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

2011.04.23 21:11

윤봉원 조회 수:819 추천:73

막 16:1-82011042401날자: 2011년 4월 24일 주일오전
제목: 부활하신 예수님(찬송 155장)
본문: 마가복음 16장 1절 - 8절
1. 예수님의 부활과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나?
오늘은 한국의 모든 교회가 부활절 주일로 지키는 날이다. 매년 우리는 부활절 주일을 지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식적으로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게 진단해 볼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자신들과는 무슨 상관(相關)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감각이나 느낌이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옆집의 아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고 해도 내 자식이나 식구가 사법고시 합격한 것처럼 기뻐하는 사람이 몇이 있겠는가? 다른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내 식구가 교통사고 당한 것처럼 고통과 슬픔이 있겠는가? 다른 사람이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완치 판결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이나 가족이 이러한 판결을 받은 것의 몇 분의 몇 정도를 느끼겠는가? 이러한 상상은 수없이 해보면 해 볼수록 남의 일은 남의 일이고 나의 일은 나의 일이 더 기정사실 아닌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다. 또 예수님의 부활을 성경을 통해서 봐서 알고 설교를 들어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 자신들과는 무슨 상관(相關)이 있느냐? 얼마만큼 상관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가 날 정도로 감격이 있는가? 기쁨과 찬송이 있는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오르는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말이다. 혹시 이런 반응이 있는 분 있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 교훈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고 한다.
2. 예수님의 부활
2.1. 성경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1-4).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막 16:1~4)
마가는 부활 기사로써 복음서를 끝맺는다. 그에게는 부활 사건이 그가 기록해온 다른 여러 사건만큼이나 사실적인 사건이었다. 오늘 우리가 본 본문은 앞 문맥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15:40) 무덤에 갇히시는 것(15:47)을 본 사람들은 여자들이었는데, 이들이 다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으며, 전에 채워지고 닫혔던 무덤이 이제 열리고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이 사건을 기록한 마가(6절) 앞 장까지의 내용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면, 이 장도 비록 유사 이래 가장 크고 믿기 어려운 사건이기는 하지만 역시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아멘!!
십자가의 부활은 복음이 십자가의 부활로 요약될 만큼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의 권세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자유와 구원의 소망을 주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도 기대하지 못한 조용한 아침에 일어났다. 허무하게 무너진 듯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부활로 다시 피었다. 안식일 다음 날 아침 여인들이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고 갔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분이 누우셨던 빈자리만 보았다. 그들은 무서워 아무 말도 못 했다. 마가가 볼 때, 이 마지막 위대한 사건은 그 소식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압도했던 것이다.
이제 이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여인들이 안신후 첫날 예수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고 무덤을 찾았다. 안식 후 첫날의 직역은 ‘주간의 첫날’이다. 이러한 표현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된다(마 28:1; 눅 24:1). 양용의는 이러한 표현이 초대교회에 일반화된 표현일 것으로 생각한다. 참조, 양용의,「마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p.380).
 
이미 죽어 시신으로 누워 있는 스승으로 말미암아 마음은 슬픔으로 짓눌렸겠지만, 위대한 스승에 대한 마지막 존경의 표시로 이렇게 한 것이다. 이러한 여인들의 행위는 그 당시의 풍습을 살펴보면 좀 더 이해가 쉽게 된다.
유대인들의 장사(葬事)는 둘로 구분되었다. 첫 번째 장사는 고인의 집이나 무덤에서 이루어진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시신의 눈을 감기고 몸을 싸매어 기름을 발랐다. 따뜻한 기후 때문에 장사는 대부분 빨리 치러졌고 시신의 부패로 말미암은 냄새를 막기 위해 향료를 사용했다. 시신이 무덤에 안치되면 무덤의 입구는 큰 바위로 봉해졌으며 Evance는 이 돌의 크기를 대략 5-6피트라고 말한다. 참조, Evance,「마가복음 8:27-16:20」, p. 802.
 그 밑에 작은 돌로 괴어 움직이지 않게 했다.
두 번째 장례는 그로부터 12개월이 지난 다음 뼈를 모아 납골당에 안치함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애도의 기간을 12개월로 연장함과 동시에 시신의 부패와 함께 고인의 죄가 사라졌음을 확실히 하기 위하므로 보인다.
여인들이 향품을 미리 사 두었다가 그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면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고 걱정하며 갔다. 여인들이니까 무거운 돌을 옮기는 것으로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가는 여인들이 왜 걱정을 하였는지를 마가가 4절에서 설명해준다. 무엇 때문에 걱정을 했다고요? 돌이 심히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걱정은 괜한 걱정이었다. 왜냐하면, 마가가 4절에서 설명하듯이 여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돌이 벌써 굴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는 누가 이러한 일을 했는지 말해주지 않지만 마태는 이 일을 천사가 행한 것으로 언급한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마 28:2)
여기서 우리가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것은 참 고귀한 마음이지만 온전한 믿음의 마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참 제자는 예수께 인간적인 도리를 다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그분의 부활을 믿고 기쁨과 확신 가운데 앞서 가신 길을 따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 여인은 주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러 무덤을 찾았지만, 예수님이 이미 향유를 바르셨고(14:8) 또 향품을 바를 시신이 이 땅에 없다는 것을 몰랐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자신의 예언대로 이미 부활하셔서 그 무덤에 계시지 않았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 16:10)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호 6:2)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4)
따라서 우리는 이 시간부터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대로 100% 성취되는 말씀으로 확고히 믿어야 한다. 아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8)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이다고 말씀하면 죽는 것으로,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이다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살아나는 것으로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대로 그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을 안겨 주신 대사건이다. 할렐루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0, 22)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이다. 나와 아무런 상관 없는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나와 직접 연관된 대사건이라는 사실이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3~18)
우리는 우리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신 예수님의 부활을 찬양해야 한다. 부활의 아침 우리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예수께서 죽어 계시기나 한 듯이 세상 근심에 절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형편과 사정에 대해서 절대로 절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2.2.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책임지시는 주님(5-7)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막 16:5~7)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무덤으로 들어갔을 때 본 것은 예수의 시신이 아니라 흰옷을 입은 청년이었다. 여인은 이 청년을 보고 놀랐다.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마 28:2)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눅 24:4)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눅 24:23)
예수님은 여인들의 슬픔을 경외의 놀라움으로 바꾸어주셨다. 그들이 찾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대신에 흰옷 입고 우편에 앉은 한 청년을 보았고, 그에게서 주님의 부활소식을 듣고 빈 무덤의 증거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로 베 홑이불을 버리고 달아난 ‘한 청년’ 같던 제자들이(14:51) 다시 이 ‘한 청년’처럼 부활을 전하는 증인으로 회복될 것임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죽음이나 무덤이 더 주님을 붙잡아 놓을 수 없었다. 절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마가는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했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그냥 부활을 전제하고 있다. 이 사건은 조롱을 당하며 처참하게 죽어가던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메시아임을 인정받은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의 순종을 인류를 위한 ‘의’로 인정해주신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의 죽으심까지는 역사적인 사실로 믿으면서도 부활은 신화로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우리의 불신앙을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흩어졌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약속대로 갈릴리에서 기다리시겠다고 하셨다(14:27-28).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랐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셨기에, 그들에게 실망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시고 그들을 끝까지 기다리며 사랑하신 것이다. 배신한 그들을 용서하시고 용납하여 주시는 분이다.
무덤에 있던 천사 청년은 예수가 고난을 받고 죽었지만, 그 죽은 육체가 송장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청년은 예수가 누우셨던 곳이 비어 있음을 여인들에게 확인시켰다. 그리고 여인들에게 청년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만나시기 위해 갈릴리로 가셨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청년이 제자들과 베드로를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짐작컨데 그들이 모두 예수를 배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 14:50)
제자 중에서도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를 모른다고 부인했었다(막 15:66-72).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님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해서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 그런 제자들을 부활 후에 다시 만나 주시는 것은 예언대로 부활한 자신, 역사 이래에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기적의 사건을 보고 그들이 제자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시려고 만나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약속한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다. 주님의 약속은 철저히 아버지의 계획에 맞추신 것이므로 한 치의 오차도 있을 수 없다. 주님께서 부활의 약속을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재림과 영생의 약속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
내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이 오늘 갈릴리에서 만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어떤 현실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곳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사랑해주시고, 도와주시고, 우리를 양육해 주시고, 인도해 주심을 확고히 믿어라!! 할렐루야!!
우리 자신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고, 또 이 자리에서 예배 드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우리에 대한 체휼의 사랑과 은혜이다. 할렐루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20)
2.3.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 심히 놀라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경이로움을 안겼다(8)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막 16:8)
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천사(청년)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기다리신다는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여인들은 무서워 아무 말도 못했다. 오히려 도망했다. 이는 자신들이 빈 무덤에서 엄청난 기적의 결과를 보았으며, 천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계시는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워낙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도중에 누구와 만나 이야기하지도 않고 곧장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은 그 사실을 듣고도 믿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눅 24:11)
이렇듯 부활은 ‘놀라움’과 ‘침묵’이 아니면 표현할 길 없는 인류에게 가장 충격적이고 놀라운 소식이다.
변화산에서 세 제자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횡설수설했다(9:1-6). 부활의 영광을 보고 여인들은 심히 놀라서 입이 닫혔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격이고 경이로움이며 영광이었기에 그 순간은 침묵이 최고의 찬양이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짐작해 보면 평소에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잘 듣고 새겼다가 온전히 믿었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평소에 주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뉴스나, 연속극 시청하듯이 성경과 설교 말씀을 귀 넘어 듣고 지나지는 않나요? 예배당 문밖을 나감과 동시에 다 말씀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고 없어지는 말씀 구경꾼은 아닌가요?
부활은 믿는 자들에게는 가장 큰 소망을 주는 메시지요, 악인들에게는 가장 절망적인 메시지이다. 오늘 부활의 메시지가 내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과 때로는 나타나시는 일 자체에 놀라고 두려워한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계시에 두려워 했고(10:32-34), 그분의 제자들 역시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가르침에는 더욱 그러했다(8:34).
그렇다면 마가는 예수께 부활하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 떨어졌다는 것(8절)을 선언함으로 자기의 복음서를 끝맺는 것은 마가의 관점, 곧 복음서의 흐름에서 볼 때 퍽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메시지를 통하여 마가는 고난을 겪고 있는 그의 독자들을 격려해 주고 있는 셈이다. 즉, 그들이 지금 많은 시련을 당하고 있으나, 그것은 자기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계획과 다스림 안에서 미리 아신 바 되고 허락된 일임을 알리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너무 쉽게 대하는 나머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가질수 밖에 없었던 경외심을 갖지 못하는 일은 없는가 돌아보게 한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실패한다. 한편으로는 실패 전문가들이 아닌가? 좌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위로하시기에 다시 힘을 내야 한다.
3. 부활의 소망 주심에 감사하여 주님의 참제자로 자라가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의 부활이 우리와 별 상관이 없었다면 이것을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주님은 성경대로 십자가에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리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무덤에 더는 계시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을 만나 주신다. 그들을 용서해 주시고 품어주시고 그의 참제자로 세워주시려고 계속 힘쓰시는 주님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대하는 모습임을 보았다. 그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시는 주님을 찬양하게 된다. 또 지금까지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심에 감사와 찬송,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무덤을 찾은 여인들에게는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안겼다.
이번 부활절은 계기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라는 사실!! 지금까지 수없이 주님을 스글프게 했던 우리를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함께 하시면서 만나 주시고 양육하여 주심에 감사하여 매일 매순간 주님의 참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부활을 말이든 침묵이든 행동이든 우리의 모든 것으로 증거 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4-23 22:3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