면 우리 인생은 자포자기하고 살아야 하는가? 오늘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에게 붙은 포도나무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안에 붙어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아도 많은 열매(결과물)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인간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원인을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인간이 주님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런 사람은 잘라 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예루살렘을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마 23:37-38)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엄청난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고,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참제자로 성화 성장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오늘밤에는 이렇게 우리가 기도하는데 있어서 참된 기도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 성경적인 참된 기도를 함으로 우리의 기도에 많은 역사를 체험하고 누리는 주인공이 되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2.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기도하라
우리는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기도하는가? 아니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지? 하고 막연하게 기도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야 듣든지 말든지 실컨 내뱉기만하고 속이 시원하다고 하는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기도를 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이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은 참된 기도라고 말할 수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對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실제적인 기도가 가능하므로, 체험이 없는 기도는 기도다운 기도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찬양도 도움이 된다. 이때 찬양은 신앙 체험을 요구하는 찬양보다는 하나님을 직접 높일 수 있는 찬양이 좋다고 생각한다.
또한, 마음으로부터 찬양해야 한다.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찬양이 자신의 신앙고백이 될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찬양해야 한다. 마음으로부터 찬양하면 잡념이 없어지고, 사단도 더 이상 넘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찬양속에 임재하시는 주님이 자신을 나타내어 주신다. 그럴 때 주님과의 기도, 즉 대화가 이루어진다.
어떤 사람은 좀처럼 주님에게 마음을 집중시킬 수가 없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화(聖畵)를 보고 주님에게 마음을 집중시키려고 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이런 방법은 잡념이 솟아나와 좀처럼 주님에게 마음을 집중시키기가 어렵다고 본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잡념을 막는 방법들을 고안해 내었다.
로마 가톨릭에서도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상(像)을 보며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향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행동을 올바르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모세가 받은 십계명에 보면,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숭배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향할 수는 없다. 성화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상(像)은 누군가 사람이 만든 것이다. 물론 그것에는 만든 사람의 신앙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우상처럼 받드는 것을 분명히 금하셨다.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실까?’라는 의문에 대해 하나님깨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계시(啓示)하셨다. 성경 외의 다른 방법에 의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잘 읽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마음에 그리며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 더불어 찬양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어 주신다. 그분은 성경에서 계시하고 있는 분과 절대 다르지 않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시 62:1)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기도가 시작되면 즉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처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좀처럼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 가기가 힘들며 시간이 걸린다.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경건의 연습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기도는 무언가를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훈련을 계속해 나감으로써 주림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하다.
주님과의 대화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한 만큼 참된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멋진 일이며 우리가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닌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482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라고 작시자는 찬송했다. 이 찬송가의 작사가는 즐거운 기도 시간, 그것은 "하나님과의 참된 교계의 때"라고 노래하였다. 참으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쁨과 행복을 풍성하게 누려본 경험이 있는 자의 시이다.
하나님과의 참된 교계를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사람은 그것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이러한 맛을 잘 알지 못하여서 신앙생활이 무력해진다. 참 기쁨과 평안이 없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의 능력과 기쁨의 원천은 주 안에 있기 때문이다. 쉽게 신앙생활을 포기하거나,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은 즐거운 기도 시간을 참으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볼 수 있다. 그 참된 즐거움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보았다면, 신앙이 흔들리거나 냉정하게 사랑 없는 태도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된다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각자의 신앙생활은 자연히 변화되게 마련이다. 방관자적 입장에 서서 사람을 평가한다거나 사람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언제나 남의 일에 간섭하며, 형제자매들의 일을 남의 일처럼 등한시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주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변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가 변화된 그리스도인이었다면, 결코 그러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진정 주님과의 교제를 하게 된다면, 주님의 살다 가신 그 생애를 모방하고 싶어질 것이다. 또 주님의 삶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주님이 그렇게 하도록 도와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입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시인해도 주님과의 참된 교제가 없으면 자연인의 성질 그대로의 삶의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포도나무요 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밀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5, 7~8).
 이처럼 주님과의 교제로부터 나오는 기도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서 가장 기초적(基礎的)인 것이다. 주님과 견고하게 연결되는 것은 구체적인 기도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참된 기도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매일 기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된 기도가 아니면 일방적(一方的)인 기도에 불과한 것이다. 같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기쁨과 생명이 넘치는 생애를 보내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거듭나지 못했다면 새 생명을 얻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생명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참된 기도를 드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거듭나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도 매일 생명의 원천이 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지 않는다면 성장할 수 없다. 생명이 약동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생명이 약동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매일 하나님과의 교제인 참된 기도 시간을 갖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 생명이 활동할 수 있는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입으로는 시인하지만,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나, 혹은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생명의 주님과 살아 있는 교제, 즉 참된 기도를 함으로써 생명이 약동하는 신앙생활로 변화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3. 기도의 역사(능력)
3.1. 자신의 변화 역사가 일어난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엡 1:19-20)
형식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도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기회 있는 대로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다. 식사 전에 감사 기도를 드리며, 각종 예배 때에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을 맺다.
그러나 그 정도의 기도 생활로 그치는 사람은 빈약한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렇듯 빈약한 신앙생활에 만족해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다.
성경에는 기도가 상황을 변화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성서 시대에만 있었고, 현대에는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무력한 신앙생활에 만족해하고 있는 듯하다.
기도는 큰 능력을 일으킨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기도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하지만, 믿음의 기도를 통해 그 능력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 이어질 때 하나님은 놀라운 능력을 우리에게 내려 주신다.
뿐만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우리 자신에게 부여해 주신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믿음의 기도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에베소 교회 신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다.
‘그의 침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성도는 빈약한 신앙생활을 하며 그것에 만족하며 삽니다. 신앙은 액세서리가 아니다. 신앙은 우리가 매일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힘이다.
우리들의 생활에는 매일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당황하거나, 고민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이나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해결하려고 할 때, 자기 입장(立場)에서 이로운 쪽으로만 해결하고자 하는 이기주의적 생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자신의 생각대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그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최선의 길을 아실 뿐 아니라 그대로 이루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응답의 때는 우리들의 때와는 같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기적인 생각을 훨씬 초월해서 멋진 해결을 주신다.
주님은 지상 생활 최후의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다. 그때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마태는 주님이 ‘고민하고 슬퍼하사’(마 26:37) 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주님이 직접 그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도 기록하고 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8)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이나 마태의 기록을 미루어 볼 때, 십자가 상에서의 대속의 죽음은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셔야 했다. 따라서 죄의 형벌이 어느 정도로 두려운 것인가를 잘 알고 계셨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었던 자들이기 때문에 그 두려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민감한 영성을 갖고 모든 것을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슬퍼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첫 기도에서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라고 기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마음은 변해 갔다. 두 번째의 기도에서는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42)라는 변화를 보여 주셨다.
세 번째 기도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더욱더 진보된 모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인자가 아버지를 따라가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를 끝마쳤을 때 주님의 태도는 기도하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 오셨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26:45-46).
 이렇듯 기도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진정으로 이루어진다면 변해 가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님이 변하셨던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은 옛사람과 마귀, 죄, 성질, 욕심으로 충만했던 사람이 새사람과 성령충만, 말씀 충만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우리도 경험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증인들을 찾을 수 있다. 만약 그 사람이 기도했음에도 변화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3.2. 주변 사람과 환경의 변화 역사가 일어난다(행 16장)
기도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기도는 분명하게 기도하는 본인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주위 사람이나 환경도 변화시킨다. 그 예를 사도 바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드로아로 내려갔다. 그러나 환상을 본 후에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 마게도냐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로 향했다. 가서 전도하자 처음으로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았다.
그 후 접신하는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자 그 여종의 주인들로 말미암아 관원들에게 끌려가 상관들에게 옷을 찢기고, 벗기우고 매를 맞은 뒤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바울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대낮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마게도냐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해서 전했고 또한, 복음의 열매도 충분히 맺지 못했는데, 매를 맞은 뒤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에 갇혀 버렸던 것이다. 손에는 쇠고랑, 발에는 착고가 채워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매를 맞아 상처의 고통 역시 심했다.
그러나 이렇듯 절망뿐인 상황 속에서 바울 일행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기도했다. 이 사건에 대하여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최악(最惡)의 상황(狀況)에서도 기도할 수 있었던 바울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에게 있어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간이었다.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는 길이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바울은 하나님께 도움과 능력을 기대하였다.
그때 갑자기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것은 자연 현상에 불과한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만약 자연 현상으로서의 지진이었다면 옥중에 쇠사슬과 착고에 채워져 있던 죄수들은 감옥과 함께 무너져 압사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일어난 지진은 옥터를 움직였다.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지게 되었다. 자연적인 지진과는 전혀 성질이 달랐다. 이때의 지진은 바울과 그 일행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러한 역사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 대지진의 결과로 말미암아 간수의 변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당황한 사람은 죄수들이 아니라 간수였다. 옥문이 열려 있고 쇠사슬이 풀려 있는 것을 알아차린 간수는 죄수들이 모두 도망쳤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래서 검을 빼어 자결하려고 했다. 로마의 법률에 의하면 죄수가 도망쳤을 경우, 간수는 사형에 처해 졌기 때문이다.
그때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여기 있노라."(행 16:28)라고 외쳤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에서 떨며 부복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이렇게 말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헹 16:29) 이렇게 하여 바울과 실라는 그에게 복음을 전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기도 응답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간수와 그 가족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간수와 그 모든 가족은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제야 바울은 자신들이 빌립보성에 와서 참혹한 일을 당하고, 투옥되었던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들의 기도는 상황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로마의 하급관리였던 간수는 그때까지 결코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심을 갖거나 호의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죄수를 상대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격이 거칠었으며 죄수에 대해서는 더 거칠게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도무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로마 하급관리였던 간수와 그 가족이 그들의 기도에 의해서 구원받고 변화되었던 것이다.
누가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행 16:34).
이처럼 기도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기도를 통해 체험할 수 있다.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킨 능력이다(엡 1:19-20).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능력, 즉 어떤 문제라도 해결해 주시는 능력을 말한다.
우리는 매일 여러 가지 문제에 당면하여 고민하고 근심한다. 그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 의해 해결하겠다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바로 기도이다.
구체적인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이 해결해 주셨음을 체험한 사람의 믿음은 더욱 강해진다. 커다란 난관에 부딪친다할지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히라 그리차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5:33)라는 말씀을 믿기 때문이고, 그 말씀대로 순종해서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역사하심을 경험한 증거들이 많기 때문이다.
4.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기도함으로 역사의 주인공이 되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누리며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기만 하면 우리를 통해서도 놀랍게 역사하시는 수많은 열매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 증인으로는 예수님, 사도 바울, 수많은 기도의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도 어떤 어려움을 만나서 급하게 기도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평상시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의 참제자가 되기까지 변화되고 내 주변 환경과 사람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기도하기만 하면 우리를 기도에 응답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역사가 풍성하게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기도 응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참제자 되세요.
참조. 오야마 에리지,「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기도하십니까」, pp. 20-38.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3-04 20:4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