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을 나는 믿는가?

2013.02.10 21:52

윤봉원 조회 수:539 추천:69

시 9:1-2013021002날자: 2013년 2월 10일 주일오후
제목: 하나님의 주권을 나는 믿는가?
본문: 시편 9편 1절 - 20절
1. “내 탓” “네 탓” “조상 탓” 할 때인가?
요즘은 여기저기서 살기 힘들다는 소리가 들린다. 어쩌면 이전의 IMF 시기 때보다 더 살기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다보니 예수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할 것 없이 누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해서 “내 탓” “조상 탓”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잘 못을 하면 실수이고, 다른 사람이 잘못하면 범죄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이러다 보니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온데간데없고 원망과 불평만 있을 뿐이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성경적인 관점을 가지고 돌아보아야 한다. 지금이 과연 “내 탓” “네 탓” “조상 탓” 할 때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할 때인지?
우리가 지난 한 주간을 살면서 감사와 찬송을 많이 했는지? 아니면 원망, 불평, 짜증, 신경질을 더 많이 냈는지를 점검 해 보면 금방 답을 찾을 수 있다. 과연 이런 삶이 옳은 것일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현실에 대해 어떤 평가관을 가져야 할지를 찾아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2. 구원자 하나님께 대한 감사
2.1. 의로운 심판과 구원의 확신으로 온 마음으로 감사 찬송함(1-8)
이 시는 다윗의 시로 그의 생애에서 어떤 사건과 관련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방 나라들의 침략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본 시편은 아마도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에 암몬 자손을 정복한 사건에 대해(삼하 12:26-31)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시로 쓴 것 것으로 보인다.
이 시에는 찬양(1,2,11,14)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와 심판에 대한 확신(4,7-10,12,16-18)과 간구(13-14, 19-20)의 요소가 나타나고 있다.
시인은 지존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원수를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고백한다.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1)은 개인이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적인 일들을 말한다.
그의 원수들이 모두 전쟁에서 패배하여 물러가 망하고(3), 주께서 그의 의로운 송사(4)를 들어 주시고, 이방 나라와 악인을 책망하심으로 전쟁을 통해 그들의 악을 심판하심으로 멸해주실 것에 대한 확신, 그리고 ‘이름을 영원히 지우다’는 것처럼 후대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을 믿음이 있었다. 더 나아가서는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6) 즉 ‘뿌리째 뽑’아서 다시 세울 수 없도록 완전히 멸망시켜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억울한 송사를 변호해 주시고(4), 대적들을 이기게 해 주신(3-6)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면서 온 마음으로 감사를 드렸다. 더 나아가서는 이런 주의 행사를 전하고 찬송하겠다고 했다.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7-8)
하나님은 언제나 공의로 판단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심판은 일시적이거나 임기웅변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의인은 항상 그의 판단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얼마나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공의와 공평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마음속까지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심판에는 거짓이나 편벽됨이 있을 수 없다. 옳고 그름을 바르게 판단하시며, 강한 자든 약한 자든 누구의 편들어 주지 않으신다. 아울러 하나님은 빈부귀천, 유, 무식에 관계없이 공평하게 대하신다. 공의와 공평의 심판으로 악한 자들에게는 멸망을, 의로운 자들에게는 생명을 주신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 온갖 원수, 방해, 대적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각종 기도를 얼마나 많이 들어주셨는가? 심지어는 신음소리로 아뢰기만 해도 들어 주신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번에 주현이가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을 입학하게 되었다. 학교가 결정이 된 것(기숙사 신청 기회를 놓쳐서 기숙사에 못 들어가게 되어 많은 생각과 고민이 있었다. 그러나 선배 목사님을 통해서 방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이나, 숙소가 결정이 된 것이나, 등록금 문제는 Zero로 만들어 주신 것 등 하나하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집 환경을 다 미리 아시고 대책을 세워 주셔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신 것이 무한 감사하다. 다 하나님이 하셨다. 그러면 우리 가정만 그런가? 이 자리에 있는 우리 각 가정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들을 손꼽아 헤아려 보라.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할렐루야!!
그럼에도 짜증과 불쾌감을 드러냈다면 우리에게 온갖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이제부터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들을 바로 직시(直視)하고 감사, 찬송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아멘!!
하나님을 향한 믿음(1, 2, 19, 20)이 있으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의 찬양이 나온다. 시인이 전심으로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원수들에게서 자신을 지키시고 마침내는 승리케 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함으로 감사 찬송하는 우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2. 여호와는 압제 당하는 자의 요새(9-12)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찌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아니하시도다’(9-12)
‘주의 이름을 아는 자’(10)라는 것은 단순한 지적(知的)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며 신뢰(信賴)하고 의지(依支)하는 것을 말한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라. 그들은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왕이 와서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용광로 속에 집어 넣어 죽인다고 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왕이여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여호와를 맛보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주를 찾는다’는 것은 주를 사모(思慕)하며 주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알고 주를 의지하고 찾는 자를 버리지 않으신다. 할렐루야!! 아울러 사람들에게는 차별받고 착취를 당하며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어떤 세력에도 함락당하지 않는 산성이 되신다.
우리의 삶에서 요즘 주님을 잘 의지하고 있습니까? 주님 안에 있다고 하면서도 불안과 초조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어렵고 힘든 일이 혹시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평안을 빼앗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럴수록 온 마음과 힘 다해 기도하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산성이 되어 주심을 분명히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멘. 우리에게 약속을 하셨으니 반드시 지켜 주실 것입니다. 믿읍시다.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찌어다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아니하시도다’(10-12)
하나님은 택함 받은 그의 백성 모두가 풍성한 생명을 얻어 함께 상생하도록 하려고 공의와 정의라는 질서를 세우셨다. 그러나 세상은 악한 자들에 의해 공의와 정의가 깨어지고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이 압제를 당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는 일어설 수 없고 그 압제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특별히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의 가치에 동조하여 불의한 부와 권력을 동경하지 않고 하나님처럼 그들에게서 소외된 자들의 친구와 요새가 되어 주신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 찬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2.3. 열방의 심판에 대한 소망과 확신(13-20),
시인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간청한다(13-14).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하나님(그가 하시는 일)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아는 가난한 자가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을 기억하시며, 그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신다(12,18). 이런 하나님께 다윗은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하였다(13).
‘딸 시온의 문’(14)은 ‘사망의 문’(13)과 대조되는 것으로 구원과 생명의 건짐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셔서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교만한 나라와 백성은 하나님의 판결 앞에서 멸망당하지만, ‘주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16절의 ‘힉가욘’은 묵상이라는 뜻이다. 시를 읽을 때 잠시 멈추고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 표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시인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묵상하며 돌아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알리기 위해 심판을 행하신다(16).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힘을 의지하여 살며, 남에게 함정을 파는 자들은 결국 음부에 빠뜨리신다(17). 악인들은 힘이 될 만한 것을 찾아 분주히 움직이지만 그들의 최종 종착지는 무덤으로 심판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에 조용히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의인들은 하나님의 보좌가 그들의 종착지로 인도하실 것이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인생이 스스로 승리하는 것을 방치하지 않는다. 아울러 그는 인간의 교만과 자랑을 깨뜨려 버리신다. 어떤 자라도 인생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내 힘으로,,,“라는 생각을 철저히 버리게 하신다. 그는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원하심을 계시하신다. 아울러 그는 창조와 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인간의 교만함을 꺾어 겸손하게 하는 심판을 통해서도 자신을 분명히 알리신다. 이 사실을 확고히 믿은 시인은 온전히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할렐루야!!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내 힘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자신 만만해 하지 않습니까? 이런 교만이 우리 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고 있는가? 이것을 우리는 완전히 버려야 한다. 하나님만이 생사화복과 흥망성쇠의 주권자이심을 진실되게 고백하라!!
3. 어떤 환경에서도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며 담대히 나가라!!
우리의 나그네 인생, 신앙의 길도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마귀는 우리를 쉬지 않고 넘어뜨리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있다. 이런 우리에게는 이 두 길이 놓여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공평한 재판장임을 믿고 더욱 담대하게 살아가는 길이다. 둘째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분을 경외하거나 의지하지 않고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악을 저지르는 악한 길이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은 인간은 환경에 소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환경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또한, 이런 무리 중에서 예외는 아니다. 환경에 따라서 울고 웃고 소망과 좌절 낙망을 왔다 갔다 하며 살아가는 중에 있다. 이런 우리를 상대하여 주님께서는 모든 환경을 보시고 공의롭게 판단하신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온전히 감사해야 한다. 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자신을 의지하고 믿고 따르는 자가 당하는 핍박을 그냥 넘어가시지 않고 교통 정리해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고 감사와 소망을 가지게 된다. 아울러 전적 하나님 한 분만 어떤 상황에서도 의지하며 믿고 따르게 해 준다.
따라서 어떤 환경에서도 사람 눈치 보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며 담대히 살아갈 수 있는 소망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아울러 꼭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우리도 다윗처럼 우리를 변호해 주시고, 대적들을 이기게 해 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 찬송이 끊어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또한, 그의 이런 아름다운 역사를 전하며 살아가는 천국생활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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