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어떨까

2011.04.10 21:29

윤봉원 조회 수:1065 추천:82

막 11:12-252011041002

날자: 2011년 4월 10일 주일오후
제목: 나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어떨까?
본문: 마가복음 11장 12절 - 25절
1. 나의 신앙을 성적으로 매긴다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기준 점수가 만약 100점이라면 우리 자신은 몇 점이 된다고 보나요? 물론 우리 각자에게 요구하는 요구의 기준은 다 다릅니다. 마치 부자에게 요구하는 헌금의 양과 과부나 고아에게 요구하는 헌금의 요구량이 다 다르듯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종들에게 대한 주인의 충성도도 달랐던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 요구하시는 주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하고 그에 맞는 순종과 충성을 요구하는 주님의 심정을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이다.
2. 주님의 평가와 요구
2.1.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되지 않은 이스라엘(12-14)
2.1.1. 교훈을 주시기 위해 일으키신 사건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통해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다(11:1-11). 12절 이하에서는 두 개의 행동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과 성전의 운명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찾으신 것은 그가 시장하셨기 때문이라고 기록해 주고 있다(12). 그런데 13절 이하의 내용을 묵상하다 보면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게 된다. 왜냐하면, 잎은 무성했지만, 무화과가 익을 때가 아닌 때에 무화과나무를 찾으시고, 그 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저주하셨기 때문이다.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신 주님이 무화과가 익을 때를 모르시고 나뭇잎만 보고 찾았다가 무화과가 없다고 저주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행동은 구약적 배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다. 예를 들면 이사야는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애굽과 구스의 수치를 예언하였다(사 20:1-6; 참조. 렘 13:1-11; 겔 4:1-15). 예수님의 행동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무화과나무는 구약에서 종종 이스라엘을 상징했다. 특히 무화과나무의 멸절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여주는 예로 등장한다. 따라서 무화과나무에 대한 예수님의 저주는 이스라엘의 운명을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양용의,「마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p. 262.

따라서 예수님께서 무화과 열매를 찾으신 때가 본래 무화과 열매를 맺는 철보다 이른 때에 찾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상징적인 행위를 하신 것을 보여 준다.
2.1.2.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13)이라는 설명은 예수님의 기대에도, 영적으로 준비되지 못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가리킨다(참조. 미 7: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실과를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미 7:1)
). 여기에 사용된 샌드위치 구조를 염두에 둔다면 무화과나무의 운명은 성전에 닥칠 심판을 예견케 한다. 이렇게 본다면 ‘성전청결’이라는 말보다 ‘성전파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양용의, 「마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p. 264.

예수님께서는 자기 때에 원하시는 열매를 요구하신다. 시장하시다고 때가 이르지 않은 무화과나무에게 열매를 요구하시고, 열매가 없다고 저주하여 뿌리째 마르게 하셨다.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막 11:14)
이것은 예수님답지 않은 행동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때가 되었는데도 자기때만 주장하다가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지적하시고, 그들에게 임할 파멸을 선포하신 사건이다. 잎만 무성한 나무는 외적인 제의활동만 활발한 성전의 모습을 반영한다.
이 사건은 너무 가혹한 듯 보이지만, 실은 이 무화과나무가 상징하는(렘 8:12-13; 호 2:11-13; 9:10-17; 암 4:13) 이스라엘(성전)의 타락과 그로 말미암아 닥칠 파괴적인 결과(13:2)를 행동으로 예언하신 사건이다. 성전의 운명도 그와 같을 것이다. 풍요로운 제의 속에서도 메시야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못할 것이다(참조. 눅 19:44).
때가 이르지 못해 열매를 못 맺은 무화과나무는, 벌써 당도하신 메시아에게 합당한 반응을 해야 하는데도 이 새로운 때를 맞이할 영적인 준비를 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뜻한다(미 7:1-6). 그 결과는 너무나 허무하고 비참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우리 또한, 우리 시간, 우리 관심, 우리 계획대로만 살다가 주님의 때를 만나서 열매를 드리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면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무화과는 무엇일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양식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4)
이 말씀을 근거해서 오늘 본문을 해석해 보면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제사생활, 율법 준수는 잘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는 게을리했음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로 보인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도 외형적인 예배 생활, 신앙생활만 성실하게 착실히 잘하면 “나는 예수를 잘 믿고 있다.”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모든 현실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일을 게을리하고 있는데 주님이 찾아오시면 어떻게 되겠는가?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의 결과가 임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마가복음 10:17-22의 부자 청년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이 찾아오시더라도 항상 주님께 양식(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것)을 대접하고 있는 중인가? 점검하며 살아가도록 하라. 그렇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영원토록 후회하는 어리석을 범치 않도록 하시려고 이 말씀을 우리에게 묵상하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듣고 구하고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도 무성한 잎으로 열매를 대신하려는 모습은 있다면 즉시 청산하도록 하라.
2.2. 성전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부패한 성전(15-19)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15-16)
이 사건은 예배의 참본질을 상실한 채 형식만 남은 성전의 그릇됨을 지적하시려고 다시 한 번 선지자들처럼 상징적인 행동을 보이신 것이다.
매매하는 자, 환전상, 비둘기 파는 자들은 먼 길을 온 순례자들이 수월하게 예배하도록 돕는 요긴한 서비스였다. 성전 안(아마 이방인의 뜰)에서의 상행위와 환전은 합법적이었고 성전 경내를 가로질러 다니는 것도 묵인되던 일이었다. 동기는 좋게 출발한 것이다. 그러나 성전을 상인들에게 내어 줌으로 성전 관리들은 부당한 이득을 취했고, 매매하는 상인들은 자신들이 손해 보지 않기 위해 비싼 값에 동물을 팔았다. 결국, 이에 대한 부담은 고스란히 순례객들에게로 돌아갔다.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임에도 이방인의 뜰을 매매장소로 사용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경배드리러 들어오는 것을 방해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 활동들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악행이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성전과 제사를 완성하실 메시아는 영접하지 않고 그림자인 성전 행위에만 몰두하는 일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으며, 그 진정성도 인정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분히 여기신 것은 바로 이점 때문이다. '편리성' 이란 미명아래 각종 부정이 자행되고, 오히려 그 형식이 마음과 영혼을 드린 예배보다 더 중요한 성전의 목적이 되어버린 데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사야 56:7과 예레미야 7:11을 인용하시면서 책망하셨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17)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대상은 1차적으로 성전 책임자들과 상인들일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 7:11의 본래적 문맥은 ‘길과 행위’가 바르지 못한 유다 백성을 향하고 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강도들이 들끓는 소굴이 되었다. 성전이 이미 받은 은혜를 찬양하고 자기를 드려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다짐하는 곳이 아니라 제물을 드려 하나님과 거래하는 곳이 되었고, 죄를 회개하는 곳이 아니라 죄를 쌓고 손쉽게 죄책감을 벗겨주는 곳이 되어버렸다. 이와 비교해 볼 때 우리 공동체는 어떻습니까?
이렇게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시며 성전 척결행위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더욱 그를 배척하기로 작정을 한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막 11:18)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유는 그들이 매매하는 자들과 결탁하여 불의한 이익을 얻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수입이 없어지게 되었으니 그들 나름대로는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바로 잡아 주면 감사하다고 인사는 못할망정 예수님을 어떻게 멸할까(죽일까?) 공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더 불쌍한 것은 무리를 더 무서워하는 비겁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고 인간의 여론을 따르고, 자기중심의 신앙생활 하는 자들의 모습은 꼭 이와 같은 현상을 보인다. 사람들이 무서워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못하는 오합지졸(烏合之卒)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오늘날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혹시 여기에 있는 우리는 이런 종류의 사람은 아닌가 돌아보자.
따라서 우리 교회나 내가 속한 모임은 누구나 부담 없이 하나님께 경배드리러 나올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교회와 관련한 사업으로 개인적인 이익을 채우기에 분주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한다는 우리의 모든 활동이 그분이 기대하시는 내적 열매를 반영하는 외적 표현이 되고 있습니까? 도리어 우리에게 익숙한 그 무성한 활동들 때문에 ‘기도하는 집’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생기지는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메시지를 포함하여 모든 요소가 점점 세련되고 화려해지는 우리의 예배가 진정으로 누구를 향한 것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말씀을 통한 지적을 잘 받아들입니까? 괘씸하게 생각하여 내가 가진 권세로 누르려고 하지 않습니까?
2.3. 믿음의 기도를 권면하심(20-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2~24)
왜 주님은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하신 다음에 기도에 대한 메시지를 말씀하셨을까?
22-25절에 등장하는 믿음, 기도, 용서의 주제는 성전의 운명 또는 성전제도의 종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세우실 새로운 성전에서 필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하신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믿음’ 때문에 예수님도 성전을 향해 담대히 심판을 선포하시고 또 대안적인 성전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실 수 있었다.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라는 말씀은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에 기도의 응답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확신시켜 주시는 말씀이다.
이처럼 제자들도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어떤 장애물도 이기고 만민이 기도하는 주님의 집으로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성전에서 드린 기도는 믿음의 기도로 대체되고, 성전에서 동물의 희생으로 구하던 사죄는 타인을 용서함으로써 이뤄진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 같다. 한편, 솔로몬의 기도에서 나오는 성전은 ‘기도와 사죄의 장소’이다(참조. 왕상 8:22-53).
그러니까 이 기도에 대한 권면은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같고 부패한 성전, 파괴될 성전과 같은 희망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희망과 소망을 심어주는 사랑과 확신의 메시지인 것이다.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우리 자신들을 한 번 돌아보자. 지금까지 신앙생활하면서 “나도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야지.”라고 얼마나 많이 다짐도 하고 노력도 해 보았는가? 그럼에도, 이 목표가 잘 성취되지 않았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나 자신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시면 산이 바다에 던지우는 것처럼 도무지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역사도 일어난다는 믿음을 가지기를 요구하신 말씀으로 보인다.
이 역사를 제일 확실하게 경험한 사람이 다윗과 바울이라고 본다. 다윗 같이 살인죄, 가정 파괴죄를 범한 악한 사람은 이 자리에 없을 것이다. 바울은 어떤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살기 등등한 사람도 신약시대에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변화시켜주신 하나님. 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음의 기도를 할 때 우리도 주님의 참제자로 변화시켜 주시면 반드시 변화 성장되는 역사는 일어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 주변 사람을 우리는 주님의 참 제자 만들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봤는가? 밥도 사주고, 칭찬도 해 보고, 책망도 해 보고, 협박도 해 보고, 애걸복걸도 해 보고, 선물 사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잘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고 포기한 적인 한 두 번이 아니요 한 두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가 그가 주님의 참 제자로 변화 성장되기를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음을 확신시켜 주시는 말씀이다. 할렐루야!!
따라서 우리는 이제부터 나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변화, 성장되지 않는다고 좌절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온전히 신뢰함으로 믿음의 기도를 하여 주님의 참 제자로 세워가는 수입을 보는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다.
2.4. 용서의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심(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막 11:25)
우리 예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다. 이제 동물의 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사죄의 은총을 받는 새 성전 공동체에서는 동물 제사가 아니라 형제를 용서하는 사랑이 사죄에 합당한 반응이라고 하신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형제를 용서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내가 먼저 다른 삶의 허물을 용서해 주기를 요구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서로 용서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 중에는 이스라엘이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 주님은 택한 하나님의 자녀 모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기를 기대하신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엡 4:13~16)
이러한 주님의 뜻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기를 기대하신다. 이러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이웃 지체에 대한 용서가 필연적 요소이다. 용서되지 않으면 화목은 불가능하고 서로 협력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다른 사람 눈 속의 티를 보면 자신의 들보를 보라고 말씀하셨고,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많은 잘못을 하더라도 다 용서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 18:22)
다시 한 번 더 명심하라. 주님은 다른 사람의 모든 잘못을 다 용서해주는 우리가 되기를 요구하신다. 이미 주님의 피로 그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셔서 용서함을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어떤 잘못이라도 온전히 용서해 주고 그를 내 몸같이 사랑함으로 주님의 참 제자도 세워가는 일만 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롬 5: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30-31)
3. 내 생각과 판단을 온전히 버리고 항상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순종하라!!
다시 한 번 더 주님의 나에 대한 평가 점수는 몇 점일까를 중간 중간 점검하며 살아가라. 우리도 주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항상 먼저 구하고 그가 명령하는 일만 함으로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주님의 양식을 대접해 드릴 수 있는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들이 들어서 교회에 오는 가장 불쌍하고 가련한 하나님 사람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삶은 이제 완전히 청산해야 한다. 오직 그들을 내 몸같이 사랑함으로 그들의 구원을 돕는 역할만 잘 감당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시면 나도 다른 사람도 주님의 참제자로 성화되고 자랄 수 있다는 확신의 믿음 기도를 하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생지옥 생활을 하는 어리석고 불쌍한 자가 없어야 한다. 나 자신이 이미 주님의 피로 용서받은 그 은혜를 생각함으로 다른 사람의 어떤 잘못도 다 용서해 주는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하라. 그리하여 주님이 언제 우리를 찾아오시더라고 칭찬과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인공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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