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남북이 통일되기를 원한다.

2003.02.08 17:17

윤봉원 조회 수:1062 추천:157



유월이 되면 제일 먼저 생각 나는 게 6.25 사변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출근 하신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에 아버님께서 급하게 집에 오셨다.

어머님께 “어서 아이들 에리고 남상 처갓댁으로 가라고” 하셨다.

어머님은 왜 갑지기 가라고 하는지 물으셨다.

‘난리가 났다’ 고 방송을 했는데 이북에서 인민군이 서울을 거쳐 김천까지 왔으니 빨리 피난을 가라고 하셨다.

믿기지 않은 어머님은 새로 사 놓은 그릇들을 동이로 싸서 찬장에 챙겨 넣으려니까 아버님이 “지금 사람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그릇이 눈에 보이냐면서” 발로 그릇을 밟으려고 하시자 어머님이 급히 옷가지와 돈을 챙긴 뒤에 남동생을 데리고 나섰으며, 언니와 나는 책보따리만 들고 어머님과 함께 걸어서 남상면 대산리에 있는 외갓집으로 피난을 갔다.

그 떼 아버님은 군청 양정계에 근무 하셨는데 군인들의 식량을 공급해야 되기 때문에 함께 갈 수 없으며 혹시 부산으로 갈른지 모르니까 기다리지 말고 누가 직업을 물으면 농사 짓는다고 하고 산에 나무하러 갔다는 말을 하라고 하시고는 군청으로 가셨다.

외갓집에 간지 이틀만에 인민군들이 동내에 들어와서 총을 겨누며 밥과 음식들을 닥치는 대로 먹고, 챙겨 갔으며, 마당에 있는 닭과 가축들을 잡아갔다.

공포에 질려서 덜덜 떨고 지낼 때 에 총소리가 밤새도록 귀고막을 찢을 것 같이 들려왔고 번갯불 같은 것이 계속 눈 앞을 스쳐가는 가운데 밤을 지새우고 나니 또 인민군들이 총을 들고 와서 외할머님과 외숙모님의 가슴에 총을 대로 부엌에서 밥을 한 솥 다 지을 때 까지 지켜 섰다가 밥이 다 되자 다른 음식들과 마당에 심어둔 오이와 고추도 되는대로 따 갖고 갔다.

숨막히는 시간들 속에서 우리 가족들은 더욱 겁에 질려 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을 때 외삼촌의 주선으로 우리 식구만 건너편 산에 있는 방공호로 피신을 했다.

사흘을 방공호 속에 있으니 너무 배가 고파서 동생과 내가 보채니까 어머님이 주위를 살펴 보신 뒤에 방공호 밖에 나오라고 해서 밖에 나가 개울 물을 먹고 배를 채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네 살짜리 남동생은 개구리를 잡아 달라고, 떼를 쓰다가 꾸중을 듣게 되자 언니가 조심스럽게 잡아 주었다. 나흘 째 되는 날 인적을 피해서 꽁보리밥을 뭉친 주먹밥을 낯선 아주머니가 방공호로 갖고 왔다.

아주머니 말에 ,UN군 비행기를 떨어뜨리려고 며칠 째 계속하여 인민군들이 총을 쏘았는데 그 탄피가 산등성이를 이루었다고 했다. 총소리가 그치고 비행기 소리만 나기 시작하여 방공호에서 나와 보니 비행기가 내려 갔다가 올라오면 ‘꽝’ 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고, 한대가 올라오면 또 다른 비행기가 내려 가서 폭격을 했다. 곳곳에 숨어있는 인민군들을 겨냥해서 폭격을 하는 바람에 거창읍 내에 있는 중요한 기관들과 내가 다니던 거창 고등학교의 일부가 폭격을 당했고, 우리집은 잿더미가 되었으며 우리 동내는 허허 벌판이 되었다.

거리에는 전선들이 쫙 깔려 있었고, 중공제 탱크가 곳곳에 있었다. 9.28 수복 후에 학교에 갔으나 교실이 없어 잔디밭에서 공부를 했고, 가교사가 지어져서 2부제 수업을 했으며, 4학년 때 부터는 냇가에 가서 돌을 이고, 모래를 이고 와서 학교 담을 쌓는 데 협력하였다.

땅은 황폐하여 져서 잘 안되었다. 가뭄과 흉년으로 해마다 보릿고개를 맞게 되었는데 농촌과 산촌에서는 초근복피로 연명을 했고, 들에 나가 쑥을 캐어와서 가루를 조금 넣고 쪄서 먹기도 하며, 맑은 물을 마시면서 끼니를 때웠으나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였다.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님의 봉급이 쌀 한 가마니였다고 했다.

1년치 봉급인지, 1개월치 봉급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척 생활이 어려웠다. 호박잎을 부벼넣고, 개떡을 넣은 죽을 끓여 주면 먹기 싫어서 국물만 마시다가 배가 고파서 어느 새 개떡도 다 먹었다.

차츰 행정질서가 잡히고 아버님의 봉급이 제대로 나오게 되어 최소한의 식생활은 해결 되었다. 그러나 산 속에 있는 빨치산들은 수시로 내려와 식량을 탈취해 가고, 민심을 교란 시켰다. 특히 신원면과 고제면이 심했다. 아버님 아는 분이 ‘인조’를 팔아 달라고 맡긴 것을 고제면 개명리에 있는 큰집에 갖고 갔던 어머님이 빨치산에게 인조 2필과 ‘도만증’을 뺏기고 겨우 위험을 면하고 오셨다. 이런 빨치산들을 근절 시키려다가 신원면 ‘양민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념이 무엇이며, 사상이 무엇인지 정말 알 수 없는 무서운 현실이었다. 동족 상장의 큰 비극이었다. 우리 모두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해야 한다.

지금 북한은 식량문제로 아주 어렵다고 듣고 있다. 우리도 IMF로 인해 힘들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 더욱 근검절약하여 북한동포돕기 운동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함으로 남북이 오직 복음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기를 전심으로 기도하기 바란다.

창원극동 방송을 듣던 중에 차범근 감독이 독일에 갔을 떼 독일 선수들의 식사 모습을 본 이야기를 했다. 달걀 후라이의 노른자가 터져서 쟁반에 묻은 것을 식빵으로 닦아서 먹거나 접시를 혀로 핥아서 깨끗이 먹는 다고 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음식 쑤레기가 많이 나온다. 각 식당에서나 가정에서 알뜰식단을 짜고, 식사 때는 덜어 먹으면 낭비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위기가 기회’ 하고 했으니 하나님 말씀 안에서 위축된 마음을 넓혀 IMF를 잘 극복하기 바란다.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하자.

유월을 맞이 하면서…

진해 충무동 교회. 이정민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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