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할 일

2010.12.10 11:22

윤봉원 조회 수:717 추천:66

시 63:1-112010120833날자: 2010년 12월 8일 수밤
제목: 광야에서 할 일
본문: 시편 63편 1절 -11절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우리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거하며 내가 주의 날개 밑에 피하리이다 (셀라) 하나님이여 내 서원을 들으시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의 얻을 기업을 내게 주셨나이다 주께서 왕으로 장수케 하사 그 나이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저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 거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저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1. 신앙의 척도는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에 달렸다!
신앙의 건강, 성장, 온전은 하나님을 얼마만큼 성경적인 근거에 의하여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 같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용광로에 들어가는 일을 앞두고도 다리오왕에게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보는가? 홍해 앞을 두고 하나님을 원망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모세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그외에도 성경 인물들이나 지금 현존하는 성도들의 신앙의 건강 척도, 성장의 척도, 온전의 척도는 하나님을 어떻게 얼마만큼 바로 아느냐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부단히 성장해야 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의 중요성을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엡 4:13)
그래야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게 될 것’(24:5)이라는 말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우리가 어떻게 처세해야 할지를 찾아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2. 바윗의 고백
2.1. 하나님을 갈망함
본 시편의 배경은 다윗이 왕궁이 아니라 유대 광야에서 오히려 더 하나님을 깊고 넓게 알았다며 고백하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광야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더욱 풍성하게 되었을까요?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1-2)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광야로 도망 다니며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때 사슴이나 사람, 동물들이 마치 목말라 물을 찾듯 하나님을 갈망했다. 우리가 한 번 짐작해 보자. 다윗이 왕궁에 있을 때에도 과연 이토록 하나님을 찾았을까? 그것은 모르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 아들의 모반을 피해 유대 광야를 헤매며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을 애타게 갈망(渴望)(갈구(渴求))하고 있다. 그는 몸과 마음, 신경과 촉수, 어느 한 곳 예외 없이 하나님을 향해 있었다. 다윗은 신기루가 아닌 자신이 예배 중에 권능과 영광을 맛본 그 하나님을 구(求)하고 있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시 63:3-4)
그가 이렇게 하나님을 갈망하고 앙모한 것은 하나님의 ‘인자(仁慈)’가 생명보다 나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언약에 신실한 그 변치 않는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자신의 권능과 영광으로 자기 백성을 생명을 보호해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 인자의 대표적인 사례를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죽음과 심판에 처한 자들을 살려 주시는 것인 하나님의 인자(仁慈)이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창 19:16)
이 시점에서 우리는 광야에 대해 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광야를 이야기할 때는 넓고 거친 들판, 인적이 없는 황무지, 불모지(不毛地) 사막, 지역에 따라 방목장으로는 사용할 수 있으나 개간하여 농사짓기에 부적합한 크고 넓은 대지를 가리키기도 한다(민 20:5). 또한 이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쓸쓸한 곳이요(렘 2:6), 짐승이 부르짖는 크고 두려운 처소이며(신 1:19; 32:10; 사 13:21; 막 1:13), 약탈자들이 출몰하여 여행자에게 위험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렘 3:2; 액 4:19; 고후 11:26). 이러한 사막을 제대로 경험한 사람들이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이처럼 광야는 인간이 살기에 가장 어렵고 어려운 곳이요, 그곳을 지칭할 때 광야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우리의 현실이 주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이 광야이다. 친구와 가족마저 우리를 곤빕한 환경의 광야로 몰아내도 ‘인자’의 하나님은 거기서도 계속해서 우리를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으로 역사하실 것이다. 아멘!!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풍부함 속에서 주님을 잊고 살 때 이렇게 곧잘 광야로 내모신다. 그리고 거기서 다윗처럼,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을 갈망하게 하신다. 우리가 그 지경에 이르렀던지가 아니고 평안하든지 목마른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가정이나 일터나 어디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참 예배이다.
우리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부를 수 이ㅆ고 만나서 말씀을 들으며 기도할 수 있는 분이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 대한 갈증이 있나를 따져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삶으로 삶의 제사와 예배를 잘 드려야 한다. 이렇게 평상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갈망을 품고 실제로 만난 인격적(人格的)인 경험이 있는 자라야 시련의 밤을 만나거나 지날 때 ‘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2.2. 주의 말씀을 묵상함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시 63:6)
새벽에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매우 복되고 아름답다. 때 묻지 않은 하루의 첫 시간, 그 누구보다도 먼저 주님을 만나고, 그 누구와의 대화보다도 먼저 주님과 교감하며 말씀을 사색하는 일이야 말로 하나님을 보다 깊이 아는 길의 첩경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그날그날의 양식을 거뒀던 것처럼, 다윗이 유대 광야에서 새벽마다 주의 말씀을 묵상했던 것처럼, 우리도 새벽에 일어나 주의 말씀을 듣는 자는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를 것이다. 아멘!!
2.3. 주님을 찬양함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3절),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5절),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7절)
우리나라에는 추석과 설 명절이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왜냐하면, 평상시는 자식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에 가서 돈벌이하느라 부모를 찾아뵙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두 명절 때는 자식들이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가 뵐 수 있고, 그때 부모를 찾아뵐 때 부모는 아마도 그 이상의 기쁨과 보람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손자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재롱을 떨며 노래를 부른다면 더욱 행복해하실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으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하면 가장 기뻐하신다. 다윗은 궁중생활에서도 미처 하지 못했던 찬양을 유대 광야에 나와 마음껏 했다.
다윗은 고난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꺾지 못했다. 힘겨운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좋은 음식으로 배부르듯 다윗의 영혼은 하나님과의 교제로 만족하여 기쁨의 찬송을 올리고 있다.
이처럼 그가 역경 속에서도 찬양이 흘러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줄곧 다윗 자신에게 도움이 되어 오신 하나님께 대한 ‘기억’과 ‘묵상’ 때문이다(참조. 시편 77편). 그래서 다시 시인은 성소에 들어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보호받으며 찬양을 부르리라 다짐했다. 주의 오른손의 권능을 확신하며 주를 가까이 따르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다윗의 찬양이 값진 것은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도 주님을 묵상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 없이 입술로만 하는 찬양과 노래는 진정한 찬양이 아니다. 아무리 찬양 사역을 한다 할지라도 말씀을 묵상하지 않고 하는 찬양은 진정한 찬양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묵상하며 따르는 자를 도와주시고 보호하신다. 그러나 의인을 해하려는 나는 멸하시는 분이시다. 오늘 교회에서 하나님을 우리가 섬길 때 내 힘으로 말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도 ‘묵상’을 통해 역사 속의 하나님과 성경 속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고난이 풍성한 교제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교제가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찬양 속에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체득(體得)되기 때문이다.
2.4. 하나님을 즐거워함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11절)
시편은 대부분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승리라는 이중적인 보응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 왕과 주님께 충성을 바친 사람은 승리를 거둘 것에 대한 확신으로 다윗은 시를 마무리한다. 그 대상은 제의 공동체 전체로 연결하고 있다.
다윗이 유대 광야에서 느낀 하나님에 대한 즐거움은 왕궁에서 누렸던 세상적인 즐거움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정말 세상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감격이고 큰 기쁨이었다. 그의 기쁨은 개인적인 원수들이 그 근본적인 종교적 진리를 거부하는 문제나 여호와 하나님을 그들의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의 운명을 보며 기쁘고 즐거워할 수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왕을 공격하는 대적들의 시도를 실패하게 될 것이고, 대적들의 거짓말하는 입술이 막히는 동안 하나님과 서원하는 사람들과 왕은 기뻐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은 결코 환경이나 조건에 근거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에서든 주님 한 분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고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가 당하는 어떤 광야도, 물 없음의 상황도 다 녹아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사는 삶이 나그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라는 사실도 깨달아 알 일이다.
3. 광야에서 하나님을 갈망하고, 묵상하며, 찬양하고 즐거워하라!!
오늘 우리는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광야에 할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도 주님의 전적인 은혜로 기적적으로 살아온 우리는 광야와 같은 현실에서 할 일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고 그분을 갈망함으로 ‘나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주님과 그의 말씀을 묵상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사활대속의 은혜뿐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심에 대한 기억과 묵상을 통하여 찬양이 흘러넘치도록 힘써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 아울러 형편이 쉽고 평안할 때뿐만 아니라 광야와 같은 절박하며 힘든 상황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어떤 환경도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날은 같이 ‘나의 하나님’의 은혜로 날아가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인공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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