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2012.03.11 21:53

윤봉원 조회 수:637 추천:49

눅 15:11-242012031101날자: 2012년 3월 11일 주일오전
제목: 탕자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본문: 누가복음 15장 11절 - 24절
1.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난 삶의 경험을 되새겨 보라!!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정리해 본다면 예수 믿기 전의 삶, 예수 믿음 이후의 삶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또 예수 믿은 이후의 삶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열심히 살려고  힘썼던 때와 성경을 무시하고 내 노력으로 뭔가를 이뤄보려고 힘썼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두 가지 경우의 때에 우리가 경험한 삶은 어떠했는가를 따져 보자.
예수 믿기 전의 삶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는 누렸을 것이지만 천국의 삶은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면으로는 생지옥이 아니었나? 또 예수 믿은 이후로 성경대로 살려고 힘썼던 때의 삶은 어떠했는가?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면 항상 감사, 기쁨, 소망, 평강, 행복이 넘치는 천국생활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성경을 떠나서 즉 하나님 아버지의 간섭(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싫어서 무시하고 살았을 때의 삶은 한 때는 잘 나가고 행복했는지 몰라도 너무너무 힘들었던 경험을 몇 날 몇 일 이야기해도 다 못할 만큼 사연이 많을 것이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난 불효자, 방탕자의 삶의 모습이 어떠하며, 회개하고 돌아올 때 아버지는 어떻게 그를 대해 주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2. 하나님 아버지는?(탕자를 회복시키고 설득하는 아버지)
이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10:25-37)와 더불어 누가복음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예화적 비유이다. 유난히 길고 풍부한 이야기 소재와 극적인 전개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째, 가장 우선적인 전통적인 것으로 “탕자”의 관점에서 비유를 이해하며, 죄악된 인간에게 그 죄를 촉구하는 것이다. 둘째, 문제아인 아들을 사랑과 인내로 포용하는 아버지의 역할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나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두 번째 해석이 좀 더 본문의 문맥에 적합한 해석이라고 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본문을 살펴보자.
2.1. 그릇된 요구도 들어 주실 때가 있다(11-12).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둘째 아들은 아직 아버지가 죽지 않았음에도 아버지에게 자신이 상속할 몫을 나눠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그 요청을 아버지는 들어 주었다. 어떻게 보면 임종 전에 재산을 나눠 달라는 작은 아들의 요청은 당연히 거절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재산권을 처분하는 것은 마치 아버지를 죽은 자처럼 취급하는 아주 불명예스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것을 허락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했을까? 의문이 생긴다.
그 당시의 상속법은 장남이 3분의 2, 차남은 3분의 1을 상속받게 되었다. 그러나 부친이 돌아가시기 전에 상속을 받을 경우 차남이 9분의 1밖에 받지 못한다고 한다. 부친이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 사용권을 소유하고 관장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 생전에 상속을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란다는 뜻이고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아버지는 재산을 나눠주었다(12). 배반할 자유 없이는 참 사랑도 없음을 알고 계셨기에, 하나님도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가더라도 놔두실 때가 있다. 왜 그랬을까? 상당한 의문이 생긴다. 그 이유는 다음 단락에서 알아보자.
이와같은 하나님의 용인(容認)이 늘 승인(承認)은 아니기에, 스스로 속이지 않도록 성찰하고 점검해야 한다.
여기서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요 뜻인 성경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싫어하여 무시(無視)하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 계획대로 물질과 인간의 여론대로 살아가는 것을 일컫는다.
예를 들면,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것,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뜻 찾는 것에 두지 않고 구별 없이 살아가는 것, 원수를 미워하는 것,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것, 범사에 감사하지 않는 것,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지 않는 것, 전도에 힘쓰지 않는 것, 물질을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물어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 등.
그렇다면 앞에서 열거한 것으로 자신을 비춰 볼 때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바로 누구인 것 같은가? “둘째 아들은 바로 나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온다. “내가 바로 탕자다!!”
☞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간구)할 때에 반드시 그 간구가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나와 인간들의 욕심과 재물 때문인지를 항상 점검하도록 하라.
2.2.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삶의 결말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경험하게 하심(13-19).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13-19)
둘째 아들은 지금까지 받았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뒤로 하고 아버지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자유를 누리고 싶어 그의 몫을 받아서 달아났다. 그러나 그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 자신을 죄의 노예로 끌어 내렸고 돼지보다 못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우리 하나님은 자연만물을 주관하셔서 흉년이 들게도 하시고 풍년이 들게도 하시는 주재자이시다. 이삭에게 은혜를 주니 그해에 백배의 거부가 되도록 하셨다(창 26:13). 또한 애굽에 7년 흉년을 주시기도 하신 분이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을 떠났을 때 흉년을 주니 돼지가 먹는 찌꺼기도 먹을 수 없었다. 그를 도와주고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참으로 맛 잃은 소금이 되니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짓밟히게 된다는 말씀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탕자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함을 나타낸다.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한 생활로 유산을 다 써 버리고 자유마저 잃어버린 노예 신세가 되었다. 지금도 보면 아무리 일하기 싫은 사람이라도 배고파 죽을 지경이 되면 일하러 가는 경우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돈이 있든 없든 그 자체로 낭비하는 재앙 인생이며, 세상의 사랑은 돈이 있을 때만 유효한 조건의 사랑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의 집(“말씀과 영감의 인도”)을 떠난 삶은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거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기어코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까?
우리가 만약 거짓 안전과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떠나 있다면 즉시 돌아서야 한다. 탕자의 거울을 보고도 계속 우긴다면 너무 너무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 또한 탕자처럼 죽음에 이르게 된다.
탕자는 다행히도 그 속에서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과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가진 것을 다 잃었을 때 자기 죄(罪)를 보았고 아버지 집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조건 없는 영접을 경험한(20절) 후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에 빚진자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릇된 요구도 들어준 목적으로 보인다.
우리는 절망적이고 힘든 상황을 통하여 자신의 실상을 깨달아야 한다(18-22). 우리는 자신의 잘못된 것을 아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된다. '일어나는' 행동의 전환, 회개가 있어야 한다. 내 허물을 고백하고 일어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서는 길만이 살 수 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만약 오늘 우리 자신이 탕자처럼 삶의 궁핍함, 고달픔, 좌절, 낙망, 따돌림, 기진맥진의 서글픈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어떻게 헤어 나올 수 있을까요? 아울러 우리 자녀나 가족이 하나님의 곁을 떠나 은밀하게 방탕생활을 즐기고 있다면 그들도 탕자가 걸었던 비참한 결과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회개의 은혜 주시기를 위해 눈물을 강같이 흘려야 한다.
☞ 하나님 떠난 삶은 낭비, 고생, 절망, 죽음의 지름길이다. 회복의 유일한 방법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둘째 아들의 거울을 보고 다시는 하나님아버지를 멀리하지 말라.
2.3. 회개하고 돌아오면 조건 없이 받아 주시고 다시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20-24).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20-24)
탕자는 완전히 몰골이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된 상태로 아버지 집을 향해 걸어가기를 시작했다. 이제는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그의 종이라도 좋으니 오직 밥이라도 먹고 생명만 건져 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품고 힘없이 걸어갔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아버지는 그 아들을 얼마나 기다렸든지 이발도 하지 않았을 것이요, 옷도 거지 중에 상 거지차림일 것이요, 참으로 접근하고 싶지 않은 아들이 멀리서 걸어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무런 따짐이나 서약도 받지 않고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 여기에 있는 우리 아버지들은 탕자와 같은 아들이 돌아오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아버지는 속이 상해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기 전에는 영접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인 아버지라면 탕자가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러한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는 것이 통상적이지만, 20절에 묘사된 아버지의 영접은 도리어 어른으로서의 명예를 실추시킬 만큼 자신의 마음을 아주 쉽게 쏟아 놓는 행동이다. 자신의 위엄을 내동댕이칠 정도로 과도한 즐거움을 표시하는 것은 쉽게 납득(納得)되지 않는 일이다!!!
☞ 일반적으로 부자(품꾼이 많은 것을 보면 매우 부자였던 것으로 추정 됨), 성공한 사람들은 몸매나, 얼굴이나, 옷매무새, 걸음걸이가 위엄이 있다. 그런데 본문의 아버지는 탕자를 발견하고는 이런 것을 다 포기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반응은 죄인을 맞이하는 기쁨의 강도를 증폭시키는 수사법이다. 마치 아흔아홉 마리보다 찾은 한 마리를 더 기뻐하던 목자나, 현재의 아홉 개의 동전보다 잃은 한 개의 동전을 찾았다고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는 여인과 같은 맥락의 행동이다.
유대법상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완전히 상실했던 아들은 예기치 못한 아버지의 후한 행동을 통해 온전한 가족 구성원으로 다시 회복된다. 22절에 언급된 ‘제일 좋은 옷’, ‘가락지’, ‘신발’은 돌아온 아들을 종으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서 명예를 인정한다는 공식 신호이다. 그는 가족의 명예로운 식탁에 흔쾌히 영접되었다. 특히 23절의 ‘살진 송아지’는 통상적인 가정의 일회용 음식이 아니라 마을 전체 혹은 많은 사람들의 초청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음식이다. 따라서 이 식사는 외부적으로도 돌아온 아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삼는 공식적 회복을 선언하는 식사로 보인다.
기쁨이 넘치는 아버지의 식탁은 탕자의 무거운 죄에 대하여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할 모든 빈난자들의 목소리를 차단한다. 어떠한 죄인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더 이상 불안에 떨 필요가 없는 ‘당당한’ 아들이 된다.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부정적이던 작은 아들의 이미지가 밝게 회복된 것이다. 할렐루야!! 바로 우리가 이 주인공이다. 할렐루야!!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는 것은 탕자의 아버지는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용서하고 기뻐 맞으실 뿐 아니라, 그 신분을 자유인(신발)과 아들(반지, 옷)로 완전히 회복시키고 아버지와 교제하게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무한한 사랑을 보여 준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돌아보자. 우리는 주님과 매일 교제하며 그 사랑을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돌아가야 할 아들입니까? 과거를 묻지 않는 아버지, 잘못에 대한 고백, 앞으로의 다짐을 묻지 않으시는 넓고, 무한하고,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자신이 누리고 있음에 무한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치 탕자는 스스로 아들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공적으로 아들로 회복을 받았고, 절대 갚을 수 없는 도에 넘치는 이 허비하는 사랑을 받은 것과 동일하게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死活)대속(代贖)의 공로를 통한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할렐루야!!
 혹시 방탕의 길을 걸었더라도 즉시 회개하고 아버지를 가까이 하라!!
3.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마라!!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무시하지 말고 지켜 행하라!!
탕자를 조검 없이, 다짐을 받지 않고 아들의 자격과 위치를 회복시켜 준 아버지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아버지이시다. 이 탕자의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떠나면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하다. 한 마디로 가난, 외로움, 고통, 절망, 슬픔, 죽음, 짓밟힘이다.
따라서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랑에 빚진 자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아울러 이 사랑의 빚진 자답게 어떤 경우도 그의 품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곧 그의 말씀이요 뜻인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말씀을 붙들고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주님이 불러 가시는 그 순간까지 지켜 행하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의 삶을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해 주시는 천국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의식주와 모든 삶에 필요한 것은 덤으로 더해 주시는 놀라운 역사하심을 누리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이로 말미암아 모든 삶의 결과가 나와 다른 사람의 구원의 유익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기대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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