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행복을 애통으로 바꿔라

2012.09.09 16:42

윤봉원 조회 수:856 추천:49

약 4:5-102012090902날자: 2012년 9월 9일 주일오후
제목: 기쁨과 행복을 애통으로 바꿔라
본문: 야고보서 4장 5절 - 10절
1. 예수 믿는 성도는 슬퍼하면 안 된다. 항상 기뻐만 해야 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이 말씀대로라면 슬퍼하면 안 되지 않는가? 항상 기뻐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말씀을 어기고 슬퍼하면 죄를 짓는 것이지요? 맞습니다. 우리는 어떤 시련이나 환난 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을 보니까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고,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라고 했으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말씀인가요? 이 두 정반대되는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할까요?
이 두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하는 것이 올바른 성경적 정립인지를 알아보고 기쁨과 슬픔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2. 가져야할 기쁨과 슬픔, 버려야할 기쁨과 슬픔을 구별하라
2.1. 구별해야 하는 성경적 이유(정 반대되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생명과 평강과 기쁨을 아주 귀중한 축복으로 평가한다. 안 믿는 또 이종교에서는 이 쾌락이라는 이 쾌락을 가장 중점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어라” “웃음을 울음으로 바꾸어라” 하는 말씀을 하셨고 또 빌립보서 4:4에서는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기쁨을 가지라" 또 "기쁨을 근심으로 근심과 바꾸어라" 이 두 말씀은 서로 배치가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애버려야 할 기쁨도 있고, 우리가 가져야 할 기쁨도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또 9절에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슬퍼해야 할 사람들이요. 또 애통해야 할 사람들이요. 울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 무슨 말인고 하니 그 밑에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어라.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어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바꾸어야 할 웃음과 바꾸어야 할 잘못된 즐거움과 이 평강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인 것을 말씀한다. 그러면 우리는 현재에 자신이 어떤 기쁨과 웃음과 즐거움에서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근심과 울음으로 살고 있는지 또 하나님께서 어디서나 감옥에서든지 죽음 앞에서든지 고문과 고행 앞에서든지 늙음에서든지 가난에서든지 어디서든지 항상 기뻐하라 하는 이 기쁨으로 내가 살고 있는 사람인지 자신을 스스로 살펴서 확정지워야 한다. 만일 이 기쁨과 근심 이것을 바로 구별하지 못하고 우리가 일생동안 헛된 기쁨으로 산다는 것도 참 불쌍한 일이고 또 근심과 걱정과 울음으로 일생을 산다는 것도 그것도 참 불쌍한 일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먼저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라고 첫째 말씀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그러면 왜 슬퍼하고 애통하고 울어야 하느냐? 그 밑에 말씀하시기를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어라.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어라." 그러면 기독자의 초보가 웃음과 즐거움에 머물고 있다하는 그것을 여기에서 말씀한 것이다.
2.2. 세상과 세상 것(예수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의 행복의 가치를 바로 평가하라.
그러면 이 웃음과 즐거움은 어떤 웃음과 즐거움이며 무엇 때문인가?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가진 웃음과 즐거움을 가진 것인데 주님을 알기 전에는 이 세상 웃음과 즐거움에 세상 행복을 자기가 갖추어 살라고 애를 쓰지만 힘이 없고 또 일이 잘 안되니 희망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고 난 다음에는 성경에 "구하라 주실 것이라"라고 말씀 하셨고 또 창조주시며 대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넉넉하도록 다 책임을 지시고 이루어 주시려고 하신 구주를 찾았기 때문에 예수님 믿기 전에는 이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된 희망을 가지고 있지 못하던 사람들도 대 주재이신 구주를 찾고 보니까 이 구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그 희망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기쁨으로 웃음으로 살 수 있다.
또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과거에 자기가 이루지 못한 그런 일들도 예수님으로 인해서 일도 형통해지는 것을 체험하고 또 모든 일들이 잘되어서 성공되는 것도 체험하고 또 자기가 병들었던 사람이 병이 낫는 그런 것도 가정이 아주 파괴된 가정이 다시 돌이켜 재건(再建)을 하게 되는 그런 것을 체험하고 이러니까 믿는 사람들이 믿기 전보다 모두 다 기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지고 있는 그 기쁨이 성경이 ‘너희는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하는 그 기쁨에 행복인 참 웃음과 평강인지 혹은 그것이 우리가 안 믿을 때에 내나 소망하던 그 소망으로 인해서 안 믿을 때에 기뻐하던 그 기쁨의 행복을 인해서 우리가 기뻐하는 것인지 그것을 잘 심사(深思)하라는 말씀이다.
아무리 우리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자기 단독 힘으로 하지 못하던 것을 주님의 도우시는 지혜와 총명도 얻고 좋은 방편도 쓰게 되고 또 모든 면에 조심과 절제와 인내를 가짐으로 그 모든 일들이 잘 되어서 안 믿을 때보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고 몸 약한 사람이 강건하게 되고 남한테 멸시 천대 불신임 받던 사람이 신임을 받게 되고 또 자기하는 일들이 잘되고 이렇게 해서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된 웃음 기쁨 즐거움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가 고쳐야 할 것들인지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인지 한번 재심사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라는 이 말씀은 안 믿는 사람들이 가진 것과 같은 그런 것을 안 믿는 사람들의 방편과 힘으로 힘과 같은 그런 방편과 힘으로 해서 만든 그것만을 말씀하는 것 아니다. 그것으로 기뻐하는 것을 네가 슬퍼하라 그것으로 웃는 것을 네가 근심으로 바꾸어라 하는 말씀이 아니고 안 믿는 사람과 같은 그것을 이루는 그 방편이나 힘에 있어서 안 믿는 사람들보다 탁월하게 하나님의 법도와 하나님을 힘입어서 이루어 놓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가지고 만족하고 그것가지고 기뻐하고 그것의 소망을 단정 짓고 있는 그런 것들까지 다 합해서 그런 것들을 바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이 예수 밖에서 세상이 좋아하는 온갖 행복을 가질 수도 있고 예수 안에서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속한 행복을 가지고 만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바꾸어라 바꾸어라 하는 말씀은 예수님 도리 밖에서 가지고 있는 세상과 세상의 행복 그것도 의례히 바꾸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가지고 있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도 바꾸어라 하는 것을 여기에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 밖에서 가진 행복은 어떤 것인가? 예수님 밖에서 가진 행복은 안 믿을 때에와 안 믿는 사람들과 꼭 같이 하나님과 진리 밖에서 가진 행복이요 세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어겨 성공과 성사를 했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가진 그런 것들을 예수 밖에 있는 행복이라고 하겠다.
예수 안에 있는 세상 행복은 어떤 것인가? 예수 안에 있는 세상 행복이라 그렇게 구별할 수 있고 예수 밖에 있는 세상 행복이라 그렇게 구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밖에 있는 행복을 왜 애통으로 근심으로 바꾸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떠난 악령이 준 지식대로 비판하고 평가하면 행복덩어리요. 쾌락덩어리요. 영광 덩어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비판하고 평가한다면 순전히 그것은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뭉텅이 심판받을 뭉치 도살(屠殺)의 날에 잡는 자의 수입이 되도록 살찐 그 짐승처럼 하나님의 심판에 크게 정죄될 수 있는 그런 것들이요. 그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바꾸면 그 영광은 수치의 뭉텅이요. 그 풍성은 가난의 뭉텅이요. 그의 즐거움은 크게 고난의 뭉텅이가 되어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바꾸지 안하고 믿는 사람들이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시일을 따라서 하나님이 진노의 멸망을 점점 끌어오는 것이 된다.
2.3. 성경으로 구별하라
그러기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행복이라는 이 행복이 행복 뭉텅이가 아니라 이 멸망 뭉텅인지 그것을 우리가 먼저 살펴야 하겠다. 하나님에게 거슬린 행복 진리의 위반된 그 행복 소유 존영 그 권세라고하면 그것은 곧바로 멸망의 뭉치요. 저주의 뭉치요. 고난의 덩어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멸망 받는 그 시간까지 부인하고 가지만 우리 믿는 사람은 신구약 성경은 정확(正確)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우리가 확신하고 들어선 사람들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것을 비판하고 평가할 때에 멸망하기 전에 자기가 멸망의 뭉텅이인줄 알았는데 성경을 가지고 대조를 하니까 “이것이 고통의 뭉텅이로구나 아 이것이 고통 덩어리로구나 또 이것이 즐거움의 뭉텅이 아니라 근심의 뭉텅이로구나!” 이것을 찾아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을 찾아가져야 할 것이다.
예수 밖에 있는 모든 세상이 부러워하고 좋아하는 세상과 세상의 행복이라는 자기가 누리고 있는 온갖 쾌락 만족이라는 그 모든 그것이 예비 자신에서 스스로 자기를 심사하는 스스로의 심판에서 이것을 심판해서 “아 이것은 웃음 뭉텅이 아니라 근심 뭉텅이로구나 이것은 평강의 행복 덩어리가 아니라 이것은 고통의 행복 덩어리로구나. 이것이 내가 존영의 것이 아니라. 이것이 영영히 수치의 부끄러움의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성경 말씀에서 오늘에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심판해서 바꾸어 가지라는 말씀이다.
3. 세상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근심과 울음으로 바꿔라
예수 안에 있는 행복이 있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해서 갖춘 행복, 주를 위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행복, 지위나 권세나 명예나 영광이나 안일이나 쾌락이나 예수님 안에서 가지고 있는 세상과 세상의 것 이것이야 말로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며 하나님에게 받은 선물인데 왜 이것으로 인한 즐거움과 행복과 만족을 이것을 근심으로 애통으로 바꾸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가?
바꾸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떳떳한 안면으로 설 수 있는 한말로 하면 당신을 위하는 일, 당신을 존귀케 하는 일, 영화롭게 하는 일, 당신이 원하시는 기뻐하시는 일, 곧 자기에게 주로 인하여 받아가진 그것을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봉사의 하나님과 인간을 섬기는 일의 자기만 못한 자에게는 돕는 구제의 이 봉사의 일을 이것을 하라고 씨(종자(種子))로 주셨고 자기 몫에 해당한 것은 양식(糧食)이라고 구분했는데,
이것을 내가 쓸 수 있는 기회를 놓인 일을 후회(後悔)하여 애통(哀慟)하고 이것에게 소망을 두어 하나님으로 인하여 얻은 것이지만 이것이 있으면 하나님 없어도 든든하고 이것이 없어지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셔도 마음에 공허감을 가지고 자기는 분명히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에게만 순종하는 그 자기가 참 자기다.
이것이 정상이요. 다른 것은 비정상인줄 알면 어쩐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얻어 놓은 이것이 더 의지해지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썩지 않을 소망보다도 이 소망이 나에게는 더 풍성해져있고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섬기는 일, 인간을 섬기는 일, 의의 열매를 맺는 일, 나그네 세상에서 썩을 이것을 가지고 이것으로 썩지 아니할 것을 준비하고 욕된 이것으로서 영광스러운 것을 준비하고 이 모든 약한 것들로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이 모든 물질계의 것을 물질계의 것을 물질계와 신령계에 그 제한을 받지 않는 신령한 것으로 바꾸는 이 일에 대해서 등한이 하고 여게만 있으니 나의 모든 얻은 은총이 다 썩을 은총이요. 망할 은총이요. 멸망될 은총이다.
내가 진실로 세상을 볼 때에 예수 믿어 행복된 사람이라 하지만, 진실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나는 비참하고 가련한 사람이라는 이 애통으로 이 울음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세상에서 누리는 그 어떤 종류의 행복과 기쁨에 대해서도 일방적인 지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방적인 지식인 이 감옥에서 벗어나야 된다. 여기에서 해방을 받아야 된다. 간단하게 강령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 피조물만을 상대하는 피조물만을 근거로 해서 평가하고 비판하고 여기에 벗어나지 못하고 이속에 갇히기 쉽다. 피조물보다 크신 창조주가 있다.
우리는 피조물과 창조주를 함께 이 전체를 보고서 상대하는 이 전체적인 지식으로 우리는 탈피되어야 된다. 틔워나와야 한다. 벗어나야 한다. 우리의 갖춘 것이 피조물로서는 어느 정도 구비하고 인정을 받는다 할지라도 자기의 갖추어 놓은 데에 하나님이 빠졌으면 헛일이다. 피조물이 인정해도 하나님이 인정 안하시면 헛일이다.
그러기에 피조물만을 상대하는 내 소유관인지 내 행복관인지 내 쾌락관인지 안심하고 든든한 이 평강의 관인지 참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을 다 전체를 연결시켜서 이 전체를 상대한 이 소유 평강 이 능력으로 되어 있는 것인지 하나님만으로 치우치면 피조물과의 대립이 되는 것은 피조물과도 결말은 대립이 되고야 만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이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없는 천국이 없고 천국 없는 세상은 유황불 구렁텅이이다. 이 세상만보고 이것만 표준해서 우리가 산다면 이 사람도 일방적 지식으로 세상이라는 이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이니 이 감옥에 벗어나기 전에는 생명과 자기와 평강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과 영원무궁한 영계의 이 하늘나라를 이것을 함께 한 눈에 보고 세상과 천국인 이 전체를 망라해서 우리는 모든 비판도 가져야 하겠고 평가도 가져야 하겠고 또 모든 갖추는 것도 갖추어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이것이 일방적이 아닌지 혹은 양면을 갖추는 이 전체적인지 이것을 성경을 가지고서 비판하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 것을 부러워하든지 만족하든지 가졌든지 가지지 못했든지 한 이 사람도 자기가 할 일은 무엇인가? 애통할 일이다. 슬퍼하고 근심하고 바꾸어야 할 일이다. 예수밖에 어떤 것을 가졌든지 이 모든 것을 일단 버려야 할 것이 자기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첫 발자욱이다.
예수 안에서 어떤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 사람도 예수 안에서 세상과 세상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 사람은 일단 내어놔야 된다. 일단 포기해야 된다. 자기가 그것에 대한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이 주관의식을 주제의식을 이것을 완전히 포기해야 된다.
이것이 청지기가 얻은 세 가지 지혜 중에 한 지혜이다. 이것은 내가 영원히 가질 것이 아니라 나는 언젠간가 다 두고, 두고 떠날 내로구나.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 조물주가 잠깐 영원을 위해서 연습하고 연성하고 이용하라고 잠깐 보관권과 이용권을 나에게 관리권을 맡긴 것뿐인 주의 것이로구나. 나는 청지기로구나.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두고 갈 것 당신의 것을 가지고서 어떻게 영원한 장래에 대해서 내 자아에게 효력 있게 이것을 이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그것을 발견한 것이 이 어리석은 청지기가 새로 발견한 세 가지 지혜인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세상과 세상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사람들도 슬픔으로 근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예수 안에서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이 만족과 기쁨과 교만과 우쭐한 것과 배가 뿔룩해서 뒤로 교만한 자세를 하는 이 모든 것을 완전히 돌아서야 된다. 근심으로 바꾸어야 될 것이요. 울음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근심과 울음으로 바꾸어야 한다.
무슨 근심과 울음으로 바꾸어야 합니까? 썩을 것을 썩지 아니할 것을 얻기 위해서 썩을 것을 심지 안하면 오늘이라도 주님이 부르면 헛일이기 때문에 약한 것을 심지 안하면 강한 것으로 영원히 가질 수가 없고 욕된 것을 심지 않으면 영광스러운 것으로 가질 수 없고 물질계에 속한 것을 심지 안하면 신령한 것으로 영원히 가질 수가 없으니 오늘이 마지막 시간인지 이 시간이 마지막 시간인지 나의 미래에 대해서 생명에도 나는 자신이 없고, 건강에도 자신이 없고, 모든 활동화 되어도 자신이 없다.
언제 동결이 될는지 언제 종말시간인지 모르니 이 시간이 지나 가기 전에 이 큰 난제를 해결치 못하고 있는 요 애통과 요 근심이 그에게 없으면 그 사람은 자는 사람이요. 불쌍한 사람이다. 조만간에 크게 참 애통할 일이 있을 것이다.
오늘에 성령의 감화로 애통을 가지지 안하면 마지막에는 마귀가 주는 애통을 가지게 된다. 성령이 주는 근심을 가지지 안하면 마귀가 주는 근심을 가지게 된다. 그 근심은 영원하다. 그 근심의 연기는 세세토록 올라가고 꺼짐이 없다.
그런고로 예수 밖에 있는 모든 행복 예수 안에 있는 세상 행복 이것을 어서 빨리 바꾸어 가지고 어서 돌아서야 한다는 이 말씀을 주셨으니 이 시간 우리가 자기와 자기의 모든 행위와 사상과 욕망과 모든 소유에 대한 모든 것을 우리는 이 시간 돌아서야 할 것이다. 이 시간 다 애통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조급하고 다급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고 나면 위로부터 오는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참된 행복과 참된 소유가 우리에게 와지는 것이다. 우리는 근심과 걱정 애통 이것을 이 시간에 우리가 실천해야 한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참조. 81071201. * 윤봉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9-09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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