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속성

2013.02.03 15:52

윤봉원 조회 수:613 추천:65

눅 18:1-913020301날자: 2013년 2월 3일 주일오전
제목: 기도의 속성
본문:누가복음 18장 1절∼8절
1. 내가 가진 기도에 대한 관점은 성경적인가?
올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에 목표를 날마다 부흥하는 교회로 정해 주셨다. 그 실천 목표로 첫 번째가 무엇이지요? 지속적인 기도를 통하여서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또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도 나름대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기도와 그 제목들, 그리고 기도행위가 성경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성경적이지 못한 기도관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 것 같다.
문제는 성경적인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3)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하더라도 열심히 기도하는 것이나, 계속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기도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기도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므로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성경적인지를 깨달아서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2. 비유의 핵심
2.1. 과부의 열심이 불의한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였다.
1-5절까지는 비유를, 6-8절까지는 비유의 말씀이 있다. 1-5절까지에는 아주 냉정하고 또 강퍅하고 불의해서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그런 강퍅한 재판관이 있다. 또 한 사람은 자녀도 없고 가족도 없고 재산도 없고 건강도 없는 아주 가련한 과부 하나가 있었다. 성경에 과부라고 말한 것은 남편 없는 것만을 말하는 것 아니다. 경제적인 능력과 사회적인 능력이 없어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아주 가련한 사람을 말한다. 그 과부가 재판관에게 가서 내 원수가 나에게 이렇게 못할 일을 하고 있으니 이 원수의 원한을 갚아 달라고 그렇게 늘 가서 졸랐다.
이러니까 그 재판관이 얼마 동안은 듣지 아니하고 있다가 나중에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과부가 이거 말하는 것은 들을 것도 볼 것도 없지만 늘 와서 괴롭게 하니 내가 귀찮아서 못 견뎌서 아무래도 이 원한을 갚아 줘야 하겠다 하는 그 비유이다.
아주 불의한 재판관이요 불량한 재판관이요 무자비한 재판관이요 강퍅한 재판관이다. 아주 뚝뚝해서 동정이 하나도 없는 그런 아주 불의한 재판관에게 아주 인간으로서는 가장 힘없고 가련하고 천하디 천한 그런 과부가 지금 호소한다.
이 재판관은 아주 불의하고 악하고 강퍅하고 무자비한 재판관이요 또 호소하는 이 여인은 인간 중에 가장 천하고 아주 형편없는 그런 아주 무능하고 천한 인간이다. 사람 중에 제일 무능하고 천한 사람이, 제일 불량하고 강퍅하고 불의한 자에게 지금 간청한다.
그랬는데 이 재판관이 듣지 않다가 나중에 들어줄 때에는 왜 들어줬느냐 하면 늘 와서 이렇게 괴롭히니 괴로와서 들어줬다. 아주 괴로와서 들어줬다.
그러면 이렇게 계속해서 이 재판관에게 늘 와서 호소하니까 아주 뚝뚝하고 그 불의하고 무자비한 악한 재판관이요 또 이 사람은 인간 중에 가장 천대받는, 재판관에게 뭐 조금이라도 마음을 움직일 만한 그런 요소가 하나 없는 그런 아주 천한 사람이다. 천한 사람이요 아주 불의한 강퍅한 재판관이지만 계속 와서 부르짖는 그 열심이, 그 재판관에게 자기의 소원을 이루어 주도록 했다. 요것을 처음에 비유로 말했다.
아주 사람으로서 가장 멸시 천대받는 그런 아무런 힘없는 그런 가련한 그런 아주 천대받는, 인간 중에 제일 천대받는 사람이 아주 강퍅한 사람에게 이렇게 간청을 하니까 그 일이 될 리가 없다.
그 일이 될 리가 없지만 하도 심히 계속해서 이렇게 와서 호소하니까 나중에는 동정이 돼서 들어준 것도 아니고 그 여인이 이렇게 하는데 안 들어주면 무슨 사고라도 있을 것이라서 두려워서 들어준 것도 아니고 못 견뎌서 들어주고 귀찮아서 들어줬다 하는 것을 여기에 말씀했다.
2.2. 비교해 봐라
2.2.1.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과 불의한 재판관과의 관계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6) 밤낮 와서 괴롭히니 내가 이것 못 견뎌서 어서 원한을 갚아 줘야 하겠다 하고서 갚아 줬다. 이 재판관의 말을 들으라.
그리고 7절에 “하물며” 하는 말 있다. 7절에 “하물며” 위에 이 두 상대방, 호소하는 자와 호소를 듣는 자 그 둘의 그 관계에 이 두 관계에 아주 그는 뭐 될 희망이 없는 이런 두 관계에도 밤낮 와서 부르짖으니까 밤낮 늘 와서 계속해서 부르짖는 이 호소가 힘이 이렇게 있었다.
아주 불의한 그 재판관이요 또 인간 중에 제일 천대받는, 사람으로도 여기지 안 하고 아주 천대받는 그런 인간인데도, 그런 인간이 소원하는 그 소원이 이 강퍅하고 불의한 자에게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이것은 참 천부당 만부당이라더니만 얼토당토 안 하고 이것은 도무지 이 일은 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밤낮 와서 부르짖는 이 열심이, 계속 부르짖는 이 부르짖음이 아주 이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졌다. 그 일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거리가 멀고 도무지 될 만한 그 이치가, 될 만한 그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될 만한 그런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이지만 열심히 늘 와서 부르짖는 이 열심히 부르짖는 이것이 들어서 이 일을 성공을 시키고 말았다는 것을 5절까지 비유로 여기 말해 놓고 6절에 또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 재판관의 말을 들으라”
이랬는데 “하물며” 이런 거리 멀고 이렇게 얼토당토 안한 이런 일에도 그 열심이 들어서 해결을 지웠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독생자도 애끼지 아니하고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형벌에서 구출하시기 위해서 대신 형벌 받아 죽기까지 하신 이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모든 우리가 행하지 못한 것을 대신행해서 죽기까지 해서 행하신 이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우리를 화친해서 행복되게 살도록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하셔서 이 화친의 이 역사를 이루신 “이런 하나님께서” 하는 말씀이다. 그러면 법관과 이 하나님과 비교를 해 봐라. 불의한 법관과 이 하나님과 비교를 해 보라.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이 택하신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택하신 자들은, 하나님이 영원 전 택했고 이 택한 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택한 자들을 복되도록 하려고 하나님이 친히 사람되어 오시기까지, 또 하나님이 죽기까지, 또다시 인간으로 인간을 입고 부활하시기까지 이렇게 하신, 이렇게 큰 공을 들인, 이렇게 큰 공을 들여 놓은 “택함을 입은 자들이”
무슨 공을 들였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사람되시기까지 하셨다. 죽기까지 하시고 부활까지 하셨고 영원히 창조주가 피조물을 입고 이렇게 천하게 영원히 살기까지 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부활하셨다.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2.2.2. 법관과 과부, 하나님과 구속받은 성도와의 관계.
그러면 이 불의한 법관과 과부와 그 관계와 하나님과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구속받은 성도들과의 그 관계를 비교해 봐라 그말이다. 비교해 봐라. 불의한 아주 무자비한 악한 법관과 아주 멸시 천대받는 천한 이 과부와의 그 관계에도 열심히 부르짖는 것이 기어코라도 달성을 시키고야 말았다. 열심히 부르짖는 것은 이렇게 힘이 있다. 이런데 하물며 하나님과 택하신 자들의 그 관계가 어떠하냐?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이 피조물 되기까지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하시고, 영원히 또 피조물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창조주가 피조물의 천한 형상을 영원히 입고 부활하시기까지 하신 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택한 자들의 구원과 그 행복을 위해서 당신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기울여 구원하신 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택한 자들을 아끼시고 사랑해서 어쩌든지 구원하고 행복되게 하려고 하시는 이 하나님께서 이런 사랑과 이런 은혜를 입고 있는 택한 자들이 밤낮 부르짖는데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것을 말씀한다.
이 택한 자들이 밤낮 부르짖을 때 이 부르짖음이 어떻게 되겠느냐? 불의한 법관과 과부 사이에도 쉬지 않는 계속 부르짖는 이것이 이렇게 능력이 있어서 억지로 해 주기 싫고 귀찮고 안 들으려고 이와같이 지금 강퍅을 부린 데도 이 열심히 부르짖는 것은 이 일을 달성하고야 말았다. 하물며 하나님과 택한 자들 사이에 열심히 부르짖는 이 부르짖는 이 호소는 그 호소의 능력이 어떻겠느냐 하는 것을 우리에게 비유로 가르쳐서 말씀해 주신 것이다.
2.3. 그러나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보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오랫동안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너희들이 답답해 하는 일을 풀어 주시리라. 너희들이 어려워하고 있는 일을 다 해결해 주시리라. 너희들에게 지금 그 기막히는 어려운 일, 낭파되는 일, 곤란스러운 일, 너희들에게 지금 불행스러운 일, 고통스러운 일 그런 것을 다 해결해 주시리라 말씀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에 말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가까울수록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세상에서 이렇게 하나님과 택한 자들의 이 사이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 기도는, 이것은 한 마디도 빠짐이 없이 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계시고 들어주시기로 약속하셨고 이렇게 듣기를 원하시고 또 들어서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이 하나님이신데 이 불의한 재판관과 이 과부와 그 사이를 보라. 그 사이에도 열심히 쉬지 않는 호소가 이렇게 능력 있어 해결했거든 하물며 못 견디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온갖 이 구속받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받기로 약속하고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성도들이 호소할 때에 얼마나 그것이 속히 이루어지고 빨리 해결이 되겠느냐?
그러나 내가 올 때에 세상에서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을 내가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탄식했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우리가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을, 불의한 법관과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도 아낌이 없이 주시고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전체를 움직이시는 이 하나님 아버지와 불의한 법관과 한 번 비교를 해 봅시다. 불의한 법관과 아버지와 얼마나 다릅니까? 또 그 과부와 대형 대행 대화친의 대속을 입은 우리 성도들과 비교할 때에 얼마나 다릅니까?
뭐 하늘과 땅 같은 그런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차이가 있는데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 사이에도 쉬지 않고 열심히 부르짖는 그 호소가 이렇게 능력이 있어서 목적 달성을 했거든 하물며 성도와 하나님 아버지 그 사이에 쉬지 않는 그 호소하는 기도라면 그 기도의 힘이 얼마나 있으며 그 기도가 얼마나 달성되고 속히 달성이 되겠느냐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의 재림 때가 가까워지면 점점 믿는 사람은 많지만 정말로 믿는 사람은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보겠느냐” 아주 희귀한 것을 말한다. 믿는 사람은 많지만 정말로 믿는 사람은 희귀하게 된다.
이래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했다. 노아 때에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러나 껍데기는 하나님 믿는 것 같고 하나님 말씀 순종하는 거 같지만 알맹이는 순종하지를 안해. 순종하는 사람은 노아의 여덟 식구밖에는 없었다.
다 하나님 믿는다고 해도 그저 유전으로, 습관이 있어서, 하나의 버릇으로, 하나의 형식으로, 하나의 습성으로 이렇게 하고 있지 정말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약속을 ‘이는 틀림 없다. 이대로 된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이 말씀을 요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사람은 내가 보겠느냐 말씀했다.
3. 기도의 속성을 바로 이해하고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가장 복 있는 사람이 되라!!
이 세상에는 마귀의 세상이라 죄악만 가득히 차고 있으니까 우리가 정직하게 깨끗하게 살라 하니까 살 도리가 없지, 또 이렇게 깨끗하게 살라 하니 악한 세상이 같이 죄짓고 이 세상 풍속대로 인간 생각대로 살도록 하려고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많지, 또 우리가 몸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지,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지, 사건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지, 이 어려움이 많은데 이 어려움을 우리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 어려움을 자기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는 사람은 다 헛일하고 말았다.
불택자들은 해결하려고 해도 해결을 못 한다. 그러나 택함 받은 우리는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우리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 이렇게 “무엇이든지 너희들에게 기쁜 일이 있거든 찬송하고 어려운 일이 있거든 기도해라” 하나님이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고, 구하는 자마다 얻는다고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택한 자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냐?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이시요 주고 싶어서 못 견디시는 하나님이요 또 우리는 얼마든지 달라고 하면 받을 수 있는 우리들이다. 이런 관계인데 우리들이 그 어려운 과부와 법관 사이도 열심이 해결했는데, “너희들이 이 열심을 품고 계속해서 이렇게 무엇이든지, 악한 것 죄되는 것 이런 것은 안 되지만 죄되지 않는 것은 뭐이든지 너희들이 이렇게 쉬지 않고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다 속히 들어주실 터인데 이 사실을 믿고 기도하는 자를 내가 보겠느냐?” 주님이 재림하실 때가 가까와 올수록 이렇게 믿는 자가 없다. 전부 외식자요. 껍데기로 외식만 하지 참 믿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들은 말할 것 없이 소망이 없는 사람이요 하나님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면 믿는 사람 중에 누가 제일 부자입니까? 믿는 사람 중에 누가 제일 실력 있는 사람입니까? 믿는 사람 중에 누가 제일 행복스러운 사람입니까? 믿는 사람 중에 누가 제일 구비한 사람입니까? 믿는 사람 가운데에 제일 영육이 행복되고 금생 내세가 전부가 행복되어서 존귀한 사람이 누굽니까? 제일 존귀하고, 행복스럽고, 모든 것이 풍부하고, 풍성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자기에게는 뭐 여게가 좀 근지럽다 하는 그런 것도 없이 전부가 다 온전하고 깨끗해서 행복스러울 사람이 누굽니까? 이 사람이 누굽니까? 이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이 사람이 이 과부의 호소와 같은 이 호소를 가진 자이다.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에 대한 비유를 주님이 하신 이 비유를 듣고 ‘하나님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불의한 법관과 과부와의 그 사이를 비교하면 천 배 만 배도 더 된다. 천 배 만 배도 더 존귀하다. 이러니까 내가 이 과부와 같이 계속 내 소원을 호소한다면, 과부의 성공한 천 배 만 배도 더 성공하고 더 소원을 달성할 수 있다. 또 말씀하시기를 오래 참으시겠느냐 속히 갚아 주시리라 이래 말씀했으니 주님이 속히 갚아 주실 것이다.’ 하고 이 사실을 믿고 요렇게 호소하는 요 사람이 기독자로서 제일 구비하고 행복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런 희망을 우리에게 주심을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이런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으로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렇게 참 하나님의 독생자가 피흘려 구속해서 이렇게 대속하셔서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놨는데 우리가 믿기만 하면 되는데 안 믿는 것이 문제이다. 이제부터 성경적인 기도관을 가지고 확고한 믿음의 기도를 함으로 가장 부자요, 실력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 구비한 사람, 영육이 잘 되는 형통한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참조: 87110653.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2-0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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