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한 약속과 견고한 소망

2010.12.21 03:59

윤봉원 조회 수:694 추천:64

히 6:9-202010121902날자: 2010년 12월 19일 주일오후
제목: 견고한 약속과 견고한 소망(찬송 525장)
본문: 히브리서 6장 9절 - 20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1. 작심삼일(作心三日)의 인생은 아닌가?
세상 일이든 신앙 일이든 올바른 것을 잡았을 때는 끝까지 인내하는 인내가 없으면 온전한 자, 장성한자, 탁월하게 실력 있는 자가 될 수 없다. 어느 분야든 그 분야에서 실력 있고 인정을 받는 자들을 보면 인내심이 대단한 자들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존경하고 본받았으면 하는 인물들은 다 인내의 주인공들이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중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매우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그가 베풀어주신 구원의 사랑을 붙들고 인내해서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다섯 교회는 물리적이고 세상적인 환경은 좋았음에도 인내하지 못해서 경고와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4)
그렇다면 2010년을 마감할 시기가 다 다가온 오늘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자. 연초에 작정한 것, 중간에 각오한 것을 얼마나 계속하여 잘 이루어 왔는가? 더욱이 믿음의 진보를 위하여 우리가 얼마만큼 인내하며 달려왔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말이다. 참으로 세상 사람들처럼 작심삼일(作心三日)의 신앙상태는 아니었는가? 이 상태의 삶만 반복한다면 우리는 어린아이의 수준에서 장성한 신앙의 수준으로 도약할 수 없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잘 인내 할 수 있으며, 그 인내한 자들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져 있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다. 그 교훈을 살펴보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우리는 끝까지 인내한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2. 하나님은?
2.1. 아버지의 마음으로 촉구하심(9-10)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히 6:9-10)
히브리서 저자는 5:11-6:8에서 우리가 성숙하지 않으면 건설구원(성화구원)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강력하게 엄한 경고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완전한데 나아가라고 촉구하였다. 그런 다음에 6:9-20에서 그는 성도들이 맺은 의의 열매를 거론하며 긍정적이며 더욱 희망적인 약속이 있다고 위로하고 격려한다. 더 나아가서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하며 믿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미쁘심을 소개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히브리서 저자는 타락한 자들의 최후를 언급함으로써 청중들을 긴장시켰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 6:6~8)
이렇게 저자가 어린아이 신앙에 머물고 장성한 신앙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참혹한 결과를 언급한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할 동기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외부적으로는 거센 박해와 유혹이 있고, 공동체 안에는 이미 예수님을 욕보이고 배도하는 자들이 생겼지만, 성도들은 대부분 믿음을 잘 지켜서 심판보다는 ‘더 좋은 것’, 즉 ‘구원’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성숙과 성장에는 질책과 격려가 모두 필요하다.
지도자는 낙담시키는 심한 질책이나 안일하게 하는 과도한 칭찬을 모두 피하고 균형 있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교훈 받게 된다.
6:6-8에서 저자가 강력한 어조로 경고한 것은 아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금방 누치 챌 수 있다. 그 근거는 ‘사랑하는 자들아!’(9)라고 부르신 것에 찾을 수 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기를 기대하시는 마음을 초지일관(初志一貫)하시다. 따라서 그는 우리를 그 목적대로의 사람 만드시기 위해 자연계시와 특별계시 모두를 동원하셔서 교훈 해 주신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켜 시편 136편에서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고 26번이나 반복해서 고백했다.
그래서 기자는 10절을 시작하면서(우리 개역 성경에는 안 나타나 있음) 헬라어 접속사 ga.r(가르: “이유” 또는 “계속 이어서 설명하는”의 의미)로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형제를 섬김으로 보여준 사랑을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추인 생각과 은밀한 죄들을 분명히 알고 계시지만(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3)
), 우가 그분을 위해 일하는 것과 그의 자녀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도 그냥 소홀히 넘기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17세기 초의 주석가 존 트랩(Joh Trapp)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술 맡은 자는 요셉을 잊을는지 모르고, 요셉은 아버지의 집을 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망각이란 것이 없다. 그분께는 모든 것이 현재이며, 그분 앞에는 모든 것이 낱낱이 기록된 책이 있다’
본문에는 기자가 소중히 평가하고 있는 ‘섬김’이란 과거에 한두 번 있다가 만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끊임없이(‘이제도 섬기는 것을’(10)) 표현되는 것이다. 이 서신서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가르침에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자는 성부 하나님께 대한 생각을 주변적인 일로 돌리지 않는다. 때로 우리는 주 예수께 대해 집중한 나머지 성부 하나님을 잊는 위험에 빠지지 않는가? 돌아봐야 한다.
‘주의 기억력’을 자극하는 것은 주께 받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베풂과 섬김이다. 주께서 나를 기억해내실 만한 열매가 있고, 내 음성을 기억해내실 만큼의 간절한 기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억해주시는 독자 공동체 성도들의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랑이었으며,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 섬김으로 표현된 행함 있는 사랑이었다. 자기만족이나 과시를 위한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름)을 위한 섬김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불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속에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속하여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에 대해 확신을 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에 더욱 가까워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큼 온전한 행위와 사랑을 나타내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내 잘못이 크면서도 사랑으로 채찍질하는 목회자를 못마땅해하는 일은 없는가? 또 칭찬과 격려를 과도하게 받아들여 자기 인정과 과시로 나가지는 않는가? 칭찬에 안주하지 말고 채찍에 낙심하지 말자. 사람의 입술보다 그 말 뒤에 자리하시는 하나님의 관심과 인정이 어떨지 생각하며 우리는 핵심으로 여기고 날마다 자라가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 한다.
2.2. 약속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대하심(11-12)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 6:11-12)
저자는 청중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끝까지 힘쓰기를 원한다. 이에 청중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호소한다. 그것은 청중들이 확신에 찬 소망으로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우리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을 위해,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는 일에 같은 열성을 품고 부지런히 실천해야 할 것을 권면한다. 그 결과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아브라함’ 같은 자들을 본받기를 원한다. 그것이 장차 약속된 것을 상속받는 자들이 마땅히 여기서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이다. 저자가 ‘끝까지’라고 말하는 한계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는 그때이다. 그때까지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지 않는 자를 저자는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히 3:14)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약속의 소망을 확신하는 자답게 지금 결심하고 실천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여태까지 잘 해왔다 할지라도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믿음의 조상처럼(11장) ‘끝까지’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해야 한다. 지금 간직한 부활의 소망은 세상 어떤 성공이나 부, 명예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커져야 하고 풍성해져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죽음과 부활 이후에 영원토록 부요하고 영광스런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3. 반드시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13-18)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3~18)
히브리서 저자는 이 대목에서 법정적인 용어들을 두드러지게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맹세’를 설명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특히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의 맹세를 더욱 확고히 하려고 eiv mh.n(에이 멘)(14절)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서에만 유일하게 나온다. 우리가 보는 개역성경은 ‘반드시’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확실히”, “가장 확실하게”를 의미하며 “확언”, “약속”, “맹세”에 대하여 사용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 의미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용어들은 히브리서 저자가 청중들에게 제시하는 소망의 확실성을 더욱 견고히 한다.
‘하나님의 맹세’라는 주제는 저자가 권면에서 설명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이 이 단락을 앞 단락과 구분 짓게 한다. 그러나 그 흐름이 단절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모범이라는 점에서 12절과 연속성이 있다.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18)이 무엇인지 정확히 지시되지 않았지만 보통 ‘약속’과 ‘맹세’로 본다. Lane,「히브리서 1-8」, p. 451.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시고 ‘맹세’로 보증하셔서 우리로 안위를 누리게 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다시 정리하여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이 맹세하시면서 복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이다. 흔히 맹세는 자기보다 큰 인물을 내세워야 하는데 하나님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이름으로 보증을 서시고 맹세하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를 이처럼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반증이 아닌가?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 맹세를 받을 처지에 있는 사람들인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하나님께서 맹세하시는 것은 전적인 우리에 대한 사랑의 표현과 약속이다. 할렐루야!!
따라서 이러한 맹세의 약속은 우리가 ‘오래 참아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약속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반드시, 확실하게 지키실 줄로 믿읍시다. 오래 참으면서 소망을 간직하고 하나님 약속을 신뢰하여 복을 누린 아브라함이 그 증거이다.
아브라함이 오랜 세월 인내하면서 약속을 바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 맹세 때문이었다. 우리 소망의 근거 또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더 정리해 보면 우리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시고 맹세하신 것에 대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인간의 것과 다르기에 변치 않는 신실함 속에 기필코 성취하시고야 맙니다. 아담 하와에게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을 지키셨다. 노아 홍수를 앞두고는 노아에게 120년 후에 반드시 지키셨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약속도 지키셨다. 앞으로 재림과 부활에 대한 약속도 반드시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다. 이 약속은 변치 않는다고 하나님이 친히 보증하셨다. 그래도 불안합니까? 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은 우리는 큰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 약속을 굳게 붙들고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2.4. 분명한 소망 가운데 살기를 기대하심(19-20)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히 6:19-20)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소망이 되게 하셨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휘장 안에 들어가셔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열어 주셨다. 이 소망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마침내 우리도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살게 된 것이다. 이 소망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더욱 선명하게 말씀해 준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 1:3-4)
오늘도 우리는 우리 앞서 들어가신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평생을 달려가야 한다. 때로는 우리에게 파란만장한 연단과 시련이 닥칠지라도 그 환경으로 말미암아 낙심치 말고 믿음의 여정을 끝까지 항해해야 한다.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 삶, 신앙의 재수생활을 청산하고 장성한 신앙의 단계를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중보하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며, 감사함으로, 찬송함으로, 소망 가운데서 달려가도록 힘써야 한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살아갈 때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신 말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 4:16~18)
이러한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3.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분명한 소망 가운데 약속을 소망하며 인내로 달려가라!!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작심삼일(作心三日)의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처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주인공으로 쓰임 받은 주인공들처럼 우리에게 약속한 신구약 성경의 약속들을 붙들고 주님 불러 가시는 그날까지 인내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아비의 심정으로 경고와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분은 우리의 선행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현재에 당하는 고통과 시련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약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조금도 변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라가서 하나님 나라에 갈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의 주인공이 되도록 믿음의 경주를 게을리하지 말고 부지런히 합시다.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0-12-21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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