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2005.01.09 20:40

윤봉원 조회 수:1349 추천:96

고후 12:920050109

날자: 2005년 1월 9일 주일 오전

 

제목: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본문: 고린도후서 12장 9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 고달픈 인생

 

1) 현 상황을 외모로만 보면

 

우리는 지난 해일과 방금 보신 것처럼 북한의 실상이 너무나 어려운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도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인생살이는 고달픕니다. 이는 자명하고도 널리 인정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약 2천 년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을 통해, 고난 중에서 위로와 격려와 견딜 힘을 공급 받았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 바울은 많은 역경에 처했던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의 앞 부분에서 그는 자신이 겪은 환난, 궁핍, 고난, 매 맞음, 갇힘, 소동, 수고로움, 자지 못함, 배고픔 등을 언급했습니다(6:4-5). 그러나 한 가지 특별한 고통 거리가 그에게 더 있어 다른 모든 것보다 더욱 고통과 슬픔을 안겨 주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그것을 자기 육체에 있는 가시, 곧 사단의 사자라고 불렀습니다(12:7).

 

우리는 바울의 육체에 있었던 가시가 무엇이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그것은 그의 선교 사역에 방해물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공격(사탄의 사자)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그 자신이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섬기고 있던 하나님의 허락 하에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바울은 독특한 경험을 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의 첫 부분에서 말한 대로, 그는 “셋째 하늘”로 이끌려 가서 낙원에 이르러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황홀한 경험, 바울만이 했던 이 경험은 그를 아주 교만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무궁하시고 바울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교만의 유혹을 받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의 교만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2. 하나님의 도우심

 

우리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이 말씀이 우리 자신들이 온전히 믿어지고, 온전히 적용 되는 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로 하나님의 자녀 되고, 사활대속의 구원의 은혜를 받고, 지금까지 측량 할 수 없는 은혜, 즉 전적 은혜로 지금도 살아가는 복을 누리고 있음을 누차 말씀 드렸고, 우리는 그렇게 깨닫고 믿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라는 말의 원어적인 의미는 ‘좋은 선물, 좋은 뜻, 호의, 기쁨, 기쁘게 하는 것, 감사'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은혜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도 이와 동일한 의미로 은혜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13절에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말을 넣으면 13절은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말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말은 같은 뜻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 그러하듯이 은혜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은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서 이것에 의해 구원과 기타 모든 축복들이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기본구원에 속한 것으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온전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도성인신과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누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둘째로는 건설구원에 속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승천하시기 전에 보혜사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대로 보혜사  성령과 진리를 통한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3. 육체의 가시를 주신 목적

 

1) 바울과 욥, 요셉

 

바울은 은혜를 필요로 했으나, 또한 그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필요로 했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는 교만의 유혹을 받기 쉬웠으며, 그러한 유혹을 막기 위해 가시가 주어졌습니다. 7절에서 바울은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가시의 필요성을 바울은 주님께서 교만을 막기 위한 것으로 주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요  “죄인 중에 괴수”로 여겼습니다(엡 3:8, 딤전 1:1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여건만 주어지면 교만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지극히 큰 계시를 받은 것은 바로 그러한 여건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약 4:6) 교만은 은혜와 정반대 편에 있습니다. 교만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여 자기의 현재의 모습이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전적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사활대속의 기본 구원의 기초 위에 성령과 진리를 통한 건설구원의 은혜를 은혜로 누리고 있는 것인데 느부갓네살 왕과 같이 자기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된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만큼 성장하고 있지 않는 것을 보고 자신의 영적 성장을 자랑하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이 주일을 온전히 지키지 못할 때에나 기도 생활, 성경 보는 생활, 말씀 순종생활, 조그만한 시험만 와도 쉽게 넘어지는 것, 전도를 잘하지 못하는 것 등을 보면서 ‘왜 저렇게 신앙이 없을까? 왜 저렇게 신앙이 안 자랄까 나는 안그런데??’ 하는 교만한 생각이 들기 쉽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가시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을 바울에게 주실 때 선한 목적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비록 사탄을 통해 주어지긴 했지만 그것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아무 목적도 없는 고통을 자녀들의 삶 가운데 허락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탄도, 어떤 환경도, 때로는 원수 같은 사람들이 나를 너무너무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을 위해 사용되는 경우에만 허락하십니다. 세상 말에는 고진감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보다도 더욱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고통이 헛되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것이 합력하여 우리의 궁극적인 선을 이루게 하시는데, 곧 우리로 그분의 아들을 더 닮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롬 8:28-29). 바울의 가시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본문에 명확히 밝혀져 있습니다.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고린도후서 12'7).

 

우리 삶에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명확하게 알 수 있을 때도 있으나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당하는 고통 중 많은 것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사랑하는 자식 열 아들이 다 죽고, 자기의 많은 재산 즉 양 이천 마리, 약대 삼천 마리, 소 일만 마리, 암나귀 오백이라는 엄청난 재산이 다 없어지고, 업친데 덥친 격으로 자기의 몸에는 온몸에 악창과 종기가 나서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끍고 있었으며, 부인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부인에게까지 버림을 당하는 끔찍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욥은 왜 이런 엄청난 고통이 자기에게 왔는지 분명히 모르고 많은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대개 우리도 그런 경험을 한 두 번 이상을 가지고 있는 줄 압니다.

 

바울은 자신을 치기 위해 가시가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치다”라는 단어가 고린도전서 4장 11절에도 사용되고 있는데, 거기서는 “매 맞다”(개역), “학대를 받다”(새번역)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사탄에게 매를 맞고 학대를 당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고 했습니다.

 

마귀는 잔인하고 사악합니다. 그는 할 수만 있으면 우리를 삼키고자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최대한도로 우리를 때리고 학대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형들이 그를 노예로 팔았던 경우처럼, 마귀는 우리를 해하려고 한 것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선이 되게 하십니다(창세기 50:20).

 

2) 자기의뢰라는 교만을 없애기 위하여!!

 

가시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심히 고통하고 번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다”(고후 12:8)고 했습니다. 비록 그 가시는 늘 존재할지라도 육체적인 고통이든, 감정적인 고통이든, 혹은 둘 다이든, 여느 때보다 더 극심하게 느껴질 때가 아마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세 번에 걸쳐 바울은 그것을 제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가시를 제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쓸 때는 지극히 큰 계시들을 받은 지 14년이 되었을 때였습니다(2절). 그 기간 동안 그는 온갖 역경을 겪었습니다. 왜 그는 자고해 지고자 하는 유혹을 막기 위해 계속 그 가시를 필요로 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가시에 대한 더 큰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그분의 은혜가 족하다는 것을 경험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성령의 도우심이야말로 그에게 필요한 전부라는 것을 배우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힘을 얻기 위해 계속 성령을 의뢰하는 것을 배우기 원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으며”(행 17:28),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멘이 되십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하는 일치고 제대로 된 것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리고 계속적으로 그분을 의지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교만하게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려는 악으로 인하여 전 인류는 범죄와 온갖고통과 사망이 왔던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한 것치고 이와 같은 결과가 임하지 않는 것을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의 필요를 기적적으로 공급해 주신 사건을 성경에 찾아 볼 수 있습니다.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지낸 후 모세는 신명기에서 그들이 경험한 것들을 열거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주 극한 상황에 처했던 것과 온전히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모세가 어떻게 회상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낮추셨다.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주리게 하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알지 못하던 음식을 그들에게 먹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셨다.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낮추셨으며 그들을 먹이시기 전에 주리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의도적으로 그들을 극한 상황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전에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는 음식으로 기적적으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들을 먹이고 계신다는 사실, 그들은 날마다 그분 자신의 공급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확실히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3) 하나님만 의뢰하도록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를 대단한 위기 가운데 처하게도 하십니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까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계속 깨닫고 상기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능력의 가치를 즉시 잊어버립니다.”

 

바울은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족하며,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능력을 주사 가시의 고통, 다른 약한 것들, 능욕, 궁핍, 핍박, 곤란들(10절 ) 가운데서도 그를 붙들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곤경의 와중에 있는 자기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실 때,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바울이 성경에 하나님의 은혜의 충분하심에 대해 처음으로 기록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견딘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19-23)

 

욥은 고난과 절망의 와중에서,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고 인정한 그때에도 여전히 “나의 가는 일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말했습니다.

 

4. 은혜의 충분성

 

우리 자신의 죄악 됨을 보면 볼수록 우리는 은혜가 자격 없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이라는 것을 더 잘 이해하고 더 감사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점점 더 깊게 넓게 높게 발견하게 됩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서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인간적인 연약함이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에서도 “내게 이르시기를,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채우는 그분의 능력은 우리 삶 가운데서 성령의 사역을 통해 나타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어떤 환경이든 경건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해주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족합니다. “족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원어를 보면 디모데전서 6장 8절에 나오는 “족하다”와 동일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우리는 실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므로 만족하게 여길 줄 아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더 많이 주시기도 하나 우리는 필수품들로 만족해야 합니다. 영적 영역에서의 하나님 은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주시며, 때로는 더 주시지만, 결코 덜 주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는 특정한 가시를 제거하는 “사치품”을 좋아하나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 가시를 견딜 수 있는 힘만으로 만족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런 힘을 주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공급하신 방법에서 은혜에 대한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16절-21절을 읽어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세 번이나 각 사람이 “식량대로”거둘 수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을 위해 충분한 양의 만나가 공급되었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만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굶주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충분한 공급이 있었을 뿐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신비한 어떤 방법으로, 그들이 얼마나 거두었는지에 상관 없이 남아돌 정도는 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신 것은 은혜를 내리시는 방법을 예시합니다. 언제나 충분한 은혜를 내려 주시며 아무도 은혜에 굶주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만큼만의 은혜를 내려 주시며, 그것도 그날그날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저장해 두는 것”을 허락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공급을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매시간 새로운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공급되는 충분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다음 찬송가가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언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5.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 것 누려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벧전 5:10)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 마음 것 누리는 자들이 됩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딤후 2:1)고 촉구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어떤 것을 행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디모데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용하고 그 안에서 강해지기를 원했습니다. 디모데는 두려움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같은 서신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7-8)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두려워하는 것이 문제였으며, 바울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용함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함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랬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공급해 주시는 만나를 그날그날 거두어야 했던 것과 같이 우리도 모든 필요에 언제나 충분한 하나님의 은혜를 그날그날 끌어다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이 더모데에게 한 말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또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디모데는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었기 매문에 정 신적인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지금 당장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주 어려운 처지에서 자족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당신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자족하십시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무척 괴로운 상황에서 견디기 위한 인내심입니까?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인내하십시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나님의 은혜는 족합니다. 그것은 당신의 모든 필요를 채우기에 족하며, 어떤 필요가 얼마나 심각한지에 상관없이 충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하나님의 만나의 공급이 바닥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40년 동안 날마다 거두러 갈 수 있도록 언제나 거기에 있었습니다.

 

시편 1편에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는 아무리 가물거나 덥거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날마다 푸르고,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도 이제부터 우리의 주변 환경이 어떠하더라도 그 환경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을 바로 이해하고 내 속에 있는 옛사람의 근원 교만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 한 분만 의뢰하며, 겸손하게 항상 감사하며, 항상 기뻐하며, 기도하기를 쉬지 아니함으로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힘 입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항상 주시는 풍족한 은혜를 마음 것 누리는 복 있는 사람이 됩시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기쁘하시는 삶을 사느냐 못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 외에는 없다고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바울과 같이 우리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거기서 자족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강하게 담대하게 하나님 한 분만 의뢰하고,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나그네 인생동안 계속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풍족합니다!

 

우리 자신의 인격의 그릇을 깨끗하게 크게 만들어 나가는 일에 박차를 계속적으로 가합시다!

 

끊이 없이 주시는 폭포수 같은 은총과 축복을 누리는 주인공이 됩시다!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5-01-09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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