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하나님 나라의 특징

2006.04.13 22:49

윤봉원 조회 수:4266 추천:105

요 3:3-5200604

주제: 공관복음과 비교해 볼 때 요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서론

우리의 연구 주제인하나님의 나라가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에 70회 이상 나오지만 요한복음에는 단 두 번(3:3, 5), 그리스도의 나라(‘내 나라’)라는 표현으로 단 세 번(18:36)만 나오는 것이 전부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통하여 요한복음과 공관복음과는 너무나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전혀 없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방향으로 가르침을 하고 있는지, 이렇게 적은 횟수만 등장하는 그 이유를 알아 보고,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주장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 두 차이를 발견하기 위하여 먼저 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본론

2.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가. 현재성과 미래성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3:2; 참고, 1:1, 15)는 말씀은 옛 이스라엘의 예언적이요 종말론적인 전통의 일부분으로 이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여러 시간 많이 논의 해 왔다. 예수와 요한의 설교에서 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성부의 복음이지 성자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의미는 예수의 인격과 예수의 도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예수는 오리겐(Origen)이 표현했듯이 왕국 자신이다.’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세상적인 한계의 울타리를 다 부수었고, 귀로 들은 것은 지붕 위에서 전파되었다( 10:27).

특히 예수는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고 기적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은 많은 비유, 병자의 치유, 그리고 귀신 축출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이 땅에 현존하게 됨을 보여 주었다.[1]

따라서 공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미래적일 뿐만 아니라 현재적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경계가 그어지며 이 부활이 지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종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왔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가 더 이상 지상적인 영역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부활은 미래에 속하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미래의 첫 열매이며, 최후의 국면인 새 하늘과 새 땅은 여전히 미래에 올 것이다. 따라서 공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및 미래적인 의미가 풍부하게 공존하여 나타난다.[2]

나. 교회

또 복음서에는 바실레이아(basileiva)는 매 장마다 나타나지만 교회라는 말은 세 복음서를 통틀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16:18)만일 그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라”( 18:17) 두 번밖에 언급되어 있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는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 속에 통합되어 있어서, 모든 나라들로부터 소집되어 모인 기관이다. 이것이야 말로 바실레이아(basileiva)와 교회를 연결하는 거대한 물줄기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 메시야, 교회는 원복음 내에서 통일성을 형성한다.[3]

다. 영생

공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영생은 교호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가복음 9:43-47에서 이 두 단어는 동등한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9:43)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45)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47)

여기에서 영생지옥이 대조되어 나타나는 중에 47절에서는 영생대신에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지옥과 대조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이 두 의미는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으며, 공관복음에서 영생또는 생명이란 말은 16번 나타나고 있으며, 누가복음의 두 경우[4]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에 의해 주어질 미래의 생명을 의미한다. 그 중에 하나만 예를 들면 금세에 있어백 배나 받되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10:30) 여기서 마가는 영생이 내세에 주어질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다음으로는 요한복음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3. 요한복음의 특징

가. 기록 목적의 차이

성경의 각 권을 이해 할 때 각 권마다 기록 대상과 저자, 그리고 기록 목적을 분명히 이해함으로써 더욱 분명한 차이를 발견 할 수 있는데 요한복음은 독자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믿음을 증진 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5], 또 다른 이유는 요한복음서가 공관복음서와 또 다른 특별한 이유는 구원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개념에 있어서 초기 기독교 주류의 개념과는 다른 개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록이 되었기 때문이며[6], 기록 시기가 다른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7]

나. 기독론

또 공관복음서에서 잘 찾아 볼 수 없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고백하며 묘사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살펴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말씀(1:1,14), 독생하신 하나님(1:18), 독생자(3:16,18), 하나님의 아들(1:34, 49, 11:11, 20, 31), 아들(3:17, 36; 5:19-27), 사람의 아들(1:51등등), 예언자(4:19; 9:19), 메시아(1:41; 4:29; 11:11, 20, 31), 이스라엘의 왕(1:49), 유대인의 왕(19:19),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6:69), 하나님의 어린양(1:29, 36), 하나님이 보내신 자(3:16-17, 34; 5:30; 7:16-18; 특히 10:36), 보혜사(14:16), 나의 주 나의 하나님(20:28)’[8]

이러한 목록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은 제4복음서에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명칭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에서도 나타난 명칭에 강조점을 부여 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특별히 예수에게서 연유한 아버지라는 하나님에 대한 명칭은 마가복음에서 4, 누가복음에서 6, 마태복음에서 23,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107번 나온다. 이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창조 이전에 하나됨에 입각한 것이다(17:5, 24). 인자는 자신의 권위 있는 말씀과 행위 사역, 죽음과 부활, 재림 안에서 인류에게 구원과 심판을 가져 오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이다.[9]

따라서 성부와 성자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0: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다. 영생

공관복음에서는 예수와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의 표현법은 아마도 하나님의 통치에 초점을 맞추어 가르쳤기에 하나님 나라혹은 하늘 나라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요한복음에서는 나는이다로 대변되는 교훈으로서 생명의 떡(6:35), (8:12), 생명의 문(10:7), 목자(10:11), 부활(11:25), , 진리와 생명(14:6), 포도나무(15:1)이시다는 구절들에서 본질상 구원론으로 귀착된다고 주장한 큄멜의 지적이 적합해 보인다.[10]

따라서 제4복음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온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야 되신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20:31), 누리도록 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10).[11]

그렇다면 영생을 얻는 믿음은 무엇일까? 요한 스미스는 이에 대하여믿음에 이르는 방법은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요, 하나님의 최종 계시이며, 어둠의 세력인 사탄이 핍박을 하고(8:43-52), 회당으로부터 출교를 당하더라도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며, 세상의 거절로 인한 고통과 비난을 당해야 하며(12:42), 예수를 아는 자들이라(8:19; 17:7-8, 25)’고 정의하고 있다.[12]

라. 성령과 교회

4복음서에서는 교회(ejkklhsiva)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교회라는 사상과 실재는 전편에 걸쳐 전제로 깔려 있으며, 개인과 집단 사이의 긴장을 담고 있으며, 성령(보혜사)[13]이 신자를 전체 교회에 영생으로 이끄는 분으로 보여 지며, 예수의 사역 초기에 예수 위에 강림하셔서 그 위에 머물렀으며(1:32), 2 자아(alter ego)로서 활동 하신다. 뿐만 아니라 부활 이후에는 성령보혜사의 내주하심과 그 활동력을 체험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14:16). 따라서 성령은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현재에서 미래에까지 예수와 함께 동일하게 교회에 사역하심을 증거 하고 있다.

마. 실현된 종말론

예수는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에게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3),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고 말씀하셨으며, 또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내 나라가 세 번 언급되고 있다(18:36). 공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 103회 사용된 것과 비교 해 볼 때 요한복음의 이런 현상은 아주 특이하게 보인다.[14]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예외(3:3-5; 18:36)가 있긴 하지만 그 나라의 실재가 제4복음서의 기사 안에 현존하고 있기에 비슬리-머레이는 ‘하나님 나라의 중요성을 그 복음서 기자가 전제하고 있으며 그것을 직접 진술할 필요가 없었다[15]고 보았으며 완전한 의미에서 왕국은 여전히 미래에 속해 있지만 예수가 주(Lord)로서 인정되는 범위에서 그 왕국은 현존하며, 미래의 상태는 예수의 하늘의 주권 아래 있는 교회의 삶 가운데 이미 작용한다[16]고 보는 실현된 종말론적 사상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 5 24절 중 신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17]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metabe,bhken[18] evk tou/ qana,tou eivj th.n zwh,n)는 말씀은 의심할 바 없이 공관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사역, 죽음, 그리고 부활과 더불어 또한 말미암아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에 관한 진술들과 조화를 이룬다( 4장의 비유들, 11:5-6= 7:22-23; 12:28; 11:12-13= 16:16). 공관복음에서는 찾아 내져야 하는 것이 요한복음에서는 표면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19] 미래의 상태가 이미 실재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실현된 종말론이 유일한 양상은 결코 아니다. 4복음서에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관하여 확연히 말하고 있다.(6:47; 6:40b; 14:3) 따라서 요한복음의 종말론은 이렇게 상호 보완적인 사상들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얽혀 있다. 즉 역사적 실체와 초역사적 실체 사이의 상호 내속성(coinherence)을 발견하게 된다.[20]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제4복음서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사실상 사라진 이유에 대하여 문학적, 신학적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옹호하는 주장들을 살펴 봄으로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는 일찍부터 열광하는 군중들이 12:13예수께 부여했던 영예로운 칭호인 이스라엘의 왕으로 규정된다. ‘왕이신 예수는 이중의 의미들로 가득 찬 이 복음서 안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문학적 표현이다(참고. 6 ;49; 18: 33,37a, 37b, 39; 19:2, 3, 12, 14, 15a, 15b, 19, 21),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공관복음,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의 글들에서 그 나라를 언급하고 있는 대부분이 하나님의 나라 또는 왕이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한은 3:3, 5의 예외가 있으나 그 나라의 소유주를 예수와 왕이신 예수로 규정하였다.

둘째, 신약 연구는 제4복음서에 나타난 그 나라의 소유권 변동이나, 이 복음서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 실종으로 말미암아 제기된 특별한 문제를 분명히 밝히려고 노력하면서 신약 연구를 통해 요한의 공동체 또는 요한 학파의 역사에 관하여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아직도 충분히 활용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나라개념이 나타나지 않음에 대한 문학적-신학적 설명이 매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문제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곧 예수의 설교에서 그 나라가 정말 중심 주제라면 왜 그 나라는 요한 복음의 변두리에 겨우 등장하는가, 예수가 왕이라면 왜 요한은 예수의 나라에 관하여 말하기를 꺼려하는가, 요한은 그 나라의 소유권을 하나님으로부터 예수에게 옳겼는가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 문제들을 푸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요한 학파의 주장들을 살펴 보고자 한다.

4. 요한 학파의 주장

가. 요한행전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요한행전을 가장 최근에 편집한 쥬노드(Junod)와 캐스틀리(Kaestli)에 따르면, 요한행전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부분들은 두 개의 큰 자료를 포함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세베대 요한의 신격화와 전기이며(18:93; 103-108; 110-115), 두 번째는 빛의 십자가와 그 춤에 관한 유명한 찬송을 다룬 하나의 담화를 포함하고 있는 요한의 설교 요약이다(94-102; 109).

이들은 요한행전이 동방 시리아와 이집트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요한복음 13, 곧 발을 씻어 주는 장면을 모델로 삼고 있는 한 본문에서, 그 세베대 사람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어떻게 그가 처음 예수의 다면적 모습을 경험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또 그는 다른 비상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식탁에 기대었을 때, 그는 나를 그의 품에 안곤 했으며, 나도 그를 꼭 안았다. 또 때때로 나는 그의 품을 부드럽고 연약하게, 어떤 때는 바위처럼 딱딱하게 느꼈다”(요한행전 89).

이 본문에서 가장 놀라운 모습은 세베대 요한을 요한복음 13:22의 사랑하는 제자와 같은 이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주의 깊게 읽지 않은 사람이 이 동일시를 놓쳤다 하더라도 이어지는 본분에 나타나는 동일시의 반복까지 놓치지는 않을 것이다.

또 다른 때에 그가 나와 야고보와 베드로를 그가 기도하시곤 하던 산으로 데리고 가셨는데, 우리는 꼭 없어질 말을 쓰는 인간이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빛이 그에게 임함을 보았다 ‥‥ 재차 그는 나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면서 같은 식으로 세 번 우리를 그 산에 데리고 올라가졌다. 그리고 우리는 갔으며 ·. 그리하여 그가 나를 사랑하셨기에, 나도 조용히 그를 좇았다”(요한행전 90).

발을 씻어 줌과 모습의 변화 이야기에 관한 이 설명들은 어떻게 요한행전이 사랑하는 제자라는 그 인물을 예수의 삶의 두 장면에 집어 넣음으로써 이 목적을 달성했는지를 보여준다.[21]

요한행전의 전승 형식과 권위는 요한일서 서문(참고. 요일 1:1-4)의 특징과 주제들을 비교 해 보면 더욱 강화 된다.[22]

만일 사람들이 요한행전 안에서 기독론과 신론이 하나로 통합되고 있음(예수가 곧 하나님이며, 왕이며, 그 나라의 유일한 소유권자)을 상기한다면, 4복음서와 요한서신이 그 나라에 관하여 말을 아끼고 있는 것과 요한행전이 그 나라에 관한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데 대한 반응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 나라를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본문은 그 본문이 요한 학파의 비정통 진영 안에서 그 나라에 관한 사상이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기에 인용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이 증거로서 갖는 가치는 제한적인데, 그 이유는 이 본문이 요한행전에 3세기 또는 4세기에 첨가된 것으로 믿었던 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에베소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 앞에 서서 그의 믿음을 설명하였다. 요한으로 하여금 답변을 재촉하는 질문이 황제로부터 나왔으니, 네가 내 나라(basileiva)가 견고하지 못하여 무너지게 되고, 다른 이 곧 예수라는 이가 나 대신 통치할 것이라고 예언한다는 요한이냐?”(요한행전 8)이다.

나. 셋 영지주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다음은 셋 영지주의자들[23]셋 영지주의 기록에서 그 나라는 구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방해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 또는 사상으로 변형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때 천사들과 모든 권세들이 그 이름을 잘못 사용하며 물을 것이다. “그 잘못이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또는 그 허위의 말들, 곧 모든 권세들이 발견하지 못하였던 그것들이 어디에서 온 것이냐?”(이제) 첫 번째 나라가 (그에 관하여 말한다) 그가 (∼로부터) 왔다. [왕이 없는 그 세대, 곧 셋 영지주의자들을 소개하는 나머지 열두 나라에 관한 서술이 뒤따라 이어진다] 그러나 그 위에 군림하는 왕이 없는 그 세대는 하나님이 그를 모든 시대로부터 선택하였음을 말하고 있다(아담묵시록 V, 5:77, 18-29; 82, 19-22).”

이 글의 주제에서 열세 나라에 대한 서술은 한 무리를 지시하고 있는데, 이 무리를 위해 그 나라 개념이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적 의미를 가지도록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무리는 공관복음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을 둘러싸고 조직된 교회들일 수 있으나, 또한 나라의 언어에 대한 더 충만한 호소를 포함하고 있던, 그들 시대의 요한 교회들을 구성할 수도 있다(참고, 3:3, 5). 셋 영지주의자들을 왕이 없는 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열세 나라에 관한 구절들(82:19 -83:6) 뒤에 오는 한 본문이 뒷받침해 주고 있다. 셋 영지주의자들은 그 나라를 하나의 부정적 상징으로 변형시켰다

결론적으로 요한 학파 내의 셋 영지주의는 구원을 신화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그 나라를 주장했으며, 이 때문에 요한 학파내에서 더 이상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의미를 가진 상징이 되도록 그 나라 개념을 변형시켰다. 후대의 요한 학파 내의 정통에서는 다른 상징들(영생, , 진리)이 구원을 상징하게 되었다.[24]

결론

지금까지 살펴 본 것을 정리하여 보면 공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균형 있게 강조하고 있으며, ‘하나님 나라영생은 교호적(交互的)으로 사용되었으며, ‘영생은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에 더 강조점이 있었으며, 교회에 대한 가르침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기록 목적에서 살펴 본대로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믿음을 증진시키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가졌었기에 예수와 성령보혜사의 사역을 통하여 생명또는 영생을 현재에 누리는 현재성에 대하여 더욱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파악 할 수 있었다. , 기독론적 관점과 요한학파의 주장처럼 예수의 다면적 모습을 상기시켜 볼 때 요한복음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적게 나온다고 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점이 저하되었거나 도외시 된 것이 전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참고 서적 목록

노재관, 「요한신학」서울:성광문화사, 1997.

Ridderbos , 「구속사와 하나님의 나라」서울:반석문화사, 1994.

무디 스미스, 「요한복음 신학」서울:한들출판사.

Barnabas Lindars, 「요한복음」서울:이레서원, 2002.

안효선, 「제자들 성경연구 4」서울:에스라서원, 1995.

G. E. 래드 「신약신학」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4.

Beasley-Murray, WBC 요한복음」서울:솔로몬, 2001.

스트븐 S. 스몰리, 「요한신학」서울:생명의 샘, 2004.

웬델 윌리스, 「하나님의 나라」서울: 솔로몬, 2004.

 

 



[1] 노재관, 「요한신학」서울:성광문화사, 1997, pp. 145-46.

[2] H. N. Ridderbos, 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Ridderbos , 「구속사와 하나님의 나라」서울:반석문화사, 1994, pp. 62-75.

[3] H. N. Ridderbos, 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pp. 75-77.

[4] 누가복음 12:15 (생명) 16:25( 살았을)에서는 일반적인 의미로 언급되고 있다.

[5]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0:30-31)

[6] Barnabas Lindars, 「요한복음」서울:이레서원, 2002, pp. 99-100.

[7] 효선, 「제자들 성경연구 4」서울:에스라서원, 1995, pp.10-159.: 공관복음의 저작 시기는 주후 약 45-60, 요한복음은 주후 약 85-95년으로 추정함.

[8] G. E. 래드 「신약신학」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4, pp. 323-40.

[9] Beasley-Murray, WBC 요한복음」서울:솔로몬, 2001, pp. 101-04.

[10] Murray, WBC 요한복음」p. 105.

[11] 래드 「신약신학」p.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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