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퍅한 마음

2010.12.12 21:49

윤봉원 조회 수:797 추천:65

히 3:7-192010121201날자: 2010년 12월 12일 주일오전
제목: 강퍅한 마음
본문: 히브리서 3장 7절- 19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1. 나는 누구의 말을 가장 잘 듣는가?
우리는 항상 사람들과 접촉하며, 대화하며,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따라서 항상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말을 참조하여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간 우리가 일상생활을 할 때 누구의 말을 가장 잘 듣고 살아가고 있는지 살펴보자. 어떤 사람은 부모의 말씀은 죽어도 순종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친구의 말을 누구의 말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상관의 말을 가장 잘 듣는다. 어떤 사람은 여자의 말을 잘 듣고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의 말을 잘 듣고 살아간다. 이처럼 사람의 말을 듣고 살아가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누구의 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며 듣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노아, 요셉,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바울 같은 사람들은 사람의 말보다는 누구의 말을 더 귀중히 여기며 살아갔습니까? 아무리 오랜 세월이 걸려도, 죽음이 닥쳐 와도, 온갖 핍박이 닥쳐도 그들은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초지일관 순종하며 살아간 위인들이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의 공로로 새로운 피조물 된 우리, 하나님의 종된 우리, 주님의 것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듣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에 걸맞는 정상적인 삶인지 살펴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2. 강퍅한 마음
2.1. 성령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마음(7-11)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히 3:7-11)
히브리서 기자는 3:1-6에서 예수님의 신실함을 언급하면서 ‘견고히 잡을 것’을 촉구하였다. 이번에는 신실치 못한 이스라엘을 언급하며 ‘견고히 잡을 것’을 촉구한다.
이 3:7-11은 저자가 시편 95:7-11을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민수기 13-14장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진다. 윌리암 레인, 「히브리서 1-8장」, p. 349.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은 바란 광야 가데스에 머물렀다. 모세는 그들의 목적지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정탐꾼을 보냈다. 그러나 40일간 그 땅을 탐지한 정탐꾼들은 절망적인 소식을 전한다. 이 소식을 접한 백성은 원망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진노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10번이나 시험한 그들에게 안식의 땅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민 14:22-23).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 강퍅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했다는 말이며, 이것은 마치 마음이 돌과 같이 굳어져서 전혀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일컫는 것이다. 이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에 돌밭이라고 비유했다.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은 그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께 반역했다. ‘격동’으로 번역한 말은 반역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에서 구원한 백성을 안식의 땅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심판하셨다. 4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행사를 보고도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떠나 죄의 길로 갔기 때문이다. 애굽에 내린 열 재앙과 출애굽, 기적적인 물 공급, 만나와 메추라기의 은총을 경험하고, 반역한 자들의 심판을 보았으면서도 완고한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시험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령과 말씀을 통하여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 말씀을 마음과 삶에 적용하여 순종하기를 기대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믿고, 묵상하고, 그 말씀으로 내 삶에 적용하여 내 인격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목사와 같은 지도자들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계속 훈련시켜 나가야 한다. 그래서 성경 묵상이 중요하며, 성경 묵상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오늘’(10: “이 세대”, 13절) 이 말씀을 하나님의 쟁쟁한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는 말을 두 번 거듭 강조했다(7, 15절).
묵상의 삶이 형식적으로 되고 느슨해지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영적 긴장을 회복해가야 한다.
오늘 우리 또한 말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욕심만 추구하느라 바쁘진 않습니까?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결과임을 엄히 기억해야 한다. 순종하는 자가 믿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요즘 우리의 삶을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실 것 같습니까? 정신을 차립시다.
무려 사십년이나 하나님의 행사를 목격(目擊)하고도 그들은 강퍅한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이 없었다. 시험과 반역으로 일관했다. 그들이 우리의 자화상(自畵像)은 아닌가 말이다.
우리 또한 성경의 수많은 사건과 경고를 듣고도 두려움이 없고, 가슴이 울리지 않는 강퍅한 자들은 아닌지 돌아보자. 우리 또한 지금까지 하나님의 기적을 평생 경험(“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다.” “예수 믿는 것이 기적이다.” “보고, 듣고, 말하고, 걷고 움직이는 것이 기적이다.” 등등)하고 살아가면서도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치 않는 강퍅한 주인공은 아닌가 말이다.
성령의 목소리를 듣거든 무시하지 말고 즉시 순종하라! 따지지 말고 즉시 순종하라!!
2.2. 악심을 품고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12-13)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 3:12-13)
히브리서 기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을 거울삼아 오늘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강퍅하여 반역함으로 안식을 얻지 못한 자들처럼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그는 믿지 않는 악심을 품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주의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12절). 여기서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반역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가지 못하고 지옥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태에 이르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맛 잃은 소금으로 비유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문제는 강퍅한 마음, 악심이 문제이다. 그러면 ‘믿지 아니하는 악심(惡心)’을 어떻게 하면 멀리할 수 있을까? 본문은 이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첫째, ‘삼가’(주의)야 한다. 위험을 올바로 염려하는 방법은 경각심을 가지는 것이다. 어떤 형식적인 신자들은 자기들의 영적인 생명을 그냥 내버려둔다. 위험한 바위나 유사(流砂)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않고 사는 것이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다음과 같이 촉구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
둘째, 본문은 정직하게 자신을 조사해 볼 것을 권고한다. ‘피차 권면하라’는 말이 이 말이다.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삶을 주의 깊게 돌아보아야 한다.
셋째, 본문은 자기 성찰 이외에 또 다른 필요한 사항을 제시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기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12절의 ‘그 위험의 실재와 위급성을 주목하게 하는’ 경고를 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13절도 성도간에 피차 권면하여 죄에 빠지지 않도록 권한다(참조. 10:35).
죄는 유혹하기도 하고 속이기도 한다(13절). 그래서, 17세기 초반 루더포드(Samuel Rutherford)는 옥중에서 이렇게 썼다 : ‘죄에 대한 의식이 크면 클수록 짓는 죄는 더 적어진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공동체 안에서 ‘오늘’ 피차 권면하여 죄의 유혹으로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게 하고, 고난과 죽음의 위협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시작할 때 확신했던 부활의 소망을 끝까지 붙잡으라고 촉구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구원과 기업과 소망과 안식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오늘”이라는 이날에 이 말씀으로 격려하여 믿음을 견고케 하도록 도와야 할 지체를 찾아보고 격려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아울러 다른 사람이 나에게 권면할 때에 “됐어요. 그만 하세요. 때가 되면 다시 시작할거예요”라고 말하며 반항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누구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지요? 이것이 바로 광야에서 송장이 된 자들의 걸음을 걷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교역자와 평신도 사이에, 부부 사이에, 셀리더와 셀 식구 사이에, 교사와 학생 사이에 피차 권면해서 죄의 유혹을 물리치는 교회가 되도록 합시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교제가 없는 개인은 권면을 받을 수도 없고 권면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피차 모이기를 폐해서는 안 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4-25)
그러므로 우리는 셀 모임, 성경 묵상 나눔 모임에 열심히 참여해야 한다. 이런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참여 안 하시렵니까?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권면할 때 주의할 점은 막무가내로 잘못을 지적하면 상처받기 쉽고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자신은 완벽한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면 권면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권면할 때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민감하게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권면하여 서로의 구원 유익을 보는 주인공이 되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여야 한다.
2.3.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지키지 않는 불순종(14-19)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14)
히브리서 기자는 3:6에서 언급했던 견고함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견고해야 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과 우리의 관계에서 엄청난 특권을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수 있고, 그리스도는 회사를 경영하듯이 자신의 파트너들이 지시를 수행할 때 구원의 축복에 참예하는 자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내게도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행동이 계속 요구된다는 말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위한 올바른 행동으로 15절(7절을 반복)을 제시하고 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히 3:15)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의뢰하지도 않았고 끝까지 신실하지도 않았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 ‘오늘날’이라는 단어의 반복(3:13절부터)은 이 메시지의 긴급성을 드러낸다. 우리는 오늘 실천해야 한다.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닫지 말고 열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실천할 의지를 구체적으로 적용해서 순종해야 한다. 설교 들을 때도 이 말씀은 그대로 적용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 토요일까지 주일 말씀 듣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마음, 몸, 일들을 잘 정리하고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16절 이하에서 이제 강퍅한 마음을 버리고 순종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누구뇨” “아니냐” “노하셨느뇨” “아니냐” “하셨느뇨” “아니냐”와 같이 여섯 번의 설의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여섯번의 질문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함에도 하지 않았으며, 지극히 상식적인 상식마저 저버렸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과거 하나님을 격노케 했던 자가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이가 아닌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범죄로 그 광야에서 죽임을 당한 이들이 아닌지? 단,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 바로 그 순종치 아니하던 이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므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올 때 10가지 재앙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간 하나님의 전적인 기적의 돌봄을 경험했다.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먹었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양식을 해결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을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았음에도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강퍅케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반역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을 경험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다. 하나님을 향한 노골적인 반역은 파국으로 이끌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불순종은 나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인다!
불순종은 나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한다!
불순종은 나도 불행해지고 다른 사람도 불행해 지게 한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말씀을 들었더라도(2:3-4, 14-16) 믿음으로 화답하기보다는, 완고하고 반역하고 불순종하면,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말씀 앞에 나를 부인하고 순종하는 믿음만이 참 쉼을 얻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결국,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믿음, 순종이다. 순종으로 나타나냐 한다.
순종하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린다!
순종하면 나도 흥하고 다른 사람도 흥해 진다!
순종하면 나도 행복해지고 다른 사람도 행복해 진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의 주의와 당부는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는 말로 요약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서도 견고하지 못했다. 그들의 운명이 그들의 불신을 증명한다(19절). 그와 동일하게 안식의 약속을 받고서도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히 4:1)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대충하거나, 하다가 그만두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가? 성경 묵상, 새벽기도, 성경 읽기, 기도하기, 전도하기, 순종하기를 하다가 조금 어려운 형편이 오면 그만두었던 것은 다 강퍅한 마음의 소유자임을 증명한 것이 아닌가? 우리 또한 저자가 인용한 이스라엘이 그 예의 경우가 아닌가? 이제부터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라고 확정이 되었으면 끝까지 계속하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2장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인내로써 경주를 마쳐야 할 것을 강조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1-2)
3. 강퍅한 마음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끝까지 순종하는 주인공이 되라!!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음성, 성령의 인도보다 사람들의 말을 우선시하고 따랐던 습관과 행동을 버려야 한다. 이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했던 과거를 원통히 여겨야 한다. 이제부터는 이런 강퍅한 마음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야망과 욕심, 습관 때문에 성령의 목소리와 인도를 무시했던 반역을 중단해야 한다. 즉시 회개해야 한다.
우리 자신들이 깨어서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서로 권면하고 권면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서 떨어지는 불쌍한 자들이 필연적으로 되고 만다. 다시는 “됐어요. 그만 하세요. 때가 되면 알아서 잘할 거예요”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시간 이후에 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이 자리에서 나온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자이다.
이제 우리는 강퍅한 마음을 버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령의 음성이다는 것이 확정되면 끝까지 그것을 붙잡고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어떤 난관과 역경이 올 것이 예상된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이 우리를 확실히 도와주실 것을 믿고 순종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다시는 우리 교회에서는 광야에서 송장이 된 자들의 뒤를 따라가는 자가 나오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성도가 강퍅한 마음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와 진리의 인도를 따라서 순종만 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약속의 복을 풍성하게 온전히 누리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소원이요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이다. 주인공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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