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나가나 아들타령

2003.04.10 12:43

윤봉원 조회 수:838 추천:122

오나가나 아들타령

주일 날 교회에서 점심을 먹는 데 무씨래기와 쑥을 넣고 끓인 국이 어찌나 시원하고 고향맛이 나든지 맛있게 먹었다. 시금치 나물도 맛있고, 묵은 김치는 깊은 맛이 나는 게 별미였다. 지금도 쑥 캐러 다니는 이들이 있지만 내가 어릴 때 쑥 캐러 다니던 것처럼 아이들이 들로 나가는 일은 드물다.

학교가 일찍 마치거나 토요일에는 소쿠리와 칼을 갖고 들에 나가서 쑥 냉이 꽃다지 할 것 없이 서로 먼저 뜯느라고 야단이었다. 동그라미를 크~게 그려좋고 “이건 내 땅” 하면 다른 친구들은 더 크게 두 세개나 그렸다.

자기 땅의 나물만 뜯어야 했다. 나물을 뜯다가 잔디밭에 모여 앉아 서로 소쿠리의 나물을 눈대중으로 보고 “너는 나보다 많이 뜯었다. 나는 집에 가면 엄마한테 꾸중 듣겠다” 하며 걱정을 하는 척 하다가 호호 거리며 웃어 쌓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봄 나물을 뜯느라고 정신이 없는 데 건너편에 있는 친구가 큰 소리로 “영자야! 너거 엄마 아 낳았다” “언제? 뭐 낳았노?” “가시나 낳았단다.”

“알았다. 나먼저 집에 간다.” 며 나물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오던 길로 가면 늦을 것 같아 냇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이 발목까지 오더니 중간쯤 들어가니 배까지 왔다. 우리 동네 냇물이고 여름에는 멱을 감는 곳이기에 아무 겁 없이 들어섰으나 옷을 흠뻑 적시고 집에 들어서니 추워서 덜덜 떨렸다. 부엌에 있던 어니가 손에 입을 대며 “쉬!” 하였다. 나눈 눈치도 없이 “언니야! 아이는 어디 있노?” “방에 있다. 조용히 해라 엄마는 또 가시나 낳았다고 울고 있다” 언니는 콩잎파리를 부벼 넣고 죽을 끓이느라고 부엌에서 불을 때면서도 신경은 나에게 쏠려 있었다.

젖은 옷을 대충 갈아 입고 부엌에서 불을 쮠 다음 갓 낳은 동생을 보니 참 예뻤다. 며칠 지나서 동생이 울기에 언니가 주는 밥물을 아이 입에 떠 넣었더니 아이는 자지러지듯이 울다가 ‘캑’ 하며 입에서 밥알이 나왔다.



엄마에게 꾸중을 들었다.



6.25 직후였으니 아버니의 봉급도 제디로 타지 못했고, 먹을 것이 귀한 때라서 어머님의 영양부족과 아들이 아닌 딸을 낳고 보니 이래 저래 몸과 마음이 불편하여 젖이 잘 나오지 않았었다. 내 밑에 남동생이 하난 있었지만 세 번째 딸을 낳고 보니 엄마는 좀 해서 마음이 풀리지 않았었다.

친정 할아버님이 3대 독자시니 증조모님께서는 사촌 언니의 이름이 숙희인데 시둘이라고 부르시고, 우리 상난 언니는징둘이라고 이름을 지으셨다. ‘둘’ 자가 들어가면 밑에 아들 낳는 다고 내가 시집와서 첫 딸을 낳았들 때 시어머님은 작명가각 지어 준대로 은순아! 하시며 첫 손녀라서 애지중지 하시더니 둘째 딸 정임이를 낳은 뒤에는 ‘둘래’라고 부르셨고, 셋재 딸 승희는 ‘달래’ 라고 부르셨다. 손자를 기다리시는 시어머님의 정성도 소용이 없었고, 친정에서나 새댁에서나 아들을 기다리는 ‘둘’ 자를 넣은 이름은 나를 따라 다녔다.

예수님 영접하기 전이었으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라 하도 답답해서 철학관에 가서 이름을넣으니 아들을 낳으려면 이름을 고쳐야 된다고 해서 영자라는 이름을 정민으로 고쳤으나 아들은 낳지 못했다. 큰 딸은 남매를 두었고, 둘째 딸은 아들 하나를 낳았다. 하나님께서 귀한 외손자 둘과 외손녀를 주셨다. 막내 딸 달래에게는 어떤 선물을 주실른지 잠잠히 기다리며 기도 드리고 있다. 쑥이 한창인 것을 보면서 나물 뜯던 때를 생각하니 나만이 간직한 아름다운 상념인 것 같다.



1999.  3. 8. 진해 충무동 교회 이정민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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