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냐? 하나님 뜻이냐?

2011.02.20 20:57

윤봉원 조회 수:749 추천:83

암 7:7-172011022002날자: 2011년 2월 20일 주일오후
제목: 돈이냐? 하나님 뜻이냐?
본문: 아모스 7장 7절 - 17절
1. 우리 삶의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은 돈 때문에 사는 사람, 자식 때문에 사는 사람, 마누라와 남편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 밥 먹고 살기 위해 사는 사람, 정치와 명예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 직장 때문에 사는 사람, 공부 때문에 사는 사람, 자기의 취미와 습관 때문에 사는 사람, 배운 게 도적질이라고 자기가 기존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 때문에 살아가는 사람 등 다양한 삶의 이유와 근거가 있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잠도 제대로 못자고, 사기, 강도, 거짓말을 한다. 몸을 팔기도 한다. 한여름 태양 볕을 참기도 한다. 때로는 부모의 뜻을 거역하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가출하고, 온갖 고생과 고난 두려움을 감수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삶의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성경은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찾아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2. “하나님 뜻대로 되었느냐? 그렇지 않으냐?”
2.1. 다림 줄 심판의 의의(意義)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훼파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암 7:7~9)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쌓아 놓은 담을 다림줄로 검사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다림줄’은 구약성경에서 본문 7,8절과 스가랴 4:10에만 나온다. ‘다림줄’은 ‘측량추’ 또는 ‘주춧돌’로도 번역할 수 있다. 다림줄은 쌓은 담이 제대로 쌓였나 안 쌓였나를 평가할 때 사용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만약 주인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으면 주인이 허물어 버린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도 구별된 삶을 살지 않으면 심판하신다는 심판의 선포이다.
이것은 자기 백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자신의 계획마저 변경하여 오래 참으시던 하나님이 더는 참지 않으시고 그들을 벌하신다. 이스라엘 가운데 다림줄을 두시겠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그들의 삶을 엄격히 측정하셔서 드러나는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경제력과 군사력에 취해서 자만(自慢)하는 이스라엘을 다림줄로 재어 그들이 붕괴 직전의 ‘기울어진 담’임을 폭로하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다림줄로 한 치 오차 없이 화려한 궁궐, 난공불락의 요새, 이방 산당, 여로보암의 집을 세웠지만, 하나님의 다림줄로 측정한 결과는 달랐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다. 절기를 지켜도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절기를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악인의 길에 서서는 안 되지만 ‘여로보암의 길’에서 계속해서 일반인들을 제사장으로 삼았다. 이러한 그들의 노력은 담벼락을 쌓아도 역사의 주관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무너뜨릴 담벼락을 쌓고야 말았던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심판은 예배의 처소와 정치의 장소, 곧 교회와 국가에 함께 임한다. 이 다림줄 심판의 메시지는 세상이 만든 잣대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척도로 내 삶을 판단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삶에 말씀의 다림줄을 드리우시고, 우리가 그 기준에 따라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에게 임했던 심판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기준이 돈, 자식 뒷바라지, 지식이나 경험, 출세와 건강과 같은 세속적 가치가 기준이 되어 있다면 우리는 즉시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우리에게 기준으로 준 성경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떤 수고와 노력을 기울여 어떤 결과물을 낳았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다림줄에 무너져 내릴 담벼락이 되고 말 것이다. 아멘!!
돈이냐? 하나님의 뜻이냐? 를 우리는 모든 현실에서 따져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2. 아마샤의 고발(10-17)
2.2.1. 모함의 고발(10-11)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하고 (암 7:10-11)
본문은 아모스가 본 ‘다림줄 환상’과 ‘여름 과일 광주리 환상’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도발하고 아모스는 그 도발에 응답(반박)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벧엘의 제사장이었던 아마샤는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반 백성은 더할 나위 없을 것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한 것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이 왜 철회될 수 없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샤’는 ‘여호와는 능하시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는 아모스를 왕에게 직접 투서한 것을 보면 영향력 있는 제사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샤는 선지자의 경고를 정치적 전복을 꾀하는 모반이라고 모함한다.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멸망 선언만 부각하고 그 이유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아모스에 대한 아마샤의 보고가 정당하지 않음을 보게 된다. 아모스는 신학적인 메시지를 전달했음에도 아마샤는 아모스의 신학적인 메시지를 정치적인 메시지로 변질시키고 있다.
아모스가 회개를 촉구하고 살 길을 알려준 것(5:4)과 두 번이나 이스라엘의 용서를 간구한 것(7:1-6)에는 침묵한 채,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7:9)는 말을 ‘여로보암은 칼에 죽을 것’이라는 자극적인 말로 바꿔서 분노를 자아냈다.
2.2.2. 부와 명예 때문에!!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 (암 7:12-13)
그렇다면 왜 아마샤가 아모스를 이렇게 모함했을까? 그 근거를 12절 이하에서 찾을 수 있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는 눈에 보이는 왕 여로보암에게 충성하느라 진정한 왕이신 여호와의 뜻을 거 역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아모스가 모반을 죄하여 왕께 반역한다고 고자질하며 예언을 하지 못하게 막았던 것이다. 아마샤는 왕의 신임과 종교권력을 이용하여 아모스의 예언을 중단시키고 유다로 돌아가라고 협박한다. 아모스가 생계와 출세를 위해서 이스라엘까지 와서 예언을 한다고 매도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정치적인 불의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해주고 그 권력에 기생하는 자신의 모습을 투사한 것일 뿐이다.
당시 북 이스라엘은 풍요로웠다. 솔로몬 시대의 부귀와 영화만큼 회복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그럼에도, 아먀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아모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행태(行態)는 정직하지 못한 지도자가 유난히 정직을 강조하는 것과 같다(이집트 대통령 무바라크가 30년 이상 통치하면서 축적한 재산이 700억 달러가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이집트 국민들이 반기를 든 것으로 보도를 통해서 우리는 보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왕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로보암’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샤는 현실적으로 왕권의 비호를 받으며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보다 왕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사단은 어느 시대를 막론(莫論)하고 하나님 명령은 가혹한 것으로 과장하고 불순종이 낳는 형벌은 축소했던 에덴의 뱀처럼(창 3장) 항상 진리를 곡해(曲解)하여 의심(疑心)과 불신(不信)을 조장한다. 이러한 사단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이것은 말씀의 안약(계 3:18)을 바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아마샤를 통해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아마샤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에 있지 않았다. 오늘 우리의 관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무엇에 있지 않은지 돌아보자. 우리도 지금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해 주는 자가 두려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있진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잠깐 살기 위해 영원한 죽음과 실패, 부끄러움을 선택하지 않도록 늘 말씀에 깨어 경계해야 한다. 돈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입을 막으며 “예언하지 말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못된 모습을 회개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순수성을 의심하거나 내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마음은 없는가? 만약 우리도 이러한 범주에 드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아마샤와 같이 심판은 면키 어려운 것이다.
2.3. 아모스처럼 소명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14-15)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14-15)
아모스는 아마샤에게 자신이 예언하게 된 배경에 대해 언급한다. 아모스는 아마샤가 알고 있는 선지자들 같이 전통이나 인간에 의하여 선지자로 세움 받은 자가 아니라 여호와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은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도 아니고 선지자의 생도도 아닌 아모스를 친히 데려다가 이르시고, 예언하라고 하셨다. 아모스는 가축을 키우는 촌사람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그를 붙드시고 예언의 말씀을 주셔서 참선지자가 되게 하셨다.
아모스는 자신의 선지자로서의 자질을 변명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선지자가 아니라 목자이고 농부였지만, 여호와께 부름 받아 말씀을 전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절대 ‘떡’(생계)을 위해 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 세운 제사장인 아마샤와 달리 하나님이 세우셨다. 그러니 예언을 중단할 수 있는 분도 하나님뿐이고, 예언할 말을 바꾸실 분도 하나님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언을 하지 못하게 막는 아마샤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 외에는 다른 것을 고려하지 않는 담대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 할렐루야!!
이러한 아모스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평생을 자기 뜻대로 살지 않으셨다. 말 한마디, 일 하나 할 때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그 뜻대로만 살았다. 이 모습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요 모습이다. 아멘!!
하나님은 벧엘과 같은 국가적인 성소에서 아무리 잘 훈련받은 예언자들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그들을 버리시고, 아모스와 같은 비주류를 부르셔서 일하셨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목회자가 이력 쌓기에 골몰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신 그 소명을 확신하고 말씀의 능력을 믿으며, 가라 하신 곳에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에 충실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한다.
아울러 우리 자신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맡기신 역할을 얼마나 신실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하겠다. 소명 의식은 맡은 역할을 바르게 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가? 이전까지 어떻게 해 왔는가? 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가 가장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3. 하나님의 심판(16-17)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계하지 말라 하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 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암 7:16-17)
이 두 절에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는 너무나 처절하다. 하나님은 자기 귀를 막고 선지자의 입을 막은 채 약속의 땅을 부정하게 만든 아마샤와 이스라엘은 그 땅에서 토해져서 더러운 땅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심판을 선언하셨다. 하나님의 권위로 말씀을 전하는 아모스를 자신의 권위로 대적하여 막아서는 아마샤를 벌하시고, 그의 가문까지 약속의 땅에서 추방하시겠다는 것이다. 아들의 칼의 죽음을 우리는 사울왕의 자녀들의 죽음에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선포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여호와의 말씀일지라도 왜곡하고 무시하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죄를 하나님이 철저히 물으시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는 죄를 지은 죄인에게는 가장 비참하고 비극적인 심판의 메시지이다. 하지만,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산 자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구원의 메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를 영영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암 8:7)
4. 돈 때문에 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만 따라서 살아가라!!
우리는 다림줄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은 어떤 공력도 다 허물어지게 될 것을 분명히 살펴보았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나와 주변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평가가 결론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리석게 돈 때문에 인생의 공력을 낭비하지 않아야 한다.
말씀의 기초위에 진리와 영감대로 곧고 든든한 주님의 나라를 세워가도록 은혜를 구해야 한다.
아마샤를 보면서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아마샤와 같은 처신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아마샤를 닮지 말아야 한다. 아마샤는 아모스의 예언(9절)을 반역죄라고 왜곡시켰고(10-11), 이스라엘 대신 유다에서 예언하여 성공을 추구하고 자신의 안정을 찾으라고 회유하고 협박하는 것을 스스럼없이 저질렀던 것이다(12-13절).
우리는 우리 죄를 경고하는 메시지를 소홀히 듣지 않고 민감하게 말씀을 듣고 속히 회개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며 회개하며 우리도 동일한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모스를 닮아야 한다. 아모스는 평범한 목자요 농부에 불과한 사람이었으나(14절)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에 잘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배경으로 처신했기에 배짱이 있었고 담대하게 물러서지 않고 전했던 것이다. 아마샤처럼 돈과 명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신 소명과 뜻 때문에 살았던 것이다.
우리는 성경 묵상과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다가 아모스처럼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떻게 처신했는가? 아마샤와 같은 담대함이 있었는가?
돈이 삶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그 어떤 관심보다 앞서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기 전에 주님의 부르심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부르신 소명에 따라 살아가는 성경대로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다.
돈이냐? 하나님의 뜻이냐? 아마샤냐? 아모스냐? 우리가 가는 길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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